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엔 있다고 믿었었는데
처음 달리기 경기를 볼 때마다 왜 선수들이 같은 선에서 출발하지 않는지 의아해했었다. 주어진 기회는 공평해야 하는데, 제일 앞 출발선에 있는 선수에게 특혜를 주는지. 이 궁금증은 달리기가 시작하자마자 끝이 났다. 서로 달려야 하는 거리가 저만큼이나 차이가 나는구나, 운동장을 열 바퀴를 돌아야 한다면 저게 너무나 큰 차이겠구나, 싶어서.
그 사실이 내 생각으로 자리 잡는 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올바른 생각이 사람 몸에 자리잡기까지는 항상 시간이 걸린다. 그 전엔 주어진 기회는 공평하고, 개인의 노력이 달라서 다양한 삶의 방식이 있다고 여기곤 했다. 20년 정도를 그런 줄 알고, 그게 편하니까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이 세상, 오히려 정반대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주어진 기회는 애초에 불공평했다. 바닥이 부서진 순간부터, 독에 얼마나 많은 물을 붓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목소리가 낼 수 있는 이유는, 항상 내 목소리를 들어주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항상 내 말은 무언가를 변화시켰기 때문이었다. 양념치킨을 시킬 것이냐, 프라이드치킨을 시킬 것이냐를 결정하는 사람도 나였고, 아디다스냐, 나이키냐를 결정하는 사람도 나였다. mp3냐 cdp냐, pmp냐 노트북이냐, 아니면 전자사전이냐, 선택권이 있었기에 선택할 수 있었고, 선택의 범주가 넓었기에 영향력의 범주도 넓었다. 내가 그렇게 살았던 것처럼, 남도 그렇게 사는 건 줄만 알아서, 내가 가진 것은 남도 가졌으니, 못 가진 것에만 목소리를 내면 된다는 생각을 했었다. 자신을 거의 인류 표본으로 여겼으니, 이 얼마나 거만한 일일까.
그때부터 선뜻 입이 열리지 않았다. 같은 경험을 했다고 생각해도, 말을 하기가 힘들어졌다. 내가 생각하기에만 같은 경험이지, 상대가 느끼기에 다른 경험이면, 그건 다른 경험이니까. 애초에 다른 사람이 사는 삶이 같은 경험일 수가 없으니까. 내가 말을 할 수 있다고 해서, 남이 말을 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면 안 된다고, 내가 누군가 하지 못했던 건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라고 고개를 주억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