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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ther Jun 05. 2022

아름다운 것들

내가 부산을 간절히 떠나고 싶었던 이유 

조금씩 더위로 바닥이 뜨거워지기 시작하는 초여름, 나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엄마가 전화로 알려준 주소는 런던으로 떠나기 전 내가 살았던 주소와 매우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나는 공항에서 커다란 이민 가방을 찾은 후 Arrival Gate를 나와 곧바로 핸드폰에 인터넷이 연결되는지 확인했다. 그리곤 지도 앱을 켜 엄마가 알려준 주소를 찍어보았다. ‘양정’. 엄마가 알려준 동네는 양정이란 지하철 역 인근이었다. 지하철을 내려 큰길을 지나 지도에서 알려주는 낯선 골목으로 몸의 방향을 틀었다. 커다란 이민가방 때문에 나의 이마에선 땀이 흘렀고 등과 속옷이 축축이 젖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눈앞에는 가파른 오르막길이 나타났고 손에 붉고 선명하게 그어진 손잡이 자국을 바라보며 걷다 멈춰 쉬길 반복했다. 그렇게 10분 정도 오르막길을 걸어 올랐을 때 지도에는 짙은 남색 쇠창살로 만들어진 대문이 내 가족의 집이라는 걸 알려주었다.

대문을 열자 반층 정도 깊이의 계단이 아래로 향해 있었고 계단을 내려가자 2층짜리 낯설고 초라한 오래된 붉은 벽돌의 주택이 놓여 있었다. 2층에 몇 가구가 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1층의 현관의 수는 2개, 엄마가 말한 우리의 집은 가장 안쪽 집이었다. 주택 앞 작은 마당은 배수가 잘 되지 않는지 물이 질펀히 고여 있었고 나는 이민 가방의 바퀴와 바닥이 젖는 걸 걱정하며 조심조심 가방을 밀었다. 덜컹덜컹 참방참방 짧고 좁은 마당을 걷는데도 이 건물은 어찌나 고요한지 조금의 몸짓에도 수많은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첫 번째 현관 옆 창문은 다가구 주택임에도 훤히 열려 있었고 나는 낮이지만 빛이 들지 않아 밤처럼 어두운 창가 안을 살짝 살펴보았다. 창문 속에는 머리가 새하얗게 샌 백발의 할머니가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TV 소리도 나지 않는데 뭘 보고 있는 걸까? 나는 잠시 그 할머니를 바라보다 캐리어가 넘어가는 소리에 급히 몸을 돌려 이민가방을 붙잡았다. 그리곤 할머니의 집 다음 현관 앞으로 걸어가 문 앞 시든 화분 아래 놓인 열쇠를 꺼내 집 문을 열었다.

“도대체 열쇠를 이렇게 두고 다니면 어떡해? 번호키 좀 달지.”

문을 열고 들어온 집은 2개의 작은 방과 혼자 요리하기에도 비좁아 보이는 기름때 가득 낀 부엌, 그리고 밖에서 안이 훤이 보일 것 같은 헐겁고 더러운 창문이 있는 화장실로 구성돼 있었다. 방이 2개, 부모님의 방과 내 동생의 방. 내가 가족들 사이에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나의 방이 사라졌다. 나는 집 현관 입구를 가득 채워 사람이 비집고 들어올 수 없게 자리 잡은 이민가방을 부엌으로 밀어 넣고 안방에 펼쳐진 이불 위에 털썩 몸을 뉘었다. 몸의 무게만큼 들썩이는 이불 곁으로 하루살이 같은 수많은 먼지들이 내 몸 위를 오르내렸다. 분명 이 이불은 며칠, 아니 몇 주는 개지 않고 이렇게 펼쳐져 있었음에 틀림없었다. 얼굴 위로 먼지 몇 개가 달라붙었고 나는 짜증 가득한 작은 탄성을 지르고 화를 내다 제풀에 지쳐 잠시 잠이 들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늦은 밤 엄마 아빠가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1년 만에 보는 가족을 보고도 나는 반갑기보단 원망이 앞섰다. 그들을 향한 살가운 인사보단 초라한 집에 대한 불평이 나의 입술 사이로 와르르 쏟아졌다.

“그냥 그렇게 됐다.”

“뭐가 그렇게 돼? 뭘 했길래 이렇게 된 거야? 아파트는? 내 방은? 나 이제 어디서 자라고?”

