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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Dec 17. 2024

엄마를 따라 죽겠다는 딸에게

사명을 다해야만 삶이 끝나는 거라고


네 식구가 잠자리에 들었다. 나란히 누워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죽음에 대해 말하게 되었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죽는 존재라는 걸 아이들도 알고는 있었다. 왕할머니의 장례식장에도 다녀온 적 있고, 왕할머니는 천국에 먼저 가 계시다는 것도 인지하고 있었다. 우리도 나중엔 모두가 천국에서 만날 것이라고 종종 이야기했다. 천국은 어떤 곳일까 함께 상상해보기도 했다. 그런데 어둠 속에서 나눈 대화라서 그랬을까. 딸이 와락 나를 안으며 말했다.


"엄마 죽지 마! 엄마 죽으면 나도 따라서 죽을 거야!"


그 순간 아이의 마음을 사로잡은 두려움에 대해 생각했다. 나도 느껴본 적 있는 두려움이었다. 순간 삼십 년 전 어린아이였던 시절돌아갔다. 엄마가 내 세상의 전부였던 때가 있었다. 사춘기 때 죽고 못 살던 친구가 생기기도 전이었고, 엄마의 에서 떨어져 나온 지 채 십 년도 되지 않은 나이였다. 밥 먹을 때, 씻을 때, 아플 때, 화장실에서 볼일을 볼 때조차 엄마의 손길을 빌려야 했던 어린 시절에서 겨우 벗어나고 있던 때였다.


지금은 나만의 생활방식이 생겼고 엄마의 도움이 없이도 살아가고 있지만, 어린 날의 정서에 엄마는 법이었고 답이었다. 없어선 안될 존재였다. 내 세계의 전부였다. 그런 엄마가 먼저 죽는다는 생각을 하면 땅이 꺼지고 세계가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냥 상상만 해보았을 뿐인데도 나를 휘감던 그 두려움이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난다.


세상에, 내 아이가 지금 그런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니. 이것은 죽음이라는 개념을 알고 모르는 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아이의 세계에 대해 그것이 망가질 수도 있다는 예언을 하는 셈이었다. 물론 정말로, 내 의도와는 관계없이 언젠가 그것이 무너져버리는 순간이 올 수도 있겠지만 아이가 그 순간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욱 중요했다. 그러나 이 또한 나의 영역은 아닐 것이다. 나는 아직 그러한 상실을 경험해 본 적 없고 상상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상상만 해도 아픈 무너짐의 순간에 대해 이토록 가볍게 얘기할 수 있는 것일까.


물론 죽음에 대한 관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담담하게 대화할 수 있는 주제가 되기도 할 것이다. 죽음이란 소풍과 같다는 말도 있듯이. 나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사건을 믿으며 천국이라는 내세의 존재와 구원의 확신을 얻었지만, 이 땅에 있는 소중한 사람과의 이별은 분명 비통한 일이다. 이곳에서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종료된 것이므로. 이런 점에서 자신도 따라 죽겠다는 어린 딸의 선언은 진실된 비명이었다. 누가 먼저 갈 것인지, 언제가 될지,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얼마나 걸릴지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지만 애도의 시간을 거친 후에는 우리에게 무엇이 남을까. 추억? 그것만으로는 어쩐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말하길 사명이 다해야 죽는다고 했다. 사명이란 맡겨진 임무인데, 그것을 누가 맡겼느냐 혹은 맡긴 가 데려가는 것이냐, 그게 대관절 무슨 사명이며 왜 그런 사명을 맡기고 데려가는 것이냐 묻는다면 나는 할 말이 없다. 내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그 말을 들었을 때 좀 더 설득이 되었을 뿐이다. 나의 부모가, 내가 혹은 아이가 먼저 이 세상을 떠날 때 무엇이 가장 나를 납득시킬 수 있을 것인가 생각하면 각자의 사명을 다했다는 것만이 그의 인생을 빛내줄 수 있는 말이라 여겼다. 심지어는 태어나지 못한 생명이라 할지라도, 아주 잠시라도 이 땅에 왔다 간 존재에 대한 지극한 표현이라고.



《내가 듣고 싶던 말, 네게 하고 싶은 말》


"세상엔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벌어지는 일들이 아주 많아. 태어나는 것부터 살아가는 과정과 죽음까지도. 엄마는 사명을 다해야만 삶이 끝난다는 말을 믿어. 살다 보면 좋은 날이 오겠지 라는 막연한 희망의 말보다는. 사실 좋은 날보다 그렇지 않은 날이 더 많을지도 모르거든. 좋다는 것도 상대적인 거야. 이 사람에게 좋은 것이 꼭 나에게 좋은 건 아닐 수도 있어. 나의 사명을 발견하기 위해선 다른 사람들보다 고통을 더 많이 겪어야 할 수도 있지. 물론 그렇지 않을 수도 있고. 내가 어떤 사람인가, 내 삶의 사명은 무엇인가에 따라 얼마든 달라질 수도 있다고 생각해.


어떤 사람은 그 사명을 깨닫고 살 수도 있지만, 또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 그리고 사명을 깨달았다고 해서 모두가 그것을 이룰 수 있는 건 아니야. 사는 동안 깨닫지 못한 그의 사명을 누군가 대신 발견해 줄 수도 있지. 그의 죽음이 누군가의 삶에 의미를 더했다면 그것만으로도 그는 사명을 다했다고 할 수 있을 거야. 그러니 꼭 기억하렴. 삶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조차도 사명이 아직 남아있는 한 생명은 이어지는 거라고.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사명을 이뤄가고 있는 거라고. 그리고 어느 순간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해도 우리는 사명을 다한 것뿐이겠지. 그 사명이 무엇인지는 남아있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동안 정해줄 거야. 물론 우리도 천국에 가면 알게 되겠지만. 그때가 언제일지는 우리 알 수 없으니, 감사하게 오늘을 살자. 사명이라고 해서 꼭 무겁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지. 내게 주신 것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 그게 오늘 하루 너의 사명일 거야."


* 사진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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