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제자: 카이.
검은 종이 위의 글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회랑의 수정등이 하나씩 다시 켜졌지만, 그 문장만은 어둠을 먹은 듯 더 또렷해졌다. 엘레나는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손바닥에 남은 금색 잉크가 뜨겁게 뛰었다.
마지막 열쇠.
예언의 마지막 줄.
삭제자.
단어들이 서로 맞물리며 엘레나의 머릿속을 긁었다.
"카이."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요라가 먼저 움직였다. 그녀는 종이를 집으려 했지만, 종이는 손끝이 닿기 전에 스스로 접혔다. 검은 새처럼 팔랑이더니 엘레나의 손바닥 위에 내려앉았다.
종이는 그녀에게만 닿았다.
카이가 낮게 말했다.
"버려."
"왜요?"
"그건 금서가 뱉은 거야. 사실처럼 보여도, 네가 가장 흔들릴 말을 고른 걸 수도 있어."
"그러니까 당신이 삭제한 게 아니라고요?"
카이는 입술을 다물었다.
엘레나는 웃었다. 짧고 날카로운 웃음이었다.
"거짓말을 하라는 게 아니에요. 대답을 하라는 거예요."
"엘레나."
"삭제했어요?"
회랑은 조용했다.
카이의 왼손이 장갑 안에서 굳었다. 이요라는 그 손을 보았다가 시선을 거두었다. 그 짧은 움직임만으로도 엘레나는 두 사람이 같은 비밀의 주변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았다.
"했어."
그 말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그래서 더 세게 박혔다.
엘레나는 한 걸음 물러섰다.
"왜요?"
"네가 읽으면 안 되는 문장이었으니까."
"그건 내가 결정할 일이라고 했잖아요."
"그 문장은 읽는 순간 선택지가 사라져."
"내 선택지가요, 아니면 당신 선택지가요?"
카이의 눈빛이 흔들렸다.
엘레나는 그 흔들림을 놓치지 않았다.
"당신은 나를 처음 본 사람처럼 굴지 않아요. 내 이름도 알고 있었고, 아카데미 규정도 너무 잘 알았고, 내가 위험해질 때마다 이미 겪어본 사람처럼 움직여요."
그녀는 손바닥의 종이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이제 예언까지 지웠어요."
이요라가 조용히 끼어들었다.
"지금은 복도에서 나눌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면 어디서 해야 하죠? 금서실? 지하 시험장? 아니면 제가 또 뭔가에 읽히고 나서요?"
엘레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저 멀리 기숙사 쪽 문이 열렸다가 다시 닫혔다. 누군가 소리를 들은 것이다. 이요라는 회랑의 수정등을 손짓으로 낮췄다.
"내 방으로 가자."
"도망치는 거 아니죠?"
이요라는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는 설명하마."
이번에는.
그 말 하나가 엘레나를 따라왔다.
이요라의 집무실은 아카데미 서쪽 첨탑 중턱에 있었다. 창밖으로는 밤의 구름이 느리게 흘렀고, 멀리 스톰엔드 방향의 산맥이 검은 선처럼 보였다. 방 안에는 책보다 봉인구가 많았다. 유리병에 담긴 바람, 은사슬로 묶인 돌조각, 반쯤 탄 깃털.
엘레나는 책상 앞에 섰다.
앉으라는 말은 들었지만 앉지 않았다.
카이는 문 옆에 섰다. 도망갈 자리를 남겨둔 사람처럼.
이요라는 서랍에서 낡은 두루마리 하나를 꺼냈다. 봉인은 이미 뜯겨 있었다. 오래전에, 누군가 급히 열어본 흔적이었다.
"이것이 아카데미에 남아 있는 폭풍 예언의 공식 사본이다."
두루마리가 책상 위에 펼쳐졌다.
글자는 오래된 언어로 쓰여 있었지만, 엘레나가 바라보자 문장들이 조금씩 현대어로 바뀌었다. 두루마리도 그녀를 알고 있는 듯했다.
바람이 멈춘 마을에서 마지막 윈드콜러가 깨어난다.
그 아이는 폭풍의 심장을 듣고, 닫힌 문 앞에 선다.
세상이 균열로 찢길 때, 열쇠는 선택을 요구받는다.
엘레나는 다음 줄을 기다렸다.
없었다.
두루마리 끝은 찢겨 있었다.
정확히 한 줄만.
"여기."
엘레나는 찢긴 자리를 가리켰다.
"여기를 당신이 지운 거죠?"
카이는 아무 말 없이 두루마리를 보았다.
찢긴 두루마리를 덮는 카이의 손이 대답이었다.
"왜요?"
이번에는 이요라가 대답했다.
"그 마지막 줄은 예언이 아니라 발동문이었다."
"발동문?"
"읽는 순간 특정 봉인이 깨어나는 문장. 예언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명령어에 가깝다."
엘레나는 손바닥을 폈다. 검은 종이가 아직 있었다.
"그럼 금서가 말한 마지막 줄은..."
"위험하다."
"그건 설명이 아니라 장치야."
"당신이 어떻게 알아요?"
카이는 눈을 감았다.
"전에 읽었으니까."
방 안의 바람이 멈췄다.
엘레나는 그의 말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전에?"
카이는 이요라를 보았다. 이요라는 고개를 아주 작게 저었다. 말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카이는 그 신호를 무시했다.
"나는 그 문장을 읽은 적이 있어. 그리고 그날 아카데미의 절반이 사라졌어."
엘레나는 숨을 들이쉬었다.
"언제요?"
