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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 Dec 28. 2020

운다고 달라질 일은 없겠지만

시인, 건축가, 소시민, 하루살이처럼 삽니다

시인.

시인이 되야겠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철들 무렵 바라본 시인의 삶은 생각보다 배고픈 것이었다. 상상했던 것 보다 고된 '시인'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사람, 박준.


우리는 모두 고아가 되고 있거나
이미 고아입니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같이 울면 덜 창피하고
조금 힘도 되고 그러겠습니다.



박준 시인의 '시'를 몇 번 읽어 본 일이 없다. 그럼에도 고르고 또 고른 책이 이 책인 이유는 '우리는 모두 고아가 되고 있거나'에서 마음속은 눈물이 가득차 콧등이 시큰하듯 그러했고, '이미 고아입니다'에서 울컥해서다.


건축가.

타협을 했다고 하기에는 제법 거창했다. 건축가가 되려고 했던 건 아니다. 어쩌다 건축을 공부하게 됐으니까. 나는 꽤 못했다. 10년도 더 전에 그만뒀지만, 가끔 설계하는 꿈을 꾼다. 여전히 못하고, 설계가 아찔하다. 설계 사무소에서 잠시 일을 하기도 했는데, 설계를 할 수 있는 기술 특히 젊은 건축 인력에게는 어떤 기발함, 재능은 그닥 필요치 않았다. CAD(캐드)를 잘하고 도면을 잘 그리면 되는 그럼에도 그 일 자체가 뒷머리가 지끈한 그런 일상이 쌓여갈 따름이었다.


소시민.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에 회사를 그만 뒀는데, 애매하게 부모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관계로 바로 다른 일자리를 찾아 일을 하게 되어 '글을 쓴다'는 것은 항상 그렇게 하고 싶다 정도로, 혹은 이만한 취미 정도로 그렇게 지나왔다.


어느덧 그냥 하루살이처럼 하루하루 채우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다. 여전히 무거운 인간관계를 똑바로 바라보고 직면하지 못한다. 그나마 어릴적 꾹꾹 눌러 쓰던 손 편지도 쓰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고독을 조금 아는가 싶다가도 가끔은 인생의 허무함에 서러움이 사무친다. 왜 나는 나 밖에 되지 못했는가 하다가도 이만하면 됐지라고도 한다.


운다고 달라질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삶이란게, 쓸데 없이 비장할 필요도 없었다. 지독한 삶 한 가운데서 늘 눈물을 쏟았다. 운다고 달라질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박준, (주)난다


역으로 나는 타인에게 별생각 없이 건넨 말이 내가 그들에게 남긴 유언이 될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같은 말이라도 조금 따뜻하고 예쁘게 하려 노력하는 편이다.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오늘만 하더라도 아침 업무회의시간에 '전략' '전멸' 같이 알고 보면 끔찍한 뜻의 전쟁용어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썼고 점심에는 식당에서 우연히 만난 지인에게 "언제 밥 먹자"라 는 진부한 말을 했으며 저녁부터는 혼자 있느라 누군가에게 말을 할 기회가 없었다. 말은 사람의 입에서 태어났다가사람의 귀에서 죽는다. 하지만 어떤 말들은 죽지 않고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살아 남는다. P19


어디가 되었든 평당 천만 원이 훌쩍 넘는, 그래서 사람이 사람을 내쫓는 일이 허다하게 일어나는 도시와는 다른모습으로 지금 태백은 있다. 사람을 보듬는 땅의 방식으로. 떠난 이를 기억하는 일은, 아직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일과 꼭 닮아 있음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떠한 양식의 삶이 옳은 것인지 나는 여전히 알지 못한다. 다만 앞으로 살아가면서 편지를 많이 받고 싶다. 편지는 분노나 미움보다는 애정과 배려에 더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P23


편지를 받는 일은 사랑받는 일이고 편지를쓰는 일은 사랑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늘은 늦은 답서를 할 것이다. 우리의 편지가 길게 이어질 것이다.  P26


