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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든 Sep 13. 2023

마음이 연결되면 변수는 두렵지 않았다


  꽃, 동그라미, 숨바꼭질하기…… 유민이가 좋아하는 걸 외웠다. 하나씩 더해 나열을 늘렸다. 순서대로 해주기만 해도 소리 내어 웃느라 시간이 다 갔다. 13개월 아기는 모든 순간 자신의 감정에 솔직했다. 그 넘치는 진심을 마주하다 보면 나도 마음의 옷을 벗을 수밖에 없었다.


  하루는 유민이 엄마와 아빠가 외출하지 않고 어느 방에서 잠들었다. 나는 유민이에게 집중하느라 그걸 미처 알지 못했다. 두 사람이 막 잠에서 깬 듯 눈을 비비며 나와서는 유민이의 웃음이 계속 들리는 게 신기했다고 다소 놀라면서도 고마운 표정을 했다. 내심 뿌듯해서 유민이를 더 많이 웃게 해주고 싶어졌다. 과제로 퍽퍽한 대학 시절에 유민이를 만나는 주말이 유일하게 느긋한 시간이 되었다.


  한 번씩 긴장하는 날이 있었다. 유민이 갑자기 토하거나 다리에 힘 풀리듯 넘어져 부딪치거나 이전과 같은 걸 해줬는데도 다른 반응을 보일 때 그랬다. 그동안 빼곡하게 기록한 일기를 잃어버린 듯 당황스러웠다. 새로운 공책을 펼치는 마음으로 유민이를 마주해야 했다. 여유는 얼마 안 가 다시 생겼다. 큰 맥락에서 보면 이런 과정을 반복하면서 우리는 성장했다.


  이제 와 돌아보면 나는 유민이에 대한 설명서를 만들고 있었던 것 같다. 누군가와 함께하면서 그에 대한 설명서를 만든다니 그렇게 좋은 관계인 것처럼 느껴지지는 않는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유민이는 친절한 존재가 아니었다.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말해주지 않았고 나는 그 순간의 반응을 어떻게든 알아차리고 싶었다. 우리 관계에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문득 운전면허를 얻기 위해 연수를 받던 때가 떠올랐다. 아무것도 몰라 서울에서 이동 차량이 가장 많고 도로가 복잡하다고 할 수 있는 강남역 인근에서 시작했다. 우회전을 해야 했고 매끄럽게 잘 해냈다. 문제는 그 상황을 기억하는 데 있어서 감각을 더 활용했다는 거다. 이 정도 거리에서 핸들을 이만큼 돌리면 되는구나, 운전 초보는 그 상황을 이렇게 간직했다.


  다음 연수 날, 같은 곳에서 나는 비슷한 지점에서 지난번과 흡사한 각도로 핸들을 꺾었다. 별 일 없이 잘 해냈다고 생각했는데 연수를 해주시는 선생님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내게 말했다. '지금 얼마나 위험했는 줄 알아요? 다른 차들도 살펴야지요.' 이 일 덕분에 도로에 나와 있는 많은 운전자가 자동차를 통해 소통한다는 걸 실감하게 되었다. 그날 사고가 나지 않은 것에 뒤늦게 놀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이제 운전할 때면 기억에 의존해서가 아니라 현재에 집중해서 핸들을 움직이고 브레이크를 밟는다. 내가 움직이는 만큼 차도 움직이고 이로 인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믿는다. 덕분에 신중하게 도로에 나간다. 나와 유민이의 관계도 다르지 않다고 느낀다. 서로 다른 의지와 상황에 따라 도로 위에는 변수가 생긴다. 유민이도 자기 나름의 생각이나 감정이 있기에 우리 관계에는 언제든 변수가 생길 수 있다.


  모든 관계가 그럴 수 있다. 어쩌면 나는 13개월 아기를 조금 더 수월하기 보기 위해 그를 위한 설명서를 만들었던 것 같다. 변수, 그 예상치 못한 상황은 이전과 다른 나를 요구하니까. 나는 그런 변수에 강한 사람이고 싶다. 내가 그릇에 따라 모양이 달라지는 물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할까? 아니다. 그가 언제든 내가 익숙하지 않은 반응을 할 수 있음을 알고 순간의 마음에 최선의 반응을 해주는 사람이 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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