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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규 Mar 23. 2019

완벽한 관계


축축해진 땀방울을 맞대던 순간이 지나간 뒤 평온한 시간이 찾아왔다. 남자와 여자는 자주 연락을 교환하지도, 금요일 밤마다 의무적으로 만나는 사이는 아니었다. 오늘 뭐해?라고 묻는 날, 서로가 괜찮다면 만나서 데이트 비슷한걸 했다. 연인이 아니라고 해서 무작정 만나 호텔 방으로 직행하는 건 품위가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낮에 만나 시간을 보내진 않았지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영화를 봤고, 되도록 술은 괜찮은 곳에서 마시려고 했으며, 함께 먹으면 뭐가 맛있을지 알아둔 채 약속을 나가곤 했다. 너랑 놀이공원을 가고 싶다거나 함께 뭘 했으면 좋겠다고 말하진 않았다. 그 금기에 가까운 관계의 정의를 말하는 순간, 살얼음 같은 관계의 긴장이 깨지리란 것을 둘 모두 모르지 않았으니까.


섹스 파트너. 돌려 말해도 프렌드 위드 베네핏 같은 애매하거나 적나라한 이름이 규정할 수 있는 유일한 명칭이었다. 하지만 관계는 명료했다. 연인이 견뎌야 할 구질구질함이 거기엔 없었다. 오늘 별로 안 하고 싶다-는 말을 들어도, 그건 서운해야 할 말이 아니라 서로에 관한 존중의 영역으로 남을 수 있다. 그건 피차 마찬가지였으니 내가 홀로 남겨졌다는 불안감도 없다. 연인과의 섹스는 늘 신경 쓸게 많았다. 이기적이기보단 이타적이어야 하고, 나의 만족보단 상대의 만족을 눈치 보곤 했다. 우리에겐 그런게 없다. 내가 원하는 걸 요구하고 그녀도 원하는 걸 요구한다. 그렇게 그저 충실하게 서로 설정하고 있는 쾌락적 목표에 도달하는데 집중하면 됐으니까. 만나서 가열하게 시간을 보낸 뒤에도 헤어진 뒤 집에 잘 들어갔는지 물어보는 건 배려의 차원이지 의무가 아니었다. 그건 오히려 만족을 선사해야 한다는 연인과의 섹스의 강박보다 높은 고차원적 만족감을 주곤 했다. 누구보다 서로의 근본적인 욕망을 위하는 공범자. 거기엔 어떤 순수한 배려가 있었다.  


서로에게 완벽한 호의를 보여야 한다고 전제된 사이가 아니니, 우리의 대화는 극한의 객관성을 띄곤 했다. 그녀는 딱히 내 마음에 들 만한 단어를 고르지 않는다. 나 역시 그랬다. 역설적으로 그 진솔함이 누구도 제공하지 못한 거울을 눈 앞에 들이민다. 가끔 과거 자신이 저질렀던 잘못을 이야기할 때면 누구도 서로를 원망할 필요가 없었다. 그건 마치 세상에 알려지지 않을, 둘이 공유하는 고해성사와도 같았다. 우리는 서로에게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어, 서로를 꽤 괜찮은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게 좋았다. 사람과 사람이 나눌 수 있는 관계의 궁극이 스스로의 발견과 완벽한 이타심이라면, 우리보다 완벽한 관계는 있을 수 없다.


그래도 관계의 향기란 결코 숨길 수 없는 것이라서, 친구들이 걔랑 무슨 사이야?라고 물을 때면 한참을 고민했다. 그냥 가끔 자는 사이-라고 말하기엔 깊었고, 우리 사귀는 사이-라고 말하기엔 규정된 관계의 규칙이 없어 그냥 얼버무렸다. 섹스는 우리가 ‘섹스만’ 하는 사이인지, ‘섹스도’ 할 수 있는 사이인지 알려주지 않았다. 지난주에 소개팅을 했고, 요즘 신경 쓰이는 남자의 이야기를 하는 네가 짜증 나는 건 왜 일까. 나는 네게서 만족감을 느끼는 것과 같은 이유로, 우리의 관계에 초조함을 느끼고 있었다. 나 갖기는 싫고 남 주기는 싫은 심보 고약한 마음이라기보다, 쌓여가는 우리의 세계에 끼어든 타인에 대한 적대심에 가까웠다. 우리의 대화엔 나와 네가 있었지만, 우리는 없었다, 우리는 한쪽이 연인이 생기면, 남은 사람의 의지와는 없이 끝나는 사이였을 뿐이다. 그건 소유하지 않음으로 서로에게 온전히 곁에 남을 수 있는, 그러나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었던, 어떤 언어로 규정하기 힘든 남녀가 맺을 수 있는 또 다른 형태의 관계였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여자를 만나면 남자는 여러 가지 고민을 잊을 수 있었다. 둘이서 온전히 서로의 욕망의 공범자로 남는 시간에, 그녀는 확실한 위안이 될 수 있었다. 이 관계에 미래가 없다고 하는 결론은 쉬웠다. 하지만 연인은 헤어지고 사랑은 유한하다. 이것이 어쩌면 서로에게 영원히 남을 수 있는 방법인지도 몰랐다. 철저하게 이기적인 행위로 이어진 궁극의 이타적인 관계. 사랑한다는 말은 들을 수 없었고, 너만을 위해 살겠다는 낭만적인 말도 없었다. 다만 어떤 열망도 없이 나는 그저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따뜻했던 그 체온이 혼자 있는 순간에도 잊을 수 없어 나는, 그녀를 사랑할 수도, 사랑하지 않을 도리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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