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레나의 집 앞 골목은 축제 다음 날답지 않게 조용했다.
원래라면 아이들이 남은 꽃잎을 주워 머리에 뿌리고, 어른들은 밤새 마신 벌꿀주를 탓하며 웃어야 했다. 바람 축제 다음 날의 스톰엔드는 늘 조금 지저분하고, 조금 느긋하고, 조금 행복했다.
오늘은 문들이 닫혀 있었다.
창문 틈으로 시선만 새어 나왔다. 엘레나가 지나가면, 커튼이 급히 흔들렸다. 누군가는 기도문을 중얼거렸고, 누군가는 문고리에 걸어둔 작은 풍경을 떼어냈다.
바람을 부르는 풍경.
스톰엔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달아두는 물건이었다.
엘레나는 그것이 땅에 내려놓인 모습을 처음 보았다.
"보지 마."
마라가 엘레나의 손목을 잡았다.
그녀는 평소보다 조용했다. 어제 광장에서 소리치던 사람들, 울던 아이들, 부서진 제단 앞에 서 있던 이요라의 얼굴이 둘 사이에 남아 있었다.
"사람들이 놀라서 그래. 며칠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정말 그렇게 생각해?"
마라는 대답하지 못했다.
할머니가 약그릇을 내려놓지 않는 손이 대답이었다.
엘레나는 고개를 숙였다. 발목 안쪽이 가려웠다. 봉인의 표식은 밤새 옅어지지 않았다. 검은 실처럼 얇은 선이 피부 아래에 박혀 있었다. 손으로 문지르면 잠깐 사라지는 듯하다가, 다시 떠올랐다.
문이 열린다.
바람은 그 말을 반복했다.
엘레나는 귀를 막고 싶었다. 하지만 바람은 귀로 듣는 소리가 아니었다. 살갗과 뼈, 숨의 틈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할머니가 기다리셔."
"그리고 그 아카데미 사람도."
"이요라 마스터."
"그래. 그분."
마라의 목소리 끝이 딱딱했다.
"난 아직 그 사람을 믿어야 하는지 모르겠어."
엘레나는 대문 앞에서 멈췄다.
"나도 그래."
마라는 그제야 엘레나를 보았다. 아주 잠깐, 어제의 굳은 기색이 아니라 익숙한 장난기가 눈가에 스쳤다.
"좋아. 그럼 적어도 바보처럼 다 믿고 따라가진 않겠네."
"그럴 생각 없어."
"네가 그렇게 말하면 더 걱정돼. 넌 걱정할수록 얌전해지잖아."
엘레나는 웃으려 했지만, 입꼬리가 잘 움직이지 않았다.
집 안에서는 약초 냄새가 났다.
할머니는 식탁에 낡은 천보따리를 펼쳐놓고 있었다. 바늘, 말린 사과, 두꺼운 양말, 오래된 나침반, 작은 칼. 여행 준비라기보다 오래 묻어둔 기억을 꺼내놓은 것 같았다.
이요라는 창가에 서 있었다. 남색 로브는 어제보다 단정했고, 손등의 바람개비 문장은 가죽 장갑 아래 감춰져 있었다.
엘레나가 들어서자 할머니의 손이 멈췄다.
"왔구나."
그 한마디에 엘레나는 버티던 숨이 무너졌다.
"할머니."
그녀가 다가가자 할머니는 엘레나를 안았다. 작고 마른 품이었다. 그런데도 엘레나는 그 품 안에서야 겨우 몸이 떨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가 뭘 한 거예요?"
할머니는 엘레나의 등을 천천히 쓸었다.
"네가 한 일만은 아니란다."
엘레나는 할머니의 품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할머니는 대답 대신 엘레나를 식탁 앞에 앉혔다. 마라는 문가에 기대섰고, 이요라는 조용히 시선을 내렸다.
"우리 집안에는 오래된 이름이 있었어."
할머니가 말했다.
"윈드콜러."
그 이름이 방 안에 내려앉자, 창문 틈의 바람이 가늘게 떨렸다.
