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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든 Oct 22. 2023

성급하게 혼내지 않아서 미소 짓고 말았다

   종율이가 내 머리카락 끝을 잡아당겼다. 세게 잡아당기는 게 아니어서 아프지는 않았지만 아주 해맑은 눈으로 여러 번 그러기에 고민에 빠졌다. 나한테 이러는 건 괜찮아도 혹시 어린이집에서 친구에게 이러는 건 문제가 되니까. 이건 괴롭히는 거라고 이러면 안 된다고 알려줘야 하나 싶었다.


   문득 이제는 청소년인 조카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당시 조카도 종율이와 같은 네 살이었다. 종율이는 조카는 텔레비전을 보다가 내 머리카락을 한 움큼 빨아먹었다. 아침에 머리를 감고 나서 에센스를 듬뿍 바른 게 생각나 걱정스러웠다. 어쩔 줄 모르고 있는데 대뜸 조카의 엄마인 언니가 그냥 두라고 했다. 조카가 나를 자기만큼 좋아한다는 의미라고 했다. 가만히 두어야지, 오히려 뭐라고 하면 더 그런다고도 덧붙였다.


   나는 언니의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종율이가 몇 번 더 머리카락을 잡아당겼지만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얼마 안 가 종율이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누나 머리가 너무 길어서 내가 저기 바깥에 가서 잡고 올라와야겠다! 이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종율이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깨달았다. 이렇게 순수한 아이를 성급하게 혼냈으면 어떻게 됐을까. 울음이 터졌을 거고 상처를 받았을 거고 그날 우리의 소통은 엉망진창이 되었겠지. 상상만으로 끔찍했다.


   종율이는 동화〈라푼젤〉을 떠올린 거였다. 마녀 때문에 성에 갇혀 사는 공주 라푼젤은 길고 긴 머리카락을 내려 왕자님이 성에 오르도록 도왔다. 종율이는 그 장면이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 가만 보니 종율이의 할머니, 엄마 모두 머리가 짧았다. 라푼젤만큼은 아니지만 긴 생머리를 가진 사람이 종율이 주변에서는 나뿐이었다.


   비슷한 경험을 한번 더 했다. 한 고등학교에서 시간강사로 일할 때였다. 겨우 일주일 학생들과 만나야 했기에 부담이 컸다. 다행히 수업을 준비한 대로 하고 있는데, 한 녀석이 뒤에서 자꾸 헛구역질을 했다. 눈치를 줘도 멈추지 않았고 곧 그 주변에 앉은 녀석들도 웃거나 수군거렸다. 화를 삭이기가 어려웠다. 그 헛구역질이 나 수업에 대한 반응인 건가 하는 의문까지 들었다. 서로에 대한 신뢰가 없어서 그랬던 것 같다. 다행히 그때 종율이의 라푼젤이 떠올랐다. 저 녀석도 종율이의 라푼젤처럼 나름의 생각이 있는 건 아닐까. 성급하게 판단하고 혼내지 말자며 애써 화를 가라앉혔다. 열기가 느껴질 만큼 붉게 달아올랐던 얼굴도 차차 원래 피부색으로 돌아왔다.


   아니나 다를까. 그 녀석은 한약을 들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끝난 오후 첫 수업이었다. 짐작해 보면 점심 먹고 먹어야 하는 한약을 내내 놀다가 수업시간이 되어서야 먹은 듯했다. 헛구역질은 한약의 쓴 맛에 대한 학생의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수업이 끝난 후, 수업시간에 한약을 먹는 일에 대해서만 학생에게 주의를 줬다. 안도의 한숨과 함께 또 한 번의 경각심이 들었다. 성급하게 혼내는 것은 성급하게 판단하는 일이었다. 혼내는 일은 부모와 아이, 선생과 제자처럼 평등하지 않은 관계에서 이뤄졌다. 평등한 관계보다도 더 빠른 판단을 할 수 있었다. 올바른 훈육이라면 다행이지만 내가 느끼는 그 올바름이 오류는 아닌지 점검해 볼 시간이 필요했다.


   아이를 이해하지 못한 채 혼만 내면 아이는 혼날 일을 부모 앞에서만 숨기니까. 만약 내 아이가 있다면 차라리 내 앞에서 그러는 것이 더 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이뿐만 아니라 배우자나 친구 등도 마찬가지라고 느낀다. 차라리 내게 숨김없어 주었으면 하고 바란다. 그는 내게 소중하니까. 그래도 나는 그의 곁에 있고 싶으니까.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행히 이 고민이 즐겁다. 종율이의 라푼젤을 떠올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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