“일단 기현이가 쓰는 방 저거 네가 써라. 기현이는 밤에 알바 가니까 니는 거기서 자면 된다. 니 온다고 싹 치워놨다. 기현이는 낮에 저 방이나 안방에서 자고 하면 되니까는. 니 내년에 복학하고 한 학기 지나면 취업할 거 아이가. 그때까지만 좀 참아봐라.”

미안하다, 사실은 이렇다. 내가 바랬던 대답만 골라 피해 가는 부모님 앞에서 나는 서러움에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아빠는 가스나가 오랜만에 집에 오자마자 짜증이라고 안방으로 들어가 TV 볼륨을 높인다. 엄마는 지금 이 순간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의 표정을 짓고선 부엌 가득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민가방 쪽으로 시선을 피한다. 깔깔거리는 TV 속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나의 훌쩍임을 강제로 음소거시켰고 내 소리가 아무 의미 없음을 깨달은 나는 불쌍한 엄마를 등지고 동생이 쓰던 방으로 들어갔다.

무거운 이민 가방의 무게와 집에 대한 분노, 그리고 여독을 잠으로 교환이라도 한 듯 나는 다음 날 오후 4시가 돼서야 겨우 눈을 떴다. 어제는 피곤해서 느끼지 못했던 큼큼한 쉰내가 이불에서 나는 것 같아 나는 급히 이불을 발로 밀어내곤 방을 나왔다. 방을 나오자마자 보이는 현관에는 부모님의 신발 대신 커다란 운동화 두 짝이 서로 다른 곳을 향해 누워 있었다. 발목 부분이 닳은 더러운 저 운동화는 동생의 것이다. 닫혀있는 안방 문을 열자 시커먼 후드를 뒤집어쓴 동생이 코를 골며 커다란 쥐며느리처럼 몸을 말고 자고 있었다. 나는 진짜 벌레라도 만지는 것처럼 왼발 끝으로 동생의 등을 툭툭 찬다. 처음엔 움찔거리기만 하던 동생이 짜증을 내며 잠을 깼다.

“야, 한국 오자마자 동생을 발로 차니. 내 방도 가져간 게.”

두 살 차이인 동생 역시 군대를 제대하기 며칠 전, 부모님으로부터 낯선 주소를 전달받았다. 우리가 10년을 넘게 살았던 20평대 아파트는 온대 없고 작은 고깃집을 하는 아빠와 아르바이트생도 없이 식당 일이란 걸 시작해 깊은 허리 통증을 호소하는 엄마가 이 작은 집과 동네에 어울리지 못한 불순물처럼 불편하게 살고 있었다. 그런데 반년도 안돼서 런던에 있던 누나가 한국에 왔고 아빠는 동생에게 누나와 방을 같이 쓰라고 했다. 21살과 23살, 의좋지도 않은 남매가 한방을 쓰기엔 각자의 취향, 생각의 세계가 너무나도 달랐다. 징그럽게 커버린 서로의 몸을 스치는 것, 바닥에 떨어진 체모 한 올에 서로를 끔찍해하고, 서로의 체취가 조금이라도 묻어나는 것이 있으면 불편하고 불쾌한 남매. 그날 이후 동생은 새벽에 집에 들어올 때면 부모님 방에서 부모님과 함께 잠을 자거나 화장실 앞에 누워 새우잠을 잤다. 잠귀가 밝은 나는 늘 동생이 돌아오는 소리에 잠을 깼지만 혼자 차지한 방에 대한 미안함, 혹여 잠자리를 빼앗길지 모른다는 불안함 때문에 문이 열리는 소리에도 늘 잠을 자는 척했다. 동생에겐 늘 불편한 마음이 들긴 했지만 그럴수록 이 상황을 설명해 주지 않고 이 상황을 초래한 부모를 탓했다. 그렇게 나와 동생은 이 좁은 집에서 서로를 더 밀어내고 미워했다.