"네가 알 필요는..."
"그 말 하지 마요."
카이는 입을 다물었다.
엘레나는 그를 똑바로 보았다.
"제발."
그 말이 나오자 카이의 표정이 무너졌다. 아주 조금. 하지만 엘레나는 보았다. 그가 숨기고 있던 것은 정보만이 아니었다. 죄책감이었다.
"정확한 날짜는 말할 수 없어."
"왜요?"
"네가 아직 그 날짜에 도착하지 않았으니까."
이요라가 낮게 말했다.
"카이."
"어차피 금서가 시작했어요."
카이는 장갑 낀 왼손을 움켜쥐었다.
"계속 숨기면 더 빨리 망가집니다."
엘레나는 그 말에서 걸리는 점을 들었다.
망가진다.
미래형이 아니라, 반복을 겪은 사람의 말투였다.
이요라는 오래 두루마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찢긴 부분을 손끝으로 눌렀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다. 마지막 줄은 봉인을 깨운다. 네가 읽으면 안 된다."
"하지만 이미 금서가 제 손에 일부를 남겼어요."
엘레나는 검은 종이를 펼쳤다.
종이는 아무 글자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손바닥의 금색 잉크와 닿자, 숨겨진 문장이 천천히 떠올랐다.
그 아이가 문을 열면...
문장은 거기서 멈췄다.
카이가 재빨리 종이를 빼앗았다.
"그만."
"뒤가 뭐예요?"
"몰라."
"거짓말."
"몰라야 해."
카이는 종이를 찢었다.
검은 조각들이 허공에 흩어졌다.
그중 하나가 엘레나의 발치에 떨어졌다. 아주 작은 조각이었다. 카이도, 이요라도 보지 못했다.
엘레나는 발끝으로 그것을 밟았다.
조각 위에는 두 단어만 남아 있었다.
세계는 멈춘다.
피가 차갑게 식었다.
그 아이가 문을 열면 세계는 멈춘다.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카이는 종이를 모두 찢었다고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이요라는 두루마리를 다시 말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엘레나가 마지막 단어를 보았다는 사실을 몰랐다.
엘레나는 발끝을 움직이지 않았다.
처음으로 그녀도 숨겼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건데요?"
목소리가 낯설게 차분했다.
이요라는 잠시 엘레나를 바라보다가 책상 위에 작은 지도를 펼쳤다. 지도에는 알레리아 서쪽 바다가 그려져 있었다. 일반 지도라면 빈 바다로 남아 있어야 할 곳에, 흐릿한 섬 하나가 은색 잉크로 떠올랐다.
"잊혀진 섬."
"아카데미 지하 봉인의 근원이 그곳과 연결되어 있다. 어제 네가 들은 푸른 바람도, 오늘 금서가 반응한 이유도 그곳에 답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섬에 가라는 거예요?"
"가야 한다."
"저를 위험해서 가두는 곳인 줄 알았는데, 이제는 데려가네요."
"아카데미 안도 안전하지 않다."
그 말에 카이가 창밖을 보았다.
엘레나도 따라 보았다.
서쪽 외벽 아래, 어둠 속에 검은 문양이 떠 있었다. 원 안에 닫힌 눈, 그리고 그 눈을 관통하는 가느다란 실. 스톰엔드에서 보았던 검은 실과 같았다.
그림자 교단.
문양은 벽 위에서 번지듯 커졌다. 곧 누군가 그것을 지우려는 듯 경비 마법이 번쩍였지만, 검은 흔적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들이 여기까지 들어왔어요?"
"아직은 표식뿐이다."
"하지만 오래 걸리지 않을 거다."
카이는 지도를 접었다.
"새벽 항구로 나가야 합니다. 공식 절차를 밟으면 교단도 알아챌 거예요."
"이미 알아챈 것 같은데요."
엘레나는 창밖의 문양을 보며 말했다.
카이는 반박하지 못했다.
이요라는 작은 금속 원반을 엘레나에게 건넸다. 나침반처럼 생겼지만 바늘이 없었다. 대신 중앙에 투명한 홈이 파여 있었다.
"섬 근처의 안개를 통과하려면 바람의 결을 읽어야 한다. 네가 필요하다."
"제가 문을 열면 세계가 멈춘다면서요."
이요라의 손이 멈췄다.
카이의 시선이 날카롭게 돌아왔다.
엘레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뭘 그렇게 놀라요? 끝까지 숨길 수 있을 줄 알았어요?"
카이가 낮게 말했다.
"봤구나."
"네."
엘레나는 금속 원반을 받아 들었다.
"그러니까 더 가야겠어요. 내가 뭘 열 수 있는지, 누가 나를 열쇠라고 부르는지, 당신들이 왜 계속 나를 반쯤만 살려두려 하는지 알아야겠으니까."
이요라가 눈을 감았다.
"엘레나, 조심해야 한다. 진실은 언제나 사람을 자유롭게 하지는 않는다."
"거짓말은 확실히 사람을 가둬요."
그 말에 이요라는 더 이상 붙잡지 않았다.
집무실을 나서기 전, 엘레나는 창밖을 한 번 더 보았다. 그림자 교단의 문양은 거의 지워졌지만, 외벽에 가느다란 검은 선 하나가 남아 있었다.
그 선이 움직였다.
누군가 손가락으로 새 문장을 쓰는 듯했다.
엘레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검은 선은 천천히 글자가 되었다.
열쇠가 바다로 간다.
그리고 그 아래, 더 작은 글자.
폭풍의 심장을 깨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