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존 밴빌의 <바다>와 보나르
늙고 병들어 조만간 사멸의 운명을 받아들여야 할 것 같은 예감만이 몸 구석구석의 감각으로 느껴질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인생 등정길에 산을 내려오면서 삶을 마무리하는 방법은 여러가지이다. 버킷리스트를 작성해 보는 것도 한 방법이고, 평범한 범인의 인생 자서전을 써보는 것도 한 방법이다. 존 밴빌의 <바다>는 그동안 가보고 싶었지만 가지 못했던 과거의 어떤 장소에 노년에 이르러서야 드디어 가보는 버킷리스트를 달성하는 형식을 빌어, 그 과정에서 떠오르는 회상과 지금의 생각들을 통해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는 회고록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노년의 미술사학자 맥스는 유년 시절 자신의 인생에 한 전기가 되었던 바닷가를 다시 찾아 자신이 꿈꾸었던 인생의 야망과 사랑, 성취와 상실 속에서 생의 의미를 다시 반추해 본다. 어떤 과거는 시간이 지나면서 가뭇없이 잊혀지지만, 또 어떤 과거는 시간이 지날수록 또렷해지기도 한다. 만약 그것이 과거와의 불화 또는 트라우마라 한다면 생의 마무리 단계에서 해원의 과정은 반드시 필요하다. 주인공 맥스가 찾아간 곳은 물리적 공간으로 "밸리레스"라는 바닷가의 "시더스"라는 집이지만 그 바다와 집은 사실 현재의 것이 아닌 과거 시간대의 것들이다. 책 말미에 화자 스스로 선물받은 만년필로 이 말들을 쓰고 있다고 언명함으로써 이 소설은 맥스의 회고록 형태로 밝혀진다.
작가 존 밴빌(John Banville)은 어렸을 때는 문학보다는 미술에 관심이 많아 화가나 건축가가 되려고 하였다. 그런 연유로 그의 작품에는 종종 가지 않은 길에 대한 향수가 묻어난다. <바다>의 주인공이 프랑스 화가 보나르를 전공하는 미술사학자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미술사학자가 소설의 주인공으로 나오는 것은 이외에도 <언터처블>이라는 소설이 한편 더 있다. 그 소설은 실존인물이기도 한 미술사학자 앤서니 블런트가 주인공인 실화소설이다. 이러한 점을 감안한다면 <바다>에서 심리나 대상, 상황 묘사에서 그림들이 직간접적으로 차용되고 있는 것은 전혀 특이하지 않다.
<바다>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되는 그림들은 5점이다. 우선 보나르의 그림이 가장 많은데, 이는 화자가 보나르를 전공한 미술사학자이기 때문이다. 직접 언급되는 보나르의 작품은 일련의 <자화상>, <창문 앞의 탁자>, <개와 함께 있는 욕조의 누드>이다. 그밖의 작품으로는 반고흐의 <자화상>, 페르메르의 <우유 따르는 하녀>가 있다. 여기에 직접 작품을 언급하지는 않지만 화가의 그림 소재나 장르를 언급하는 형식으로 그림을 동원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두초의 성모마리아, 제리코 또는 라투르의 야간 스케치, 휘슬러의 그림에 나오는 어머니, 일본 판화의 춘화 등을 빌어 묘사한다.
<바다>는 자신의 삶을 이루었던 한때 가까웠던 것들의 상실과 비애를 통해 생의 비의를 찾기 위한 여정이다. 그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들은, 신들은 떠났다. 조수가 이상한 날이었다. "
맥스는 거울 앞에서 노년의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말년의 보나르가 거울에 비친 자신을 그린 일련의 <자화상>들을 떠올린다. 생의 활기를 잃고 노화되어 가는 낯선 육체와 불현듯 마주치는 대면에서 나온 자연스러운 연상이다. 야윈 얼굴의 직접적인 묘사에서는 반고흐의 <자화상>을 활용하기도 하지만, 본인이 느끼는 정조는 보나르의 그림에 더 가깝다. 이는 화자 자신이 상처를 하고 외롭게 홀로 남은 처지라 아내 마르트를 잃고서 그렸던 보나르의 그림이 더욱 가슴에 와닿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보나르의 <욕실 거울속의 자화상>은 추레한 노년의 알몸 상반신을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다. 무엇보다도 충격적인 것은 눈동자 없이 검게 함몰된 눈두덩이다. 자신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영혼의 창이라는 눈을 그리지 않음으로써 황폐해진 정신세계를 노출시키지 않으려 했던 것일까. 보나르의 그림은 얼핏 보면 단순하고 평이하게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거기에는 섬세한 복잡함과 기이한 슬픔이 담겨 있다. 한때 가졌던 그렇지만 지금은 잃어버린 청춘의 풋풋함과 전성기의 화려함이 뒷배경의 노란 빛 속으로 투명하게 스러진다.
