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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ther Aug 17. 2022

작은 불안을 헤엄쳐가는 방법

아쉽고 부끄러운 여름이 지나간다. 

어제 망원 한강을 한 바퀴 돌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친구와 문자를 주고받았다. 

"아직 덥네, 그런데 곧 추석이야. 시간 너무 빠르다."

"맞아, 뭔가 아쉽고 부끄러운 여름이다."

"가을은 마음 편안하고 충만하자."

아쉽고 부끄러운 여름. 나에겐 그러했던 여름이 지나가고 있다. 


이번 여름은 내가 늘 가지고 있는 '불안'이란 형태 없는 심란한 마음을 쪼개고, 그 근원을 찾는 일에 몰두했다. 대내외적으로 일을 줄였고, 멍하니 시간을 보내거나, 만화책이나 웹툰을 보고, 페스티벌에서 미친 듯이 뛰며 생각을 없애는 일에 집중해보았다. 종교는 없지만 목탁을 사서 매일 목탁을 두드려 보고, 하루에 대한 일기가 아닌 과거의 나, 나의 감정, 혹은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에게 보내지 못할 편지를 썼다. 음악에 맞춰 우주 속 진공의 공간에서 부유하듯 혼자 흐느적흐느적 춤을 춰보고 하루 종일 잠을 자보기도 하고 지칠 만큼 사람을 만나기도 했다. 이것은 하나의 실험, 내가 흉터처럼 품고 있는 작은 불안을 헤엄쳐가기 위한 행위다. 

사실 나는 그 행위에서 결과적으로 실패를 맞이했고 아직 작은 불안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작은 불안은 하나로 존재하지 않고, 암컷 생선의 뱃속에서 튀어나온 알처럼 수백수천 개가 알알이 매달려 있는데 다행인지 추측하건대 이 불안들은 깨어나거나 태어나진 않는 무정란 같은 상태인 것 같다. 이게 태어나면 나를 잡아먹어버리는 게 아닌가 몰라. 

요즘 나는 상담 선생님과 불안의 기원을 찾아내고, 과거의 나를 끄집어내는 작업을 주기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아픈 상처나 외로운 과거, 떨고 있는 작은 나를 꺼내는 일은 달이 차지 않은 동물의 뱃속을 갈라 핀셋으로 새끼를 꺼내듯 괴롭고 혼란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선생님은 벌거숭이 피 덩이인 나를 꺼내 스스로 안아주고 말을 걸어야 한다 했고 몇 번의 시도를 해보았지만 쉽지 않다. 피가 흐르는 작고 뜨거운 몸을 안고 있으면 단단하고 따뜻한 위로보단 함께 불안과 슬픔에 휩싸여 서로를 부여안고 엉엉 울기 십상이다. 선생님은 곧 익숙해질 것이라 했고, 나아질 것이라고 했다. 나는 괴롭지만 올해야 말로 스스로를 감싸던 번데기에서 탈피하기로 마음먹었기에 유혈이 난무하는 이 작업을 주기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어느 순간 마르고 죽은 불안이란 겉가죽에서 나와 촉촉하게 젖은 몸을 활짝 펼칠 수 있길 바란다. 이미 겉가죽은 작아져 커다란 내 몸뚱이를 압박하며 나가길, 채근하고 있음을 오래전부터 예감했기에. 


