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딸이 잠자리에서 내게 건넨 말이었다. 자기와 동생의 엄마(나), 사촌오빠와 언니의 엄마(나니), 아빠의 엄마(할머니), 고모의 엄마(할머니)도 있는데 엄마의 엄마만 없지 않냐는 딸의 세심한 관찰과 위로였다. 딸의 마음을 고맙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그 말을 애써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 그런데 그 말을 꺼내야 할 적절한 타이밍이 생겼다.
해변가에서 어머님과의 산책을 마치고 남편과 아이들을 챙겨 먼저 숙소로 보냈다. 나니는 사진 찍을 기분이 아닌 것 같아 보였지만 그래도 하얀 원피스를 입고 온 그녀의 사진을 남겨주러 함께 해변가로 갔다. 다행히 사진을 찍고 나서 로비로 들어온 후에야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나니와 나는 호텔에 앉아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나니에게 딸이 내게 해준 말을 들려주었다.
괌 힐튼호텔 내 카페 치노
그러면서 나의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나는 엄마와 같이 여행 오고 싶은 생각은 감히 하질 못하겠다고. 어떤 부모는 생각만 해도 마음에 짐이 되기도 한다고. 나니의 임신 때부터 곁에서 손주까지 함께 키워낸 어머님은 지금까지 열심히 발맞춰 오셨다고.
나니의 표정을 보니 고맙게도 내가 그 이상의 말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나니도 대강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다만 그녀에게 직접 나의 부모에 대한 말을 꺼낸 적은 없었다. 나는 그녀가 부러웠기 때문이다. 비록 시어머니로 만났지만 나는 어머님을 나의 또 다른 엄마로 생각하고 싶었다. 내가 엄마라는 존재로부터 받고 싶었던 사랑의 형태를 어머님이 내게베풀어주셨다. 사랑이 많은 어머님으로부터 나는 많은 것을 받았고 또 배웠다.
초코와 망고 조합 아이스크림. 맛있다.
다만 그 사랑이 상대적으로 오빠에게 편중되어 있다고 느끼는 나니로서는 친엄마에 대한 목마름이 여전히 있을 것이다. 그래도 착한 나니는 오빠를 진실로 질투하지 않는다. 좋은 곳에 모시고 가면 늘 오빠를 생각하는 엄마의 마음을 충족시켜 드리기 위해 부러 우리 가정에게까지 여행을 제안했다. 식성이 까다롭진 않지만 메뉴에 대한 평가가 후하지 않은 오빠를 위해 무엇을 먹을지 한 번 더 고민하고 검색하는 그녀의 노력을 그들은 알까. 오빠가 좋아야 엄마가 좋다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도.
괌 힐튼호텔과 연결된 이파오비치
호텔 밖으로는 비가 세차게 쏟아졌다. 언제 그칠까 걱정하는 나와는 달리 나니는 낭만적이라며 좋다고 했다. 마치 드라마 촬영장에서 퍼붓는 물처럼일정치 않은 빗물이호텔의 통유리창을 타고 주룩주룩 흘렀다.하얀 원피스만큼이나 하얗던 그녀의 얼굴 덕분에 붉어진 눈가를 금세 알아챌 수 있었다. 우리는 동시에 유리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쏴아 쏴아, 창 밖으로는여전히 비가 그칠 줄 모르고 내렸다.
마지막 날 숙소에서 수영. 해맑은 나니. 예쁜 나니
그래도 나는 그녀가 부럽다. 시집을 가고 나이가 들어도 엄마와 딸의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서로의 노력이 없으면 안 될 일이다. 노력하지 않는다면 자녀에겐 의무만 남을 뿐이고, 그 의무라는 것이 부모가 자녀를 키우며 지킨 의무보다 크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이 순리인 것처럼, 부모가 되어 부모의 마음을 헤아린대도 그 이상으로 의무를 다하기란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의지와 사랑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나니도 노력하고 있었지만 어머니의 끊임없는 사랑과 지원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더 이상 내게로 흐르지 않아도 좋으니 몸을 담글 수 있게 충분한 물이 있었으면, 언제든 그 안으로 풍덩 뛰어들어 놀다 갈 수 있도록 넓고 깊은 물 웅덩이로 있어주었으면, 아니 넓지 않더라도 태고에 내 몸뚱이 하나 웅크리고 있던 그 공간만큼이라도 내게 품을 다시 내어주었으면 좋았겠다고,그렇게 수영장에서 해맑게 노니는 나니를 보며 나는 나의 엄마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