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사랑 Apr 26. 2022

오늘도 걷는다

- 휴직 일기

10년 전, 그러니까 여의도 한복판에서 일할 때였다. 1000억이 넘는 프로젝트의 총괄 PM이자, 나의 상사였던 그녀는 매 점심시간마다 여의도 공원을 걸었다. 또각또각 힐을 벗어두고 운동화로 갈아신은 후 빠르게 전속력으로! 뭐가 저렇게 급해? 그런데 왜 점심은 안드시지? 같이 밥 먹을 사람이 없는 건가? 여유로운 점심 대신 홀로 파워워킹을 하는 그녀가, 신입사원이던 내 눈에는 매우 이상해 보였다.  


난임계에 발을 디뎠던 2019년부터 '걷기' 강조하는 글을 수없이 봐왔다. 전신 운동이  뿐만 아니라 난자질 향상에도 도움이 된다고 했다. 그런데도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그저 출퇴근 길에, 사무실에서 여기저기 다니며 걷는 것이  일상의 전부였다. '될놈될'( 배아는 착상도 잘되고 이벤트 없이 만출해서  태어난다는 표현)이라니 굳이  따로 걷기까지  필요가 있나 싶었다.  


이제는 매일 걷는다.


유산   달을 쉬고 슬슬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필라테스나 PT 등록해볼까? 휴직 후라 목돈이 부담됐다. 온라인 홈트를 해볼까? 이전에 했던 운동 형태와  다르게 해보고 싶었다. 등산을 가볼까? 매일마다 산을 찾는 건 불거능했다. 그래서 나는 걷기를 선택했다.  다리만 있으면 가능하니까.  


초반에는 매일 오후 1~3시를 '걷기' 시간으로 할당했다. 그리고 해가 뜨거운 요즘에는 오전 9~11시로. 남편이 출근 준비를 할 때 나는 걷기 준비를 한다. 그날 제일 마음에 드는 운동복을 꺼내 입고, 회사 다닐 때는 서랍 구석에 넣어두고 쳐다보지도 않았던 목이 높은, 스마일 얼굴이나 귀여운 동물들이 그려져 있어 발걸음마저 가볍게 할 것 같은 양말을 챙겨 신는다. 남편이 출근을 하면 간단한 살림 정리와 청소를 한 후, 발에 착 감기는 운동화를 신고 집을 나선다. 운동에너지를 끌어올려주는 '부스터’ 물도 한잔 타서 마시기도 한다. 따스한 햇볕, 조용한 거리, 선선한 바람, 길 한 켠의 들꽃, 그늘이 있는 벤치. 지상낙원이 따로 없다. 몰랐던 예쁜 길을 찾는 재미도 있고, 여유로운 시간을 보낸다는 풍족함도 있다. 그중 으뜸은 '잡념을 사라지게' 하는 마법이다.


걸으며 만난 길


걷기는 치유다.


직장에는 일과 사람이 있었다. 내가 할당받은 업무, 그것을 빠르고 정확하게 제대로 처리하며 성취감을 맛봤다. 또 근태가 엉망인 후배든, 자기감정대로 직원들에게 생떼를 부리는 상사든, 의지할 수 있는 옆 자리 직원이든, 나와 부대끼는 여러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휴직의 문을 통과하자, 그 '일'과 '사람'이 모두 순식간에 사라졌다. 여유로웠지만, 한편으로는 허전했다. 나를 증명할 길이 사라진 것 같고, 나와 감정적 교류를 나눌 누군가들이 없는 것 같아서.


걷기가 이런 마음을 치유하는 것 같다. 걷기는 복합적인 전신운동이다. 온몸의 근육이 제대로 활성화될 수 있도록 뒤꿈치, 가운데, 발가락 순으로 발을 딛어야 하고, 엉덩이 근육까지 자극이 전달될 수 있게 보폭을 크게 해야 한다. 또, 상체를 세우고 양팔을 자연스럽게 움직이며, 멀리 정면을 쳐다보며 걸어야 한다. 이 조건들을 모두 충족시키려 애쓰다 보면 몸과 머리가 모두 '걷기'에 쏠리게 된다. 그러면 자연스레 잡념이 사라진다. 혈액순환이 되면서 몸은 비 오듯 땀을 쏟아낸다. 더 나아가 바로 직전에 날 우울하게 했던 생각들이 '별 것 아닌 걸로' 치부되곤 한다. 또 걷다가 달성하는 '만보'는 성취감마저 느끼게 한다. 여러 논문에서 '걷기'가 스트레스, 불안감, 우울증을 감소시켜 정신건강에 도움된다고 말하는 이유가 이런 것 아닐까? 한 때 나의 상사였던 그녀도 그래서 시간을 쪼개 걸었으리라. 업무 스트레스를 날리고 활력을 얻으려. 그리고 건강을 유지하려. (난임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이가 둘이나 있었으니)



오늘도 달성했다. 1만 보


날이 좋아 걷고, 졸려서 걷고, 밥을 많이 먹은 것 같아 걷고, 서울에 가야 해서 걷고, 남편이랑 산책하며 걷고.. 걷기만 한지 한 달이 조금 넘었다. 이래저래 걷다 보니, 한 달간 평균 1만보를 걸었다. 그리고 작년 말과 올해 초 [시험관 - 임신 - 유산]이라는 과정을 통해 얻었던 지방이 조금은 사라졌다. 몸무게가 무려 4kg나 줄었다. 우울했던 마음과 함께.  


곧 남편 생일이다. 아침부터 종일 그날을 어떻게 보낼지 알아보며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나는 또다시 운동복을 입었다. 운동복 위에 당당하게 크롭티를 입고(몸무게가 줄어드니 자신감이 올라간다), 이어폰을 꽂고,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갔다. 어젯밤 비가 와서 못 걸을 줄 알았는데, 그 비 덕에 날씨가 선선해 걷기에 딱 안성맞춤이다. 이제는 걷는 시간이 제일 행복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여보, 일 그만해도 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