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는 움직이지 않았다.
돛은 부풀어 있었다. 밧줄도 팽팽했다. 선원들은 노를 저었고, 파도는 분명히 배 옆구리를 밀고 있었다. 그런데 배는 같은 자리에 묶인 듯 안개 속에서 한 치도 나아가지 못했다.
엘레나는 난간을 붙잡고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물결이 이상했다. 파도는 앞으로 흐르는데, 거품은 뒤로 밀렸다. 바다가 두 방향으로 동시에 숨 쉬는 것처럼 보였다.
"잊혀진 섬의 외곽이다."
그녀의 로브 끝은 바닷물에 젖어 무거워져 있었다. 새벽 항구를 빠져나올 때부터 쉬지 않고 방어 주문을 유지한 탓인지, 얼굴은 창백했다.
"여기서부터는 지도가 소용없다."
카이가 선장에게서 받은 해도를 접었다. 해도 위의 섬 그림은 조금 전까지 서쪽에 있었는데, 지금은 종이 가장자리에서 희미하게 사라지고 있었다.
엘레나는 이요라가 준 금속 원반을 꺼냈다.
바늘 없는 나침반.
중앙의 투명한 홈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손바닥의 검푸른 문양을 가까이 대자, 홈 안쪽에 희미한 바람의 결이 떠올랐다. 아주 얇은 흰 선이었다.
"이걸 따라가면 돼요?"
"듣고 판단해야 한다."
이요라가 대답했다.
"그 원반은 길을 보여주지 않는다. 네가 들은 길을 잊지 않게 붙잡아줄 뿐이다."
"편리한 물건은 아니네요."
"편리한 힘은 대가가 더 크단다."
엘레나는 그 말이 마음에 걸렸다.
대가.
금서실에서 책은 기억을 읽는다고 했다. 지하 시험장의 푸른 바람은 그녀의 기억을 뒤졌다. 바람 마법이란 정말 도움을 청하면 답해주는 친구 같은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모든 힘은 무언가를 가져갔다.
"엘레나."
카이가 낮게 불렀다.
"무리하지 마. 안개가 반응하면 바로 멈춰."
"당신은 제가 뭘 하면 무리인지도 알아요?"
"대충은."
"그 말 싫다고 했죠."
카이는 입을 다물었다.
엘레나는 다시 바다를 보았다.
안개는 벽처럼 서 있었다. 배 앞쪽 몇 걸음 너머도 보이지 않았다. 그 안쪽에서 바람은 들리지 않았다. 대신 아주 먼 곳에서 누군가 물속에 잠긴 종을 두드리는 듯한 울림이 있었다.
둥.
둥.
둥.
엘레나는 눈을 감았다.
바람을 부르지 않는다.
듣는다.
흐름을 찾는다.
처음 들린 것은 바다의 숨이었다. 파도가 바위에 부딪치지 못하고 되돌아오는 소리. 선원들의 목구멍에 걸린 공포. 이요라의 주문이 가늘게 갈라지는 소리. 카이가 왼손을 감싸쥐며 억누르는 금빛의 떨림.
그 다음에야 안개 속의 바람이 들렸다.
이리 와.
엘레나는 손을 뻗었다.
원반의 홈 안에 흰 선이 하나 더 생겼다. 선은 곧 나선이 되었고, 나선은 작은 길처럼 안개 쪽으로 뻗었다.
"왼쪽으로 조금."
선장이 망설였다.
"아가씨, 왼쪽은 암초 구역입니다."
"안개가 오른쪽을 막고 있어요."
"보이지도 않는데 어떻게 압니까?"
엘레나는 대답 대신 눈을 감은 채 손끝을 움직였다.
"오른쪽 물 아래에 부서진 돛대가 있어요. 그리고... 쇠사슬. 아주 오래된 쇠사슬이 바닥에 걸려 있어요."
선장의 얼굴이 변했다.
"그건 항구 기록에도 없는 난파선인데."
카이가 선장을 보았다.
"왼쪽으로."
선장은 이를 악물고 명령을 내렸다.
배가 조금씩 움직였다.