나는 5남매의 둘째인 아빠, 7남매의 막내인 엄마 사이에 장녀로 태어났다. 장녀는 살림의 밑천이라고들 한다. 그에 걸맞게 어릴 때부터 부모님을 나를 예뻐함과 동시에 정서적인 많은 것들을 의지하고 공유했다. 집안에 불행이 닥치면 나는 그들을 위로했고, 스스로는 불행을 참고 인내했다. 혹시나 이 불행의 어둠을 동생이 알아차릴까 전전긍긍하며 그의 눈을 가리기 바빴다. 누가 먼저 알려주지 않았지만 나에겐 장녀 DNA가 심어져 있는 것인지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내가 없는 사이 훤히 펼쳐진 불행 앞에선 나도 어쩔 도리가 없다. 내가 한국에, 이 가족 곁에 없었던 1년. 도대체 그들에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이 낡고 초라한 낯선 집에는 항상 타인의 소리가 들렸다. 닳고 헤져 고쳐 입을 수 없는 옷처럼 낡은 몸을 가진 옆집 할머니가 내뱉는 기침소리는 아픔을 이겨내려는 생명력 같은 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아 무생물이 부딪히는 소리처럼 차가웠다. 천장에선 독실한 기독교인 부부가 낳은 6명의 자녀가 뛰고 울고 소리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잦아졌다를 반복했다. 나는 한국에 돌아온 후 매일 아침 윗집 아이들의 발소리와 비명소리에 잠을 깼고 긴 한숨을 쉬거나 천장을 향해 소리를 지르며 침대를 벗어났다. 

방문을 열자 라면 국물 냄새가 부엌에 가득했고 동생은 치우지 않은 컵라면 용기와 맥주캔, 편의점 비닐봉지와 함께 바닥에 잠들어 있었다. 

세상은 한여름의 생명력으로 환희에 차 하루하루 푸르게 반짝이기 시작했지만, 동생에게 상처를 주며 추레한 방 이불속에 숨은 나는 친구들의 연락에도 집을 나가지 않았다. 부모님의 식당이 쉬는 날, 나와 엄마와 수제비를 만들었다. 엄마는 동생이 며칠 전 수제비가 먹고 싶다고 말했다며 밀가루 반죽을 치댔고 나는 그 옆에서 애호박을 썰었다. 

“그런데 이거 미리 끓여 놓으면 내일 아침에 부는 거 아냐? 걔 내일 아침에 들어오는 거 아냐? “

“국물 쫌 빼놓고 내일 아침에 기현이 들어오면 반죽 넣고 새로 끼리 주면 된다. 니 칼질 잘하네? 언제 그렇게 늘었니. “

“런던에서 아르바이트했잖아. 식당 서빙도 하고 가끔 주방 보조도 하고. 그리고 혼자 밥 챙겨 먹어야 하니까 요리가 늘긴 했지. 근데 아빠는 언제 들어와? 수제비 끓일 때 같이 먹어야 할거 아냐?” 

“아빠 동창회 갔다. 그놈의 국민학교 모임은 언제까지 하려고. 그래도 거기 희재 아빠라고 아빠 친구 하나 있는데 가게에 자주 놀러 온데.”

아빠는 우리가 수제비를 다 먹고 드라마와 쇼프로 한편을 다 볼 때까지도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빠 늦는가 보다. 우리 먼저 자자. 니 오늘은 엄마랑 잘래?”

나는 엄마 옆에 누워 엄마의 통통하고 부드러운 오른쪽 팔을 껴안았다. 엄마의 얼굴에는 주름이 많이 늘었고 하얀 얼굴엔 이전에 보이지 않던 검버섯과 작은 화상 자국 같은 것들이 생겨 있었다. 식당일로 망가진건 허리뿐만이 아니었나 보다. 엄마의 얼굴과 팔 엔 불과 음식물에 덴 자국들이 가득했다. 엄마는 갑자기 일어나 불을 껐고 나는 더 이상 엄마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 보드라운 팔과 달리 굳은살로 거칠어진 손을 꼭 잡고 잠이 들었다. 

이른 아침 동생이 들어오는 소리에 엄마가 눈을 떴고 동생에게 지금 수제비를 먹을 건지 그냥 잘 건 지 소리쳐 물었다. 그 소리에 잠을 깬 나는 작은방과 현관의 신발을 확인한 후 아직 아빠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엄마가 수제비를 끓이는 동안 나는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아빠의 핸드폰은 꺼져 있었다. 당황한 엄마는 수제비 냄비 불을 끄고 급히 희재 아빠란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 벨소리에 잠이 깬듯한 희재 아빠에게 엄마는 아빠가 몇 시에 집에 들어갔는지 물었다. 국민학교 동창모임은 밤 12시 즈음에 끝이 났고, 아빠와 희재 아빠, 그리고 몇몇 사람들이 2차를 갔으나 2시가 되기 전 헤어졌다고 말했다. 그럼 도대체 아빠는 어딨는 걸까? 