"바람을 부르는 사람들이라고만 들었어요."
"부르는 게 아니야. 듣는 거지."
할머니는 엘레나의 손끝을 잡았다. 어제 베인 자리에 새 살이 올라오고 있었지만, 붉은 선은 아직 남아 있었다.
"바람은 세상이 잊지 못한 기억을 품고 다닌다. 기쁨도, 원망도, 약속도, 배신도. 윈드콜러는 그 소리를 듣는 사람들이다."
"그럼 어제 제가 들은 목소리도..."
"아마도."
"왜 지금이에요? 전 여태 그런 적 없었어요."
할머니의 눈가가 깊게 접혔다.
"없었던 게 아니라, 우리가 막고 있었던 거다."
엘레나는 손을 빼냈다.
"막아요?"
할머니가 천보따리 안쪽에서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병 안에는 투명한 가루가 들어 있었다. 빛을 받자 은색으로 반짝였다.
"잠재우는 약이야. 네가 어릴 때부터 조금씩 차에 타 주었다."
마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라고요?"
엘레나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할머니는 도망치지 않았다. 죄를 기다리던 사람처럼 엘레나의 시선을 그대로 받았다.
"네 힘이 깨어나면 아카데미가 널 찾아올 줄 알았다. 왕국도, 교단도, 더 오래된 것들도."
"그래서 저한테 말도 안 하고..."
"그래."
할머니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네가 평범하게 살 수 있기를 바랐다."
평범하게.
그 말이 엘레나의 가슴을 찔렀다. 어제까지만 해도 간절했던 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 멀었다. 누군가 문을 닫아버린 방처럼.
엘레나는 이요라를 보았다.
"마스터도 알고 있었어요?"
이요라는 대답을 늦게 했다.
"네 존재는 알고 있었다."
"제게 약을 먹인 것도요?"
"그건 네 가족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막지 않았죠."
이요라의 눈꺼풀이 느리게 내려갔다가 올라왔다.
"그래."
마라가 낮게 욕을 삼켰다.
"다들 엘레나를 지킨다고 하면서 엘레나한테만 말 안 한 거네요."
아무도 반박하지 못했다.
엘레나는 웃고 싶어졌다. 이상하게도 눈물보다 웃음이 먼저 올라왔다. 자신이 위험하다고 했다. 선택받았다고 했다. 그런데 정작 자신에 대해 가장 적게 아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었다.
창밖에서 풍경 하나가 울렸다.
떼어냈던 풍경이었다.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는데, 그것이 혼자 흔들리고 있었다.
이요라가 창밖을 보았다.
"시간이 없다."
마라가 날카롭게 물었다.
"또 설명 없이 데려가려고요?"
"설명은 하겠다. 하지만 여기서는 안 된다."
이요라가 창문으로 다가갔다. 골목 끝에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서 있었다. 얼굴은 두건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그는 엘레나의 집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손목에는 검은 실이 감겨 있었다.
엘레나의 발목 표식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저 사람도 아카데미 사람인가요?"
"아니다."
이요라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림자 교단이다."
두건 쓴 사람이 손을 들었다. 골목의 풍경들이 일제히 울렸다. 맑은 소리가 아니라 금이 간 쇳소리였다. 집 안의 촛불이 검게 눌렸다가 다시 살아났다.
할머니가 보따리를 엘레나에게 밀었다.
"가야 한다."
"지금요?"
"지금."
엘레나는 보따리를 보았다. 양말, 나침반, 작은 칼. 할머니는 오래전부터 이 순간을 준비해온 사람처럼 모든 것을 제자리에 놓아두었다.
그게 더 아팠다.
"전 아직 화났어요."
"알고 있다."
"할머니가 절 속였다는 것도 잊지 않을 거예요."
"잊지 마라."
할머니는 엘레나의 양손을 잡았다.
"다만 살아서 나를 원망하러 오너라."
