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오후에 마신 커피 기운이 하원 시간 즈음 올라오고 있었다. 에너지와 사랑이 동시에 차오르는 기분에 취해 충동적으로 키즈카페 할인 티켓을 구매했다.
'그래, 하원한 아이를 번쩍 안아 들고 키즈카페에 가야지. 유모차는 어린이집 주차장에 세워두고, 버스를 타는 거야. 두 시간 신나게 뛰어놀고 백화점 식당가에서 저녁까지 해결한 뒤에, 퇴근하는 남편 차를 얻어 타고 집으로 돌아가자. 완벽해.'
카페인 효과가 1시간도 안 되어 곤두박질칠 걸 예상 못한 것도 아닌데, 그냥 기운이 난 김에 아이를 기쁘게 해주고 싶었다. 겨울엔 놀이터도 못 가니까, 집에 가면 게으른 엄마가 소파에 누워 영상을 틀어주고 말 테니까.
하지만 역시나. 어린이집에서 버스정류장까지 한 걸음도 안 걷고 "엄마 힘들어, 안아줘"를 외치는 아이와 버스를 타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겉옷에 어린이집 가방까지 메면 15킬로그램은 가뿐히 넘는 아이를 안고 500미터를 걸으니 한겨울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키즈카페에 도착해서도 평소답지 않게 중간중간 울며 보채는 아이가 버겁던 참이었다. 어찌저찌 2시간을 꽉 채워 놀고 나오는데 이번엔 안 나가겠다고 울고 불고, 나가서는 백화점에 있는 자동차 유모차를 타겠다고 울고 불고, 한 바퀴 돌고 내리자니 안 내린다고 울고 불고. 안 되겠다 싶어 번쩍 안아 드는데 뒤로 버티며 난리를 치는 바람에 아이를 떨어트릴 뻔했다. 순간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허리를 삐끗했다. 머리끝까지 짜증이 나서 아이를 내려놓고 단호하게 말했다.
"너 혼자 가. 엄마는 여기 있을 거야. 안아주지도 않을 거야."
다 운 건지, 분위기를 감지한 건지 곧 진정하고 안아달라는 제스처를 취하는 아이를 안고 식당으로 향했다. 언제 울음 폭탄이 터질지 모르는 아이를 달래 가며 밥을 먹인 뒤 쫓겨나듯 밖으로 나오는 길에는 거의 웃음을 잃고 말았다.
"오빠, 백화점 문 닫아서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한마디를 했을 뿐인데 핸드폰 너머로 표정을 읽은 남편이 서두른다.
'힘들었어? 조금만 기다려, 금방 가.'
마음이 바쁜 아빠와 달리 눈치 없는 아들은 또 묻는다. “엄마, 나 힘든데 안아줄 수 있어?"
똑같은 질문을 세 번이나 하고 결국 “아니, 안아줄 수 없어"를 들은 아이가 길거리에서 또 운다. 하아, 내가 울고 싶다 정말.
울음이라기보다 떼쓰기에 가깝다는 걸 알면서도, 나중에 ‘그때 그냥 안아줄걸’ 하고 후회하기 싫어서 다시 아이를 안고 걸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지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여름아, 엄마는 정말 힘들어. 여름이가 자꾸만 안아달라고 하고 울고 떼쓰고 화내서 엄마는 이제 앞으로 여름이랑 같이 못 나올 것 같아. 여름이랑 재미있게 놀고 싶어서 키즈카페 오자고 한 건데, 이제 그냥 오지 말자. 그리고 오늘은 엄마 말고 아빠랑 같이 자. 엄마는 힘이 하나도 없어서 여름이랑 같이 잘 수 없어."
유치하다. 30년도 훌쩍 넘게 살아놓고선 30개월짜리 아기한테 이렇게까지 말하다니. 너무하다 싶으면서도 말이라도 해야 화가 풀릴 것 같았다. 조용히 듣고 있던 아이가 조그만 손으로 내 귀를 만지작거리며 말한다.
"엄마, 미안해. 내가 힘들어서 엄마한테 안아달라고 했어, 미안해. 우리 사이좋게 놀자. 엄마랑 아빠랑 나랑. 괜찮지? 응?"
왈칵 눈물이 터졌다. 진짜 힘들기도 했고, 아이 하나도 버거워하는 엄마라는 게 짜증도 났고, 무엇보다 부끄러웠다. 쪼끄만 애기한테 사과를 받고야 마는 스스로가.
"엄마도 짜증내서 미안해."
"나도 짜증내서 미안해."
"엄마가 여름이 기쁘게 해주고 싶었는데 나쁘게 말해서 미안해."
"엄마, 괜찮아. 이제 힘 났어?"
"응, 이제 힘 났어!"
"그럼 이제 일어나서 걸어볼래?"
눈물이 쏙 들어간다. 읏-챠. 일어나야지, 그래그래. 집에 가자 아가야. 집에서 냄비 하나만 쥐어줘도 좋아하는 너랑 키즈카페 오겠다고 한 건 내 욕심이지. 집에서 촉감놀이 하며 먹는 미역국 한 그릇을 더 좋아하는 너랑 외식을 하려고 한 것도 내 욕심이지. 그래놓고 자꾸 널 위해 한다고 생각하고 심통 부려서 엄마가 미안해.
알고 하는지 모르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아이의 말 한마디에 울고 웃는 요즘. 아이 입에서 나오는 예쁜 말들을 오래 기억하고 싶어서 적어두곤 한다. 나의 사랑, 나의 힘.
어느 날 밤, 둘이 침대에 누워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여름아, 여름이는 언제 행복해?"
"언제나 행복하지."
"'언제나' 행복해? 아이 좋아라."
"엄마는?"
"엄마는 여름이 덕분에 행복해."
"나도 엄마 때문에 행복해. 엄마 사랑해."
심장 녹는다, 너 때문에.
"여름아, 아침에 엄마가 먼저 나가서 속상했지?"
(잊은 듯 곰곰이 생각하더니) "응, 엄마 어디 갔다 왔어, 하루종일~~"
'하루종일'은 또 어디서 배운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