이타적인 사랑에 대해 생각한다. 나의 작은 불안을 헤엄쳐 나가기엔 나 스스로만을 사랑하고 아끼는 것으로 부족하다. 아니 나 스스로를 너무 사랑해서 그 사랑을 지키려다 보니 더욱 불안하다. 그래서 세상을 향한 이타적인 사랑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내 코어가 늘 사랑이라 생각했는데, 친구 한 명이 너의 코어는 '평화'라고 지적해줬다. 그런가? 사랑이 만들어낸 평화를 지키고 싶다. 결국 평화가 내 코어인가. 이타적인 사랑의 결과 역시 평화라면 이것도 맞는 말이네. 나로 인해 무너지는 당신의 사랑, 너로 인해 부서지는 나의 사랑에 지쳤다. 하지만 불안과 상처 속에 사랑은 여전히 존재하고 희망과 기대 역시 함께 살고 있기에 나는 이타적인 사랑에 좀 더 몰두해보기로 했다. 그럼 세상에 대해 좀 더 관대해질 것이라, 작은 불안에 방기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20대 초반 나에게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선물하고 홀연히 사라진 단골 카페의 아르바이트생이 있었다. 그는 나에게 사랑을 고백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가 나를 좋아하고 있음을 그의 행동을 통해 눈치채고 있었다. 사랑에 무심했던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페를 자주 찾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이 책을 나에게 선물하고 짧은 편지와 함께 자취를 감췄다. 상처를 받은 것인지, 좋아하길 멈춘 것인지, 그냥 개인 사정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더 이상 그 카페에는 그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 책을 읽었을 때 들었던 의문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 대한 답은 30대가 되어도 찾질 못했다. 나의 집에 누군가 침범해주길 바라면서 침범하면 몸을 떨고 두려워한다. 그와 동시에 내 정원에서 벗어나는 마음을 붙잡고 싶은 이 복잡 애매한 이기적인 감정. 이 모든 감정 역시 불안에 기초된 것이라 생각한다. 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불안의 기원을 찾아 대화를 나누자. 


이 작업에 몰두하다 보니 정신이 아파오는 기분이 들었다. 기억과 감정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오는 통증. 불면증에 시달리고, 잠이 들면 타인에게 두드려 맞는 무서운 꿈을 꿨다. 밤이 되면 돋아난 생각이 육체를 잠식했다. 또는 12시간 이상 잠에서 깨어나질 못했다. 그럼에도 나는 불안 속을 헤쳐 나가는 작업을 해야 한다.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불안과 마주하지 않으면 나는 더 나약해질 거야. 그렇게 혼자만의 여러 실험 속에 밤공기는 조금씩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아쉽고 부끄러운 그런 여름이 지나가고 있다. 그리고 내가 정한 실험의 기간이 끝나가고 있다. 나는 지난 6월 초 실제는 아니지만 공식적인 여름이 끝나는 8월까지 불안 위를 직접 내달리는 실험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이 실험의 기한은 얼마 남지 않았고, 9월부터 나는 일상으로 돌아올 것이다. 


문득 집을 돌아보니 몇몇 식물이 죽었다. 나의 실험 동안 제대로 돌보지 못한 집안의 생명들과 먼지 쌓인 가구들. 식물을 버리고 아무 죄책 감 없이 새 식물을 샀다. 아 나의 마음도 아무렇지 않게 버리고 새롭게 구입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란 잔인한 생각을 했다. 그리곤 마음을 고쳐먹고 나의 반려식물들에 대해 애도하고 미안함을 전했다. 새 식물들에게 너희들은 오래오래 살아남길 축령 했다. 내 정신이 앞으로 더 건강하고 단단해지듯 너희의 생명력도 함께 단단해지길. 생의 삐죽함과 삐뚤함, 이러한 굴곡 속에서 더욱 강해지길. 


여름 내내 비치 하우스(beach house)의 음악을 들었다. 샤이키 델릭, 드림팝, 슈게이징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르이기도 하다. 어릴 때 가끔 들었던 비치 하우스의 음악에 완전히 몰두한 여름이었다. 빅토리아 로그랑의 아름답고 몽환적인 목소리와 함께 하루하루가 흘러갔다. 비치 하우스가 내한한다는 소문이 있어 잠시 흥분했지만 거짓이었다. 한여름밤의 꿈이라도 꾸고 싶었나 보다. 나를 잔혹하게 해체하는 작업과 상반되게 순결한 여름에 꿈을 꾸고 싶었던지도 모른다. 다시 안락한 삶으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 늦여름의 풀벌레들은 어느 사인가 몰래 집안으로 들어와 불빛 앞을 나부낀다. 찰싹, 손바닥으로 그것들을 내리친다. 여름의 잔해가 손에 묻는다. 아쉽고 부끄러운 여름이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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