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 - 왕산포, 가로림만
서산의 왕산포는 지도의 한 구석에 있는 아주 작은 포구였다. 사람은 몇 없었고, 포구 입구에는 낡은 어선 몇 척이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하지만 그 안쪽으로 들어서자 거대한 가로림만의 갯벌이 펼쳐졌다. 그것은 단순히 바다의 가장자리가 아니라, 바다와 육지가 끊임없이 서로의 경계를 바꾸며 숨 쉬는 공간이었다. 밀물이 들어오면 갯벌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썰물이 빠지면 다시 육지가 드러났다. 바다는 자신이 차지한 자리를 늘 되돌려주는 듯했다. 왕산포는 그렇게 하루에도 두 번씩 세상의 모양이 바뀌는 곳이었다.
갯벌 위에는 조개 껍질과 작은 게의 흔적이 빼곡히 남아 있었다. 그것들은 바다가 물러난 뒤 남긴 문장 같았다. 갯벌의 표면은 부드럽고도 단단했으며, 발을 내딛을 때마다 미세한 숨결이 새어 나왔다. 바람은 짠내와 흙내, 그리고 아직 젖어 있는 바다의 냄새를 함께 실어왔다. 그 공기를 마시는 순간, 나는 이곳이 단순히 바다가 내려앉은 땅이 아니라, 시간과 계절이 겹쳐 있는 공간임을 느꼈다. 물이 들어올 때와 빠질 때, 갯벌은 전혀 다른 얼굴을 가졌다. 살아 있는 생물처럼, 매 순간 모양을 바꾸고 있었다.
그리고 조용히 말라가는 가을들
이 한적한 포구엔 사람은 없지만, 고양이들은 흔했다.
해가 기울기 시작하면서, 갯벌의 색이 변했다. 처음에는 회색빛이던 진흙이 점점 붉게 물들고, 그 위로 얕은 물이 얹히며 거울처럼 하늘을 비추었다. 그 순간 바다와 하늘의 경계는 사라졌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 아래, 붉은 해가 천천히 수평선에 닿을 때, 세상은 잠시 멈춘 듯했다. 빛은 말없이 번졌고, 갯벌 위의 얇은 물결은 그 빛을 받아 금속처럼 반짝였다. 그 광경은 장엄하거나 극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단순해서 마음이 고요해졌다.
왕산포의 일몰은 보는 사람을 말없이 만들었다. 해가 완전히 떨어진 뒤에도 하늘은 한동안 붉은 기운을 품고 있었다. 바다의 끝과 하늘의 끝이 맞닿는 그 자리에서, 나는 어떤 경계도 느낄 수 없었다. 바다가 물러난 자리에 남은 갯벌, 그리고 곧 다시 차오를 바다. 이 반복 속에서 세상은 끊임없이 사라지고, 다시 생겨났다. 인간의 하루, 계절의 변화, 생명의 순환이 모두 이 갯벌의 호흡 안에 들어 있는 듯했다.
왕산포는 작고 조용했지만, 그 안에는 거대한 시간이 있었다. 그곳에 서 있으면 ‘지금’이라는 순간이 조금씩 늘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물결이 멈추지 않듯, 삶도 어느 한 장면에서 완전히 머물 수는 없다는 걸 갯벌이 가르쳐주었다. 바다는 밀려오고, 다시 물러간다. 남는 것은 잠시 드러나는 땅, 그리고 그 위에서 잠깐 머무는 인간의 발자국뿐이다.
서산의 많은 풍경 중에서도 왕산포가 유독 마음에 남은 이유는 아마 그것 때문일 것이다. 이곳의 시간은 화려하지 않고, 소리 높지 않다. 대신 끊임없이 바뀌면서도, 늘 제자리로 돌아온다. 나는 그 단순한 반복 속에서 묘한 위안을 느꼈다. 세상의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모든 것은 결국 다시 돌아온다는 확신 같은 것. 왕산포의 붉은 일몰은 그렇게 내 마음 깊은 곳에 남았다.
사라지면서도 남는 풍경, 그게 바로 서산의 바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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