낯선 시간, 낯선 공간에 있는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해 그 실체감조차 느껴지지 않을 때도 있다. 그 이미지는 마치 보나르의 <창문 앞의 탁자> 가장자리에 떠도는 옆모습으로 보이는 유령 같은 형체와도 같다. 자기가 알고 있는 자아와 다른 낯선 타자로서 자신의 존재는 실체를 확신할 수 없는 유령과도 같은 존재이다. 화자 자신도 분명히 이를 언급한다. "나는 나 자신의 유령이 되어가는 것 같다." 원래 이 그림은 주인공 맥스가 어렸을 때 같이 지내던 여자친구 클로이에 대한 묘사에서 나오지만, 보나르의 다른 그림들에서도 잘 식별되지 않은 채 모호하게 그려진 인물들이 등장한다.
인생은 알 수 없는 모호함으로 가득 차 있다. <바다>의 화자 역시 1인칭 서술임에도 불구하고 모호한 화법으로 진술한다. 예를 들면 이렇다. "나는 돌을 내 입술에 갖다대는 것 같았다" 회상을 하면서 기억에 자신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자기 자신조차 객관화시키려는 것인지 모르지만 과거 속 현실과 상상은 종종 서로를 침범한다. 원래 기억이 그런 것이지 않는가. 우리가 기억하는 기억은 실제가 아닐 수도 있다. 개인의 심리는 아주 허술하든가 아니면 간교하기 이를 데 없어 기억의 왜곡은 물론이고 거짓기억까지도 만들어낸다.
인생에 확정적인 것, 단정적인 것이 어디 있던가. 어쩌면 모호한 채로 남아 있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끝부분에 이르러서야 책의 첫 문장에서 나오는 "그들"과 "신"의 의미가 드러나는데, 그것은 화자의 어린 시절 자신이 꿈꾸었던 이상적인 세상의 성원으로서 자신의 여자 친구 클로이와 그녀의 쌍둥이 남동생 마일스이다. 이들은 화자가 구분했던 사회적 신분 사다리의 상층부 맨윗층 부류로 화자가 속하고자 하는 신분 상승의 대상으로서 완벽한 존재라는 점에서 절대적인 신의 지위를 갖는다. 그들은 어떤 계기로 그 해 바다에서 죽게 되는데, 그 사실만 확실할 뿐 그 진상은 미스테리로 남는다. 아니 화자 스스로 미스테리로 남겨 놓는다.
<바다>는 어떻게 보면 성장소설이기도 하다. 그들이, 신들이 떠나갔을 때, 화자의 한 세계가 문을 닫는다. 하지만 서술방식은 시간의 흐름을 단선으로 따르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어린 시절 성장 배경으로서 단편적인 가정사나 교우 관계, 성에 눈을 뜨면서 주위 여성들에 대한 성적 자각 등이 회상을 통해 전개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내의 투병과 죽음, 딸과의 애증 관계, 숙소 주변의 인물들과의 과거와 현재의 관계 등이 서로 교차하면서 삶의 무늬를 직조한다. 그 무늬는 결코 특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들이어서 어느 정도 보편적 공감을 얻는다. 일례로 딸 가족의 예정된 방문을 들떠서 기다리는 옆방 퇴역 대령의 이야기는 바로 우리 이웃의 사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보나르의 <개와 함께 있는 욕조의 누드>는 르카네라는 소도시에서 아내 마르트와 은둔생활을 할 때 그린 일련의 욕조 시리즈중 하나이다. 마르트는 이때 욕조에서 긴 시간을 보내는 습관을 가졌는데 보나르는 그런 그녀를 반복적으로 그렸다. 화자의 아내 애나 역시도 아프게 되자 오랫동안 목욕하는 습관을 갖기 시작하였다. 보나르와 마르트가 그들의 집 르보스케에서 은둔했던 것처럼 화자 부부 역시 애나가 죽기 전까지 그들의 바닷가 집에서 두문불출한다. 화자는 보나르의 이 그림을 통해 죽은 아내를 담담히 회상한다.
화자는 어린 시절 그 해 바닷가에서의 그 사건 이후 봉인되었던 과거의 한 세상을 다시 해제시켜 반추하고 동시에 이후 그가 겪었던 이런저런 인생사의 굴곡과도 대면하면서 가까웠던 이들의 애환과 그들의 상실에서 표현하지 않았던 자신의 비애감을 보나르의 부드러운 색조처럼 온화하게 어루만진다. 그가 다다른 것은 이제 평온한 또 다른 세상이다. 마지막 문장인 "마치 바닷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 같"이 그는 그 세계로 서서히 진입해 들어간다.
사족 하나. 작가 밴빌은 화자 맥스의 입을 빌어 자신의 야심을 슬쩍 내비친다. 즉, 최후의 순간에 이루어질 인생의 은밀한 목표인 진짜 드리마의 전개, 곧 "나는 표현될 것이다. ...(중략)... 한마디로 나는 말해질 것이다."는 언명이 그것이다. 화자 맥스는 이 회고록을 통해 스스로 표현하고 말함으로써 그 목표를 이루었고, 작가 밴빌 역시 이 소설을 통해 표현되고 말해짐으로써 그 목표를 이루었다. 밴빌은 2005년 이 소설로 맨부커상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