잠이 좋다. 사람으로 태어나 마주했던 고민과 두려움과 아픔 같은 것들을 나는 대부분 잠을 통해 해결했다. 헤어짐의 아픔이나 미래에 대한 걱정이나 끙끙 앓던 신열 같은 것들도 잠을 자고 나면 한결 나아졌다. P 34


그래도 어느깊은 숲에서 잘 자란 나무 한 그루와 한 시절을 함께했던 사람들의 슬픔 속에 우리들의 끝이 놓인다는 사실은 여전히 다행스럽기만 하다.  P 38

 

하지만 어디에서도 무거운 인간관계를 현명하게 덜어내는 방법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P 50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깨어지는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사건보다는사소한 마음의 결이 어긋난 데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더 많다.  P 45


하지만 나는 이렇게 외연을 넓히며 사는 삶을 그리 길게 이어나가지 못한다. 몸보다 마음이 먼저 쉽게 지치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음식도 많이 먹으면 탈이 나는 것처럼 우리가 살아가며 맺는 관계에도 어떤 정량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물론 이 정량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적어도 나는 한번에 많은 인연을 지닐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P 49



"고독과 외로움은 다른 감정 같아. 외로움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것일 텐데, 예를 들면 타인이 나를 알아주지 않을 때 드는 그 감정이 외로움일 거야. 반면에 고독은 자신과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것 같아. 내가 나 자신을 알아주지 않을 때 우리는 고독해지지. 누구를 만나게 되면 외롭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독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야. 고독은 내가 나를 만나야 겨우 사라지는 것이겠지. 그러다 다시 금세 고독해지기도 하면서."  P51


나는 왜 나밖에 되지 못할까 하는 자조 섞인 물음도 자주 갖게 된다. 물론 아주 가끔, 내가 좋아지는 시간도 있다. 안타까운 것은 이 시간이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이고 또 어떤 방법으로 이 시간을 불러들여야 할지 내가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P 56


"사는 게 낯설지? 또 힘들지? 다행스러운 것이 있다면 나이가 든다는 사실이야. 나이가 든다고 해서 삶이 나를 가만두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스스로를 못살게 굴거나 심하게 다그치는 일은 잘 하지 않게 돼."  P 63


내가 상대를 애정하는 마음보다 상대가 나를 애정하는 마음이 작을 때 우리는 짝사랑이라는 병에 든다. 이 병은 열병이다. 발병부터 완치까지 나의 의지만으로 시작되고 끝난다. 다만 짝사랑이라는 감정은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숱하게 가져본 것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경험이 쌓이면 이 감성을 조절하는 데에 그리 큰 어려움을 겪지 않는 나는 헤어진 애인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내거나 늦은 밤 전화를 걸어본 적이 있다. 물론 이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소위 말하는 '미련'이라는 말로 치부하고 싶지만은 않다. 다만 관계가 조금 덜 죽어서 그런 것이라고, 이러한 행동 또한 관계를 잘 죽이기 위한 과정이라 생각한다.  P 80


상대가 나를 애정하는 마음이 더 클 때 생긴다. 이럴 때 우리의 눈에 비치는 상대는 더없이 부담스럽기만 하다. (중략) 다만 관계가 조금 덜 죽어서 그런것이라고, 이러한 행동 또한 관계를 잘 죽이기 위한 과정이라 생각한다. P 81


세상에 일류 연애도 있나?  P 87


나는 책을 처음부터 읽는 대신 앞서 이 책을 익은 이들이 쳐놓은 밑줄들을 먼저 읽기 시작했다.  P88


그녀가 찾고 있는 것은 내 팔이 아니라 '그 누군가'의 팔인 것이다. 그녀가 찾고 있는 것은 나의 따스함이 아니라 '그 누군가'의 따스함인 것이다.  P 92, 상실의 시대 55


사람이 사람을 진실로 사랑한다는 건, 자아의 무게에 맞서는 것인 동시에, 외부 사회의 무게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기도 합니다.  P 94


해남 보성 순천 여수 광양 하동 남해 진주 통영 거제 부산 제주  P 98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이마에 손이 포개어질 때의 촉감은 손바닥보다는 이마에서 더 강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P 100