처음에는 정말 조금이었다. 바닥에 붙은 듯 꿈쩍 않던 선체가 안개의 결을 따라 미끄러졌다. 선원들이 숨을 죽였다. 돛은 바람을 받은 것이 아니라, 안개가 배를 밀어주는 것처럼 흔들렸다.
엘레나는 원반을 붙잡았다.
흰 선은 점점 밝아졌다.
그만큼 손바닥의 문양도 뜨거워졌다.
그녀의 머릿속에 마라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영웅 되지 마.
살아서 돌아와.
엘레나는 그 기억을 붙잡았다. 그러자 안개의 바람이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 기억을 줄래?
엘레나의 손이 굳었다.
마라의 목소리가 희미해졌다.
영웅 되지...
살아서...
뒤가 흐려졌다.
"안 돼."
엘레나는 눈을 떴다.
원반의 흰 선이 검게 물들고 있었다.
카이가 곧장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멈춰."
"놓아요. 길이 사라져요."
"기억을 먹고 있어."
엘레나는 그를 보았다.
"당신도 들었어요?"
"네 표정을 봤어."
카이의 목소리가 거칠었다.
"처음엔 다들 길을 찾는다고 생각해. 하지만 이 안개는 길값을 요구해."
"왜 말 안 했어요?"
"말하면 네가 겁낼 줄 알았어."
"겁나는 게 나아요. 모르는 것보다."
카이는 대답하지 못했다.
마라의 목소리가 더 희미해졌다.
엘레나는 이를 악물고 원반을 가슴 쪽으로 끌어당겼다. 안개가 그녀의 기억을 잡아당기는 감각이 선명했다. 마라가 웃으며 꽃관을 비뚤게 쓰던 모습. 소매를 잡던 손. "살아서 돌아와"라고 말하던 입술.
가져가지 마.
엘레나는 처음으로 바람에게 명령이 아니라 거래를 걸었다.
내 기억 말고, 내 피를 줄게.
손바닥 문양이 갈라졌다.
피 한 방울이 원반의 홈에 떨어졌다. 흰 선이 다시 빛났다. 안개가 낮게 울었다. 만족과 분노가 뒤섞인 소리였다.
배가 앞으로 미끄러졌다.
안개 벽이 갈라졌다.
섬이 나타났다.
잊혀진 섬은 바다 위에 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다가 잊고 싶은 것을 억지로 떠받치고 있는 것 같았다. 검은 절벽이 하늘을 향해 솟아 있었고, 절벽 위의 나무들은 바람이 없는 곳에서도 한 방향으로 휘어 있었다.
섬 중앙에는 무너진 제단이 보였다.
스톰엔드의 제단과 닮아 있었다.
너무 닮아 있어서 엘레나는 숨을 멈췄다.
"저기..."
이요라가 고개를 숙였다.
"원형 제단이다. 스톰엔드는 그 복제품에 가깝지."
"왜 그런 걸 이제 말해요?"
"확신이 없었다."
"거짓말은 확실히 사람을 가둔다고 했죠."
이요라는 눈을 감았다.
카이가 조용히 말했다.
"상륙 준비."
작은 보트가 내려졌다. 엘레나와 카이, 이요라, 그리고 선원 둘이 보트에 올랐다. 배는 안개 밖에 머물기로 했다. 섬 가까이 갈수록 일반 사람들은 방향 감각을 잃는다고 했다.
해변의 모래는 검은색이었다.
엘레나가 첫발을 디디자, 모래가 발자국을 삼켰다. 찍힌 흔적이 사라지는 데 한 호흡도 걸리지 않았다.
"이 섬은 방문자를 기록하지 않는다."
"그래서 잊혀진 섬인가요?"
"그래서 아무도 돌아온 일을 증명하지 못한다."
숲은 해변 바로 뒤에서 시작됐다. 나무껍질은 회색이었고, 잎은 유리처럼 투명했다. 바람이 불지 않는데도 잎끼리 부딪쳐 맑은 소리를 냈다.
그 소리 사이로 목소리가 섞였다.
또 왔구나.
엘레나는 멈췄다.
