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크레모니니
이 섬은 특이하게도 바로 가까이에 있다. 건물 바로 건너편 작은 틈새 바다 위에 떠 있다. 손을 뻗으면 바로 닿을 듯하다. 심지어 창 안에 들어와 있기까지 하다. 섬이 이렇게까지 가까워도 되는 건가. 바로 앞의 것은 섬이 아니라 휘돌아간 곶의 끝이 아닌가 싶다.
섬은 대개 고립과 단절의 상징이다. 망망대해에 홀로 떠 있는 고도(孤島)에 대한 이미지가 워낙 강렬하여, 무리를 지어 군도를 이루고 있어도 또 섬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면적이 크더라도, "섬" 하면 단절되어 외롭다는 생각부터 든다.
이를 은유적으로 적절히 표현한 시가 정현종 시인의 <섬>이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 정현종, <섬> (전문)
우리는 한데 어울려 살고 있지만 익명으로든 호명이 가능한 가까운 사이든 서로에게 일체감보다는 거리감을 느끼며 스스로도 너무 깊숙히 다가오는 것이 두려워 거리감을 유지하려 한다. 현대사회에서 각 개인은 분자적으로 분절되어 있어 어쩌면 단절과 고립은 이미 태생적으로 주어진 조건이 되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동시에 복잡한 인간관계의 번잡스러움을 피해 간혹은 어디 섬에나 가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자발적 단절과 고립에 대한 갈구는 도피적이지만 실현불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오히려 간절히 꿈꾸는 욕망이기도 하다.
고독한 존재로서 갖는 실존의 짐은 결코 타인과 함께 할 수 없는 혼자만의 몫이다. 가족이나 친구라 하더라도 나누기 쉽지 않다. 하물며 필요에 의해 오가는 인연이나 그냥 스쳐 지나가는 사이에서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간극을 가진다. 더욱이 서로 이 점을 이미 인식하고 있다. 그 거리감은 섬과 섬 사이의 거리만큼이나 아스라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단절감을 이기지 못하여 다시 그 사이를 건너 가는 것을 꿈꾼다. 사랑이 되었든 이해가 되었든 아니면 인정을 받고 싶든 그 대상이 되는 상대에게 가 닿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레오나르도 크레모니니(Leonardo Cremonini, 1925-2010)는 이탈리아 볼로냐 태생으로 파리로 건너가 그곳에서 활동하였다. 신구상주의 움직임 속에서 구상회화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으며, 파리미술학교의 교수 및 교장을 역임하였다. 뉴욕이나 피렌체, 안달루시아, 노르망디 등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기거하였고, 시칠리아 북쪽의 작은 섬인 파나레아에서도 한동안 지냈다.
그의 그림 주제는 평범한 일상의 단면이다. 이를테면 실내의 정경이나 아이들이 노는 모습, 해변 휴양지의 풍경 등 아주 단순하다. 하지만 그의 그림에는 인간 내면의 의식이나 무의식에 잠재되어 있는 여러 가지 심리적 상황들을 담고 있다. 그는 그림을 통해 우리의 내면 깊숙히 잠재되어 있는 갈등이나 욕망 같은 심리적 풍경을 들추어내고자 하였다. 대표적인 예가 관음증이다. 그의 그림에는 창이나 거울의 반영을 통해 드러나는 성적 호기심 상황을 훔쳐보는 광경이 종종 등장한다. 여기에서 관람자는 이를 다시 훔쳐보는 간접적 관음 또는 이중적 관음의 경험을 한다.
크레모니니에게 회화란 화가가 단독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관람자와의 관계를 통해 이루어진다. 일상생활의 오브제나 인물을 그린다 하더라도 그것들의 재현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사물과 사물, 인간과 인간, 사물과 인간 간에 맺어지는 관계가 더 중요하다. 어떤 이야기나 일화적 내용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개념을 창조한다. 루이 알튀세르는 이 점을 강조해 그를 오브제와 장소, 시간들이 펼치는 관계를 그리는 화가라고 불렀다.
서로가 서로에게 섬이 되는 단절의 관계에서도 우리는 역설적으로 끊임없이 상대에게 가 닿는 것을 꿈꾼다. 섬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는지 모른다. 크레모니니의 그림에서처럼 의자에서 일어나 창틀 너머로 팔을 뻗으면 닿을 수도 있는 곳에 말이다. 그러자면 먼저 내 안의 섬에서부터 빠져 나올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