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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든 Sep 06. 2023

뜨거운 프라이팬도 기꺼이 맨손으로 잡았다


  초등학생 남매는 요리를 하고 싶어 했다. 부모가 부재한 집에서 그들은 자주 배고팠고 자신의 집에서 조리 과정을 목격한 따끈한 음식을 먹고 싶어 했다.


  나는 그들의 부모에게 허락을 받아 간단한 요리를 해 먹었다. 계란 프라이, 라면, 토스트, 떡볶이…… 요리에 대한 욕심이 커졌다. 그 과정에서 행복해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벅찼다. 어느새 조리대 앞에 서는 일이 가볍게만 느껴졌다.


  그러다 뜨거운 프라이팬을 잡았다. 손잡이까지 달궈지는 그런 종류였나 보다. ‘앗, 뜨거워!’하고 서둘러 손을 떼야할 정도였지만 힘껏 참았다. 이제 막 요리의 즐거움에 흠뻑 빠진 초등학생 남매와 함께하고 있었으니. 여태 쌓아 올린 추억을 오늘의 놀람이 무너뜨릴 수 있으니. 시간이 흐르면 그것만 남아 요리가 두려워질 수 있으니.


  겨우 내려놓고서 얼얼한 손을 찬물에 담갔다. 초등학생 남매는 완성된 요리를 구경하면서 웃느라 나를 살피지 못했다. 그 소리에 괜히 웃음이 나서 따끔한 고통도 제법 괜찮았다. 덕분에 그날 우리가 만든 음식의 맛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타인의 미래를 상상한다. 내가 말하고 행동하고 건네는 무언가가 그에게 끼칠 영향을 살핀다. 유민이 엄마가 내게 그렇게 해주었기에 나도 초등학생 남매에게 그럴 수 있었다 믿는다. 그는 매번 무언가를 내밀었다. 주로 과일을 정갈하게 조각내어 접시에 담은 채 랩에 쌓아두었다.


  유민이랑 있으면 지칠 거라면서 껍질을 깎거나 밥알을 뭉쳐야 하는 먹을거리들, 손길이 느껴지는 것들을 마음 깊숙이 밀어 넣었다. 덕분에 나도 만삭에 가까워 무거운 몸으로 나를 위해 주방에 섰을 그의 모습을 그렸다. 우리는 서로가 없는 시간을 헤아리기 바빴다.


  한 번은 초록색 주스를 받았다. 오늘 내가 저걸 먹어야 하는구나, 그때 저절로 미간이 구겨지는 게 한참 지난 지금까지 느껴진다. 오이를 싫어하는데 아무리 봐도 저 주스는 그걸 생으로 갈아 만든 것 같았다. 기껏 만들어준 걸 남기고 이유를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분명 유민이 엄마는 미안해할 것이 분명했기에.


  이건 오이가 아니다, 최면을 걸었다. 어쩔 수 없이 먹어야 하는 상황이 올 때마다 거는 주문이다. 주로 김밥에 들어있는 오이, 냉면이나 자장면 위에 올려져 있는 오이…… 아주 얇거나 조그마한 조각에는 실패가 없었으니 자신 있었다. 초록색 주스가 입안에 가득 찼고 성실하게 목구멍 뒤로 넘어갔다.


  오이가 맞았다. 토할 것 같았다. 여기까지는 생각의 일이었다. 이게 아닌데, 토하겠다. 여기부터는 몸의 일이었다. 내려놓으려는데 문득 단맛이 물컹하게 느껴졌다. 살.. 았.. 다.. 근데 이게 뭐지? 초록색 주스를 다 마시고 나서야 알았다. 그건 멜론 주스였다는 것을.


  주말 오후, 데이트를 마치고 온 유민이 엄마에게 멜론 주스에 대한 감사 인사를 전했다. 내 인생에 잊지 못할 멜론 주스를 건네주었으니 진심이었다. 더군다나 그 짧은 순간에 (주문을 외우면 오이 주스를 먹을 수 있다) 오만과 (이건 오이 주스가 분명하다) 편견에 대한 큰 깨달음도 얻었다.


  그다음 주, 유민이 엄마는 또 나를 위한 간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슬쩍 보니 유민이는 아직 낮잠을 자고 있었다. ‘이제 일어날 때 됐어요’라고 말하고 유민이 엄마는 오디오에 CD를 넣었다. 노래가 흘러나와 적막을 달랬다. 간지럽혔다. 그 정도로 나지막하고 감미로운 음악이 유민이를 낮잠에서 깨워주었다.


  ‘Whose baby am I? I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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