햅쌀을 불려 놓은 물처럼 구수하고 땀 흘리며 자고 있는 아이의 이마 냄새처럼 새큼하면서도, 오래 묵은 양주를 처음 열었을 때처럼 퍼지는 알싸함.  P 104


배가 고플 때 먹고, 고단할 때 몸을 뉘이고, 졸음이 오면 애써 쫓아내지 않고 잠이 드는 것. 어쩌면 이것이 인간으로서 성취할 수 있는 해탈과 가장 가까이 자리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적어도 그렇게 참지 않는다면 조금 덜 욕망할 수 있을 테니까.  P 120


시가 돈이 되지 않듯, 시인이 직업이 될 수 없으니 내가 한 일들은 그동안 빈번하게 바뀌었다.  P 125


으레 통영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 시를 쓰기도 했는데 아래의 시도 그 중 한 편이다.  P 127


하지만 노동과 삶에 지친 날이면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눈빛에서 설핏 가난을 느낄 때면 나는 그 때 아버지의 말을 생각한다.  P 141


'어른'이라 불릴 만한 분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나는 곧 답을 했고 얼마 후 그 기사를 지면에서 볼 수 있었다.  P 145


자신의 과거를 후회로 채워둔 사람과 무엇을 이루었든 이루지 못했든 간에 어느 한 시절 후회 없이 살아냈던 사람의 말은 이렇게 달랐다.  P 148


엄마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아이가 오히려 엄마를 더 그리워할 거라는 생각 말입니다.  P 152


반면 김중업 선생은 즉흥과 환상, 시위 효과만을 노린 서울시 건설상으로 미루어 10년 후의 서울은 세계에서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추악한 수도가 되어버릴 것이라 말하면서 같은 지면에서 다음과 같이 예상했습니다.  P 154


녹지대의 형성, 태양광선의 조사를 무시한 고층화란 지옥이다. (중략) 강 양쪽에 고속도로가 나면 시민은 어떻게 한강에 접근 할 수 있는가? 한강과 여의도는 서울 시민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어야 한다.  P 154


이제 우리는 컵에 담긴 물과 흐르는 강물 사이의 관계를 생각하려 하지 않습니다. 자신과 탄소와 나무의 관계도를 그려내지 않습니다.  P 156


우리는 모두 고아가 되고 있거나 이미 고아입니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같이 울면 덜 창피하고 조금 힘도 되고 그러겠습니다.  P 157


가득 담은 따뜻한 밥 한 공기와 초간장 한 종지를 유년의 아버지에게 보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동안 내내 아프기만 했던 속이 조금 편해지기 시작했다.  P 161


그리고 나중에 내가 고아가 되면 <푸른 하늘 은하수>도 구해봐야지 그 때는 내가 아버지처럼 엉엉 울게. 그래.  P 165


지금 지나고 있는 이 길 위에는 보이는 것보다 더 가까이 있는 것들, 생각보다 더 빠르게 다가오는 것들로 가득하다. 그 사이사이에서 경적 소리를 들어가며, 눈을 비벼가며, 손을 흔들기도 해가며 우리가 이렇게 스쳐간다.  P 170


삶은 그 어느 때보다 진실했고 간결했지만 점점 억울한 마음이 짙어졌다. 내 삶이 점점 시와 문학에서 멀어져가고 있다는 생각 탓이었다.  P 177


문학 분야 외의 책만 읽을 것.  P 179


하지만 유서들의 내용 또한 핏발 서린 분노와 원망보다는 고마움과 미안함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았다. (중략) 내가 사라지는 것들의 말을 받아 적는 이유는 그들의 사라짐을 붙잡아 화석처럼 남기기 위한 것이 아니다. 조금 잔인하게 말하자면 나의 시는 충분한 애도와 슬픔을 통해 숱한 사라짐들을 완전히 잊기 위함이다.  P 184


죽으면 아픈 것도 슬픈 것도 외로운 것도 끝이다. 웃는 것도 화내는 것도. 그러니 용감하게 죽겠다.  P185


내가 당신을 보는 혹은 당신이 나를 바라보는 서로의 눈동자에서 태어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P 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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