"들었어요?"
이요라는 고개를 들었다. 카이는 손을 왼쪽 허리의 검 쪽으로 옮겼다.
숲 안쪽에서 작은 빛이 떠올랐다.
정령이었다.
엘레나가 상상했던 은빛 날개나 아름다운 눈동자는 없었다. 그것은 깨진 유리 조각들이 모여 만든 작은 새 같았다. 빛은 날개를 펼칠 때마다 흩어졌다가 다시 모였다.
정령은 엘레나가 아니라 카이를 보았다.
또 온 사람.
카이의 장갑 낀 손이 태양석 조각 쪽으로 움직이다 멈췄다.
정령은 고개를 갸웃했다. 유리 조각 같은 눈이 푸르게 반짝였다.
이번에는 울지 않는구나.
이요라의 손끝이 결계 지팡이를 더 세게 쥐었다.
엘레나는 카이를 보았다.
"무슨 뜻이에요?"
카이는 정령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모르겠어."
정령이 웃었다.
거짓말.
그 한마디가 숲 전체에 울렸다.
카이의 왼손 장갑 아래에서 금빛이 새어 나왔다. 정령은 그 빛을 보고 날개를 접었다.
태양의 조각.
"태양석?"
엘레나는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정령은 이번에야 그녀를 보았다.
열쇠도 왔구나.
엘레나의 손바닥 문양이 뜨거워졌다.
"난 열쇠가 아니야."
정령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숲 안쪽으로 날아갔다. 날개에서 떨어진 빛 조각들이 길처럼 바닥에 남았다.
"따라가야 한다."
"또 설명 없이요?"
"저 정령은 섬의 기억을 지키는 존재다. 우리가 찾는 답이 있다면 저쪽이야."
엘레나는 카이를 보았다.
"당신은요? 따라가도 괜찮아요?"
카이는 짧게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 숨에 가까웠다.
"내가 괜찮은지 묻는 사람은 오랜만이네."
"대답은요?"
"괜찮지 않아."
그는 숲 안쪽을 보았다.
"그래도 가야 해."
그들은 정령이 남긴 빛을 따라 걸었다.
숲 안쪽으로 갈수록 공기는 차가워졌다. 잎 부딪히는 소리는 점점 말소리처럼 변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였지만, 엘레나는 그 뜻을 조금씩 느낄 수 있었다.
기억.
봉인.
반복.
죽음.
폐제단은 숲 중심에 있었다.
스톰엔드의 제단과 같은 나선 구조였지만 훨씬 오래되고, 훨씬 깊게 갈라져 있었다. 제단 중앙에는 작은 홈이 있었다. 엘레나가 들고 온 원반의 홈과 같은 모양이었다.
정령이 제단 위에 내려앉았다.
피를 주었으니, 길값은 치렀다.
엘레나는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상처는 작았지만 아직 피가 맺혀 있었다.
그때 제단 홈 안쪽에서 금빛이 번졌다.
카이가 한 걸음 물러섰다.
"안 돼."
그 반응이 너무 빨랐다.
엘레나는 그를 보았다.
"뭔지 알아요?"
제단의 금빛이 위로 떠올랐다.
손톱보다 작은 돌 조각이었다. 투명한 황금빛. 햇빛을 굳혀 만든 파편처럼 보였다. 그것은 엘레나의 손바닥 위로 천천히 내려왔다.
닿는 순간, 마라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영웅 되지 마.
살아서 돌아와.
엘레나는 숨을 내쉬었다. 잃어버릴 뻔한 기억이 제자리로 돌아온 것 같았다.
정령이 카이를 보았다.
태양의 조각은 기억을 붙잡는다. 그래서 너는 아직도 기억하지.
카이는 말하지 않았다.
정령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이번에는 그 아이를 죽이지 않을 거야?
숲이 조용해졌다.
이요라가 정령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만."
하지만 이미 늦었다.
엘레나는 카이를 보고 있었다.
카이는 처음으로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못했다.
"카이."
엘레나의 손 안에서 태양석 조각이 뜨겁게 뛰었다.
"나를 죽인 적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