엘레나는 더는 버틸 수 없었다. 할머니를 끌어안자, 할머니의 손이 그녀의 머리를 오래 눌렀다.
마라는 문 앞에 서 있었다. 눈가가 붉었지만 울지는 않았다. 그녀는 울음을 참을 때 꼭 입술을 한쪽으로 깨물었다.
"너 혼자 보내기 싫어."
"마라."
"알아. 나 가면 짐 되겠지. 바람도 못 듣고, 칼도 못 쓰고, 대단한 예언도 없으니까."
"그런 뜻 아니야."
"알아. 그래서 더 짜증 나."
마라는 엘레나의 소매를 세게 잡았다. 늘 그랬듯이.
"영웅 되지 마."
엘레나는 눈을 깜빡였다.
"뭐?"
"사람들이 너한테 뭐라고 하든, 영웅 같은 거 되려고 하지 말라고. 그냥 살아. 무서우면 도망치고, 화나면 화내고, 모르면 모른다고 해."
마라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리고 돌아와. 내가 너한테 화낼 수 있게."
엘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올게."
"맹세해."
"맹세해."
마라는 엘레나를 꽉 안았다. 짧고 거칠었다. 놓치면 다시는 잡지 못할 것을 붙잡는 품이었다.
이요라가 뒷문을 열었다.
"엘레나."
밖에서는 검은 풍경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골목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나 집 벽을 타고 올랐다.
엘레나는 보따리를 어깨에 멨다. 손끝은 여전히 떨렸지만, 이번에는 숨지 않았다.
뒷문 너머에는 스톰엔드 북쪽 숲길이 이어져 있었다. 축제 깃발이 걸린 광장과 반대 방향이었다. 그녀가 알던 모든 길에서 멀어지는 길.
엘레나는 마지막으로 집 안을 돌아보았다.
할머니의 식탁.
마라의 꽃관.
창문에 매달린 풍경.
그것들이 모두 너무 작고 선명해서, 엘레나는 이 순간을 잃어버리면 자신도 어딘가 비어버릴 것 같았다.
"가자."
이요라가 앞장섰고, 엘레나는 뒤따랐다. 숲으로 들어서자 축제의 남은 냄새가 사라지고 젖은 흙냄새가 올라왔다.
한참을 걷자, 숲길 끝에 누군가 서 있었다.
소년인지 청년인지 애매한 나이의 남자였다. 검은 여행복 차림에 낡은 검을 허리에 찼고, 왼손에는 장갑을 끼고 있었다. 달빛 아래 그의 눈은 유난히 지쳐 보였다.
이요라가 멈췄다.
"카이."
그가 고개를 숙였다.
"마스터."
엘레나는 카이를 경계하며 바라보았다.
"누구죠?"
"아카데미까지 동행할 사람이다."
"왜요?"
카이가 엘레나를 보았다.
처음 보는 눈이 아니었다. 설명하기 어렵지만, 그는 그녀를 너무 오래 알고 있는 사람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반가움도 아니고, 놀라움도 아니었다. 아주 깊은 안도와 그보다 깊은 피로.
"길이 위험하니까."
짧은 대답이었다.
엘레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제 이름은 어떻게 알죠?"
카이의 표정이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왼손이 아주 잠깐 떨렸다.
"이요라 마스터에게 들었다."
"제가 아직 이름을 말한 적 없는데요."
숲이 조용해졌다.
이요라가 카이를 보았다. 카이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다만 입술을 다물었다. 숨기고 싶은 말이 목 안에 걸린 사람처럼.
멀리 스톰엔드 쪽에서 검은 풍경 소리가 다시 울렸다.
카이가 고개를 돌렸다.
"출발해야 해."
"대답 먼저 해요."
엘레나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단단했다.
"당신은 누구예요?"
카이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아주 낮게, 바람보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에는 늦지 않았군."
엘레나는 숨을 멈췄다.
카이가 곧장 말을 덧붙였다.
"엘레나."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방식은 낯선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수없이 잃어버렸다가, 가까스로 다시 찾은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