“신고하자. 경찰에 전화해봐. “

동생의 말에 나는 급히 112에 전화했고 엄마는 계속 어디서 자고 있는 거 아니냐며 화를 냈다가 금세 어디 다친 건 아닌지, 교통사고라도 난 건 아닌지 아빠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내가 경찰과 통화를 하는 동안 엄마는 눈물을 글썽이며 계속 아빠의 꺼진 핸드폰에 전화를 걸고 있었고 동생은 투덜거리며 수제비를 먹고 있었다. 

그렇게 1시간 반 정도 시간이 지났을까? 동래역 근처 파출소에서 아빠를 길에서 발견해 보호 중이라고 전화가 왔다. 아빠는 취해있었고 흙먼지로 더럽혀진 셔츠를 입고 길에 쓰러져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사라진 지갑으로 연루해 볼 때 퍽치기를 당한 거 같다고 경찰은 말했다. 30분 정도 지나자 아빠는 집으로 돌아왔다. 아빠의 얼굴은 이른 새벽 하늘빛처럼 푸르고 서글펐다. 


아빠는 목소리가 크고 고집이 쌨고 나이보다 정정한 경상도 남자였다. 한때 배우 소리를 들을 정도로 미남이었던 아빠는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졌다. 그리고 트로트 같은 건 나이 들어 보여서 듣지 않는 곤조가 있었고 여전히 비틀스와 사이먼 앤 가펑클을 듣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 눈앞, 고개를 숙인 아빠의 머리칼은 데친 나물처럼 힘이 없었고 내가 한국에 없는 1년 사이 머리숱이 많이 줄고, 몸도 바싹 많이 말라 있었다. 내 기억 속 언제나 큰소리를 치던 아빠는 알량한 자존심조차도 겨우 남은 작고 볼품없는 노인의 길을 걷고 있었다. 

엄마는 나를 붙잡고 아빠에 대해 이야기하며 민원창구에 하소연하듯 화를 내기 시작했다. 내가 없는 1년 동안 아빠와 우리 가족의 불행에 대해 이야기를 쏟아냈다. 치사해. 막상 아빠 앞에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면서. 엄마의 분노와 불만은 순식간에 이 작은집을 채웠고 나는 그사이 이불속에서 세상모르게 코를 골며 잠든 아빠를 보자 답답함이 치밀어 올라 더 이상 집 안에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하늘을 보며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이 집을 벗어날 수 있을까. 취업은 기필코 서울로 가야지. 더 이상 이 사람들의 우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 

그 해 여름은 아주 느리게 흘러갔다. 나는 여전히 좁은 방에서 동생에게 미안한 마음과 짜증을 함께 품고 눈치를 보았고, 부모님의 가게는 잘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잠시였지만 가족을 뒤로한 채 홀로 떠났던 런던을, 그 누구도 나를 알지 못하는 회색의 도시를 그리한다. 내 곁을 스쳐가는 다양한 인종들과 이해하기 어려운 수많은 종류의 언어들이 뒤섞인 낯설고 가족에게서 자유로웠던 그곳. 

며칠 후 나는 런던에서 찍었던 사진들 중 일부를 현상했고, 몇 장은 좁은 방 한편에 테이프로 붙여두었다. 그리곤 자다가도 일어나 그 사진들을 바라보며 그곳을 그리워하고, 그곳으로 가는 꿈을 꾸길 바랐다. 아름다운 런던. 

한때 내가 사는 부산을, 바람이 많이 불고 바다가 있는 이 도시를 사랑했던 적도 있었는데. 대한민국 서민 가족의 딸로 태어난 나는 하루빨리 이곳을 벗어나지 못하면 더 이상 이 도시를 사랑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날 저녁 나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건너편에서 술이 취한듯한 아빠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고 어른들의 웃음소리 사이로 “좀 이따가 들어갈게”라고 말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화는 빠르게 끊어졌고 나는 곧바로 동생에게 언제 들어오냐는 문자를 남겼으나 답이 없었다. 

나는 마당으로 나가 하늘을 보았다. 나는 이 집에서 벗어나고 싶다. 한편으론 가여운 이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싶다. 이 복잡한 마음은 짙은 여름 밤하늘 더위 속에 뒤엉켜 힘겨움에 땀을 흘린다. 우리 가족에게도 언젠가 안온하고 아름다운 밤이 찾아올까? 나는 손에 잡히지 않는 아름다운 것들을 허공에 그리며 누구도 오지 않은 집 앞에서 눈물을 한번 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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