64- 에릭 라빌리우스
등대는 배들이 항구나 연안항로를 찾는 데 표지 기능을 한다. 특히 캄캄한 밤바다에서 등대의 서치라이트는 좋은 길잡이이다.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험한 파도를 이겨내며 바다를 건너와 이제 닻을 내리려는 순간, 이 등대 불빛을 발견한다면 어느 선원인들 안도하지 않겠는가. 거꾸로 이 등대에 서게 된다면, 캄캄한 밤에 어느 배 한 척이라도 불빛을 놓치지 않고 무사히 항구를 찾도록 열심히 등대 불을 밝혀야 하지 않겠는가.
보통 등대 그림은 바깥에서 그 외양을 그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그림을 그린 에릭 라빌리우스(Eric Ravilious : 1903-1942) 역시도 별도로 바깥에서 그린 등대 그림이 따로 있다. 하지만 이처럼 등대 안에서 등대를 그린 그림은 극히 예외적이다. 이 등대는 영국 런던 남부 이스트 에섹스의 비치헤드에 있는 등대이다. 1832년에 지어졌으나 해안절벽 위에 위치한 관계로 항상 안개에 뒤덮혀 있어 가시거리가 짧다는 단점과 함께 절벽의 침식 우려로 1902년에 폐쇄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과정에서 거의 붕괴되다시피 하였다가 다시 복원되어 현재는 관광숙박시설로 이용되고 있다.
에릭 라빌리우스는 영국 태생으로 주로 수채화를 그렸다. 잠시 유화를 시도해 보기도 하였지만 바로 수채화로 되돌아와 여기에만 전념하였다. 1939년 그는 종군화가 자문위원회의 풀타임 종군화가가 되었다. 이 그림은 본격적인 군 생활전 민간인으로서 생활을 마무리하면서 인근 지역을 돌아보는 과정에서 제작된 것이다. 그는 해병대의 명예대위로 해군성에서 복무하였다. 종군화가로서 등대뿐 아니라 항구, 배, 잠수함, 비행기 등 당시의 전황이나 병영 모습을 알 수 있는 다수의 전쟁 기록화를 남겼다. 하지만 그 자신은 1942년 39세의 나이로 해군 소속 항공기를 타고 가다 불의의 사고로 아이슬란드 연안에서 행방불명되었다. 문학에서 사막으로 날아간 생텍쥐베리가 있다면, 미술계에는 바다로 날아가 돌아오지 않은 라빌리우스의 전설이 있는 셈이다.
해안절벽 등대의 창에 짙푸른 능선이 절반, 파란 바다와 하늘이 절반이다. 오른쪽으로는 햇살이 눈부시다. 막막한 인생 항해에서 의지할 수 있는 마음의 등대 하나 가질 수 있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