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사장님
집 아래 스타벅스가 생겼다. 2층짜리 스타벅스. 맞은편엔 3층짜리 스타벅스가 있다. 입학 때부터 있었으니까 3층짜리 저 스타벅스는 못해도 4년은 족히 되었다. 저 오래된 3층짜리 스타벅스 주인은 이 새 2층짜리 스타벅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상도덕에 어긋난다고 성토하면서 친구와 소주를 먹었을지, 조용히 속으로 삭이면서 다른 업종을 알아봤을지 나는 영영 모른다. 어쩌면 이런 추측이 무색하게, 이 두 매장 모두 그 사람 소유일지도 모른다. 얼굴도 모르는 스타벅스 주인이 신경 쓰이는 이유는, 내가 아는 한 자영업자 아저씨 때문이다.
부산역 2층엔 OOO라는 이름의 카페가 있다. 1층에도 있다. 똑같은 매장이다. 기차모형을 컨셉으로 한 매장 2개가 똑같은 건물에 있는 아이러니. 우리 아빠는 2층 매장의 사장님이었다. 업종이 바뀐 지금도, 우리집 아저씨는 여전히 사장님이다.
평범한 월급쟁이였던 아빠는 동네 슈퍼 사장님, 카페 사장님을 거쳐서 지금은 꼬막정식집 사장님이다. 초등학교 5학년, 현빈이 삼순이를 사랑하는 레스토랑 사장님이었던 그 해, 우리 아빠도 사장님이 됐다. 사장님이라는 어감이 주는 어쩐지 근사해 보이는, 어쩐지 있어 보이는 환상은 마법처럼 사라졌다. 치킨집이라는 전형적인 루트 대신에 동네슈퍼를 선택한 은퇴한 공돌이 우리아빤 젊지도, 잘생기지도, MBA를 따지도 않은 그냥 보통 아저씨였다. <포레스트 검프>에 나오는 톰 행크스처럼 짧게 자른, 약간 촌스러운 머리를 한 우리집 아저씨는 그 나이대 아빠 친구들보다 흰머리가 적었다. 엄마는 “느그 아빠는 자기가 스트레스를 주면 줬지, 받는 사람은 아니다.”라고 그 이유를 추정하며 아빠를 고집쟁이라고 말하곤 했다. 생긴 건 엄마를 빼다 박았지만 소프트웨어는 아빠를 고대로 닮은 나는 그럴 때면 멋쩍게 슬몃 웃었다. 20년을 함께 산 부부 사이에 남은 복잡다단한 감정을 헤아리는 것은 날이 갈수록 어려우니 끼지 않는 게 낫다.
나는 흰머리가 적은 우리집 사장님이 좋았다. 대체로 동생은 엄마 편, 난 아빠 편이었다. 퇴직금을 주식으로 날려먹은 걸 알기 전까진 ‘적극적인’ 아빠 편이었으나, 그 이후론 그냥 적당히 구색만 맞춘다. 사실 동생도 대학 때문에 대전에서 자취를 시작한 이후엔 넷이 모여 투닥거릴 일도 잘 없다. 강아지를 데리고 오면 어떻겠느냐는 흑심 가득한 내 제안엔 엄마아빠 둘 다 콧방귀만 흥, 흥, 흥, 거린다. 이럴 때만 둘이 합이 잘 맞는다. 엄마아빠 둘만 남은 이후로 어쩐지 흰머리랑 주름이 좀 더 빨리 느는 기분이다. 나는 스물 이후 서울 생활하며 난 머리색과 머리길이 빼면 그닥 달라진 게 없는데―이건 이것대로 문제인 거 같다. 스물셋이 되도 아이라인 그리는 게 어려울 줄이야.
아빠는 아들이 있었으면 등산도 같이 가고, 당구도 같이 치고, 바둑도 같이 두고 싶었다고 했다. 나는 대신 아빠랑 탁구를 가끔 치고, 루미큐브를 종종 하고, 이따금 영화를 보러간다. 아빠를 이겨보겠다고 탁구 강습까지 다녀봤지만 매번 져서 분하다. 루미큐브를 할 때면, 아무리 피가 물보다 진하다지만, 승부의 세계는 냉엄한 법이고, 승자는 아주 얄짤 없이 패자를 조롱하고 비웃는다. 영화를 볼 땐 대체로 차가 여러 대 폭발하거나 날아다니는 할리우드 액션 영화를 보는데, 아빠와 나는 캡틴 아메리카보다 아이언맨이 멋있다는 것에 동의했다.
색소폰을 배우기 시작한 아빠는 자꾸 피아노 반주를 쳐달라고 한다. 그렇지만 나는 뽕짝이라는 장르를 벗어나지 않는 한, 우리 사이 타협은 없다고 선을 그었다. 엄마 몰래 조성한 비자금으로 이백만원 짜리 악기를 마련한 아빠는 그러면 이승철 노래 반주를 해달라고 제안했다. 그렇지만 꼬막집으로 업종을 바꾼 5년차 커피집 사장님은 너무 공사가 다망해서 우리의 협연은 멀고 먼 일인 거 같다.
우리집 사장님은 내게 많은 걸 물려줬다. 나는 아빠를 닮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술을 좋아하게 되어버렸고, 밤새 술을 마시는 것 역시 좋아하게 되었고, 친구들과 내 방에서 술판 벌이는 것 역시 좋아하게 되어버렸다. 강조하지만, 어쩔 수 없는, 불가피한, 그런 대물림이다. 그러나 먹어도, 먹어도, 찌지 않는 체질은 내가 아닌 동생이 물려받았다. 역시 인생은 공평하지 않다.
많고 많은 것 중 아빠가 내게 물려준 가장 큰 가르침은 여덟 살 겨울 스키장에서였다. 1시간짜리 스키 강습을 받은 직후, 아빠는 나를 데리고 중급 리프트를 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스키신발을 신은 지 3시간, 스키장에 발을 디딘 지 3시간 20분이 되던 때, 나는 중급자 코스에서 열다섯 번 쯤 넘어지고 있었다. 딸에게 “인생은 실전이다.”라는 마음가짐을 몸으로 익히게 한 우리아빠는 지금도 그 해 겨울을 자랑스러워한다. 두 해 전에 아빠는 쉰이 된 기념으로 스노보드에 도전했다. 아빠가 강습을 마치자마자 나는 아빠를 중급자 코스로 안내했다. 13년 전 배운 교훈을 딸이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아빠에게 보여줄 수 있었기에 나 역시 두 해 전 겨울이 자랑스럽다.
우리 아빤 오바마처럼 수트빨이 잘 받지도 않는 전형적인 한국인 아저씨라서 나는 8년새 늘어난 오바마 흰머리보다는 우리집 사장님 흰머리가 더 신경 쓰인다. 흰머리가 있어도 오바마는 수트빨이 잘 받겠지만 우리 아빠는 아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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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벅스는 직영이라네요. 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