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이 Apr 26. 2024

당신이 내게 찾아왔다

불량 청소년에서 모범 청소년으로


'뭐가 좋다고 저렇게 웃는 걸까?'


크리스마스이브, 무슨 행사를 하는 모양이었다. 버스를 타고 교회 앞을 지나가는데 내 또래 청소년들이 방긋방긋 웃으면서 서 있었다. 당시 나는 완벽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던 중학교 3학년, 불량 청소년이었다.


내가 불량 청소년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된 건 중학교 입학식날 나를 찾아온 잘생긴 오빠 때문이다. 당시 학교에서 제일 잘 생긴 걸로 유명하던 선배 오빠가 나를 언제 봤다고 사귀자고 했다. 잘생긴 얼굴에 홀려서 나도 모르게 대답을 해버렸다(!)


그 오빠가 다녀간 뒤 교실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었다. 여자 아이들은 약간의 호들갑과 함께 부러움의 눈빛을 보냈다. 남자아이들은 약간 기가 죽은 것 같기도 했다. 누구도 나를 건들 수 없을 것 같았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친했던 친구들과 같은 중학교에 배정받았다. 원래부터 친구였으니 낯선 중학교에서 서로 의지하며 몰려다녔을 뿐인데 그게 선배들 눈에 띄었나 보다. 여자 선배 몇 명이 하교 후에 우리를 외진 곳으로 부르더니 '터치'라는 명목으로 한 대씩 때리기 시작했다.

 

내 부모님으로부터 단 한 대도 맞지 않고 자랐는데, 이게 무슨 상황인가. 무서운 선배 언니들은 그렇게 우리에게 권력을 이임해 주었다. 그들은 우리를 한 명씩 골라 '양언니'라고 하며 한 편으로는 매우 잘해주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이게 무슨 관계였나 싶다. 당장에 학폭위원회를 열었어야 했는데, 그렇지 않고 순순히 받아들였던 걸 보면 우리도 그 권력을 탐하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철없던 그 삼 년 동안,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뒤틀린 모습으로 우정이라는 이름의 방황을 쌓아가던 중 하나의 사건이 터졌다.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건 싸움구경이라 했던가. 남자아이들의 싸움을 구경하러 갔다가 주민의 신고로 경찰서에 모조리 끌려갔다. 나는 그 뒤로 절대 싸움 구경을 하지 않는다. 말리지 않을 거라면 그냥 지나치는 것이 낫다. 싸움 초기에는 보는 눈이 많으면 안 할 짓도 하게 되는 게 인간이라, 마음에 부담 하나 덜어준다는 생각으로 일부러 눈길조차 주지 않는 게 내 나름의 배려다.


그 일이 터지고 나서 모든 아이들의 부모님이 학교로 소환되었다. 아이들은 부모님 앞에 서니 초등학생도 아닌 유치원생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누가 주동자인가'에 대한 학생 주임 선생님의 추궁에, 제일 먼저 가자고 말했던 친구가 발뺌하기 시작했다. 이 친구도 저 친구도 다 말이 달랐다. 그 모습에 우리가 우정이라고 부르던 것의 민낯을 보게 되었다.


그렇게 우정(이라고 부르던 것)에 금이 갔다. 그동안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어울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함께 하는 시간 동안 정이 쌓였기 때문이었다. 여자 아이들의 우정은 얄팍하다지만, 사춘기 시절 마음 둘 곳 없는 아이들끼리 나눈 시간은 쉬이 무시할 수 없는 법이다. 그러나 이젠 우리의 잘못된 우정을 끝낼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때부터였다. 는 시간만 되면 자연스레 모이던 우리의 아지트에 가지 않기 시작한 것이. 당시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서는 연합고사라는 시험을 치러야 했는데, 나는 공부한다는 핑계로 자리를 뜨지 않았다. 실업계를 간다고 하는 친구들과 떨어지기 위해서, 나는 일반고에 진학하려 공부를 열심히 했다.


공부를 핑계로 거리를 두었지만 친구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아예 없진 않았다. 정이 무섭기도 했고, 친구들 사이에서 배신자라고 낙인찍힐까 봐 두렵기도 했다. 내 쪽에서 친구관계를 매몰차게 끊어낼 자신은 없었다.


공부로 핑계를 댄 덕분에 성적이 드라마틱하게 올랐다. 어떤 고등학교든 이 친구들과 뿔뿔이 흩어지게만 해 달라고 기도했다. 나만 다른 학교로 가기보다는, 친구들 모두 각자도생의 길을 가는 것이 서로에게 유익할 것 같았다.


당시에는 고등학교를 3 지망까지 기재한 후 임의로 배정받는 제도였는데, 나와 같은 학교를 지망한 친구들이 있었음에도 우리는 전부 다른 학교로 진학하게 되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셨다는 확신이 들었다.


나름대로 입시생이라고 마음 기댈 곳이 필요했는지, 아니면 내 전부와도 같았던 친구관계에 대한 회의감으로 마음이 헛헛했는지 나는 중학교 3학년 때부터 다시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엄마는 나를 임신했을 때부터 교회를 다녔다는데 이제는 엄마의 몸에서 분리되었으니 천국에 묻어갈 순 없었다. 무엇보다도 내 마음부터가 천국이 아니었다. 내 삶이 나아지기 위한 방향으로 움직이고는 있었지만 여전히 방황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던 겨울방학, 크리스마스마스 이브, 버스 안에서 내다보았던 내 또래의 학생들. 누가 시키지 않았을 자발적 미소로 사람들을 맞이하던 그 모습. 그 모습이 잊히지 않았다. 나도 이왕 교회에 다니는 거 엄마 손에 이끌려서가 아니라 즐겁게 다니고 싶었다. 자발적 미소의 이유가 궁금했다. 하나님을 만나고 싶었다.


마음속에 이런 소망이 피어난 후 새해 첫 주일,   주보에 기재된 고등부 예배 장소를 기억했다.

가장 이른 시간에 시작되는 고등부 예배. 엄마는 평소 11시 본예배도 꾸물거리며 참석하던 내가, 그 시간에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을 것이라 했다. 엄마를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지만 나는 소풍 가는 날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기상했다.


어른들만 가득한 본예배에 참석할 때와는 다른 기분이었다. 그때는 그저 교회에 출석도장을 찍으러 가는 기분이었는데, 이제는 정말로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것 같았다. 진짜 예배를 드리러 가는 길이었다. 그날따라 수북하게 쌓인 눈 위에 믿음의 발자국을 남기며 나는 기도했다.


"하나님, 저와 함께 해 주세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은 나를 떠난 적이 없다.

보통 새 신자는 인도자가 있게 마련인데, 나는 혼자였다. 그러나 혼자가 아니었다.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셨다. 하나님이 내게 찾아오셨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