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다!"
첫눈이 쏟아진 날, 아이들은 기뻐했다. 아이들은 눈 오는 걸 좋아한다. 기상 악화니, 교통 체증이니 그런 거엔 당연히 관심이 없다. 애들이니까.
나는 어릴 적부터 겨울이 싫었다. 온 가족이 웅크리고 살아야 하는 겨울이. 모두가 웅크리고 살아가던 그 겨울에도 엄마는 더 지독한 추위 속으로 가장 먼저 몸을 던져냈다. 밥을 하고 설거지를 하고 목욕물을 데우기 위해. 코를 찡긋하면 근육이 아주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가는 느낌을, 집안에서도 입김이 나오는 기이한 풍경을 알고 있다.
아무리 전기장판을 최고 온도로 올려놓아도 공기까지 따뜻하게 할 순 없었다. 밤새 덥힌 이불속을 벗어나 아침마다 차가운 공기 속으로 나가는 덴 몇 배의 의지가 필요했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는 세수하고 양치하고 머리 감고 밥 먹고 옷을 갈아입는 평범한 외출 준비조차도 온몸에 힘이 들어가는 일이었다. 매일 맞이하는 아침이 매번 낯설었다.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겨울 아침의 공기.
어릴 때부터 달고 살던 수족냉증은 출산 후에야 나아졌다. 출산을 계기로 옮긴 집은 오래되었지만 난방효과가 좋은 아파트였다. 아파트라고 다 따뜻한 것은 아니겠으나 이사 온 집은 특히 더 따뜻했다. 놀러 온 사람마다 한 마디씩 할 정도로. 그 집에서 지금껏 살고 있다. 별일이 없는 한 이곳에서 오래오래 살 것이다.
어릴 적부터 아파트에 살고 싶다고 생각했던 건 순전히 난방 때문이었다. 엄마는 우리 집이 주택이라서 춥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맞는 말이었지만, 보일러를 트는 것에 엄마가 유난히 인색한 탓도 있었다. 마음껏 보일러를 틀고 살 수 없는 이유를 일찍이 알고 있었다.
그보다 더 오래전, 내가 태어나고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 자랐던 집에서는 연탄을 때고 살았다. 아궁이와 맞닿은 곳에서 샤워를 했고, 그때마다 목욕물을 큰 양푼에 데워서 나르던 젊은 엄마를 기억한다. 그 집에서 우리를 씻긴 물로 목욕하고 빨래까지 하던 엄마, 다른 집에선 외출하고 돌아온 내게 미리 덥혀둔 전기장판의 따뜻한 자리를 내주던 엄마, 수족냉증으로 늘 찼던 나의 손발을 꼭 감싸주던 난로 같은 엄마의 손길을 기억한다.
눈놀이를 하던 즐거운 기억보다도, 지긋지긋한 추위 속 지난한 생활이 떠오른다. 집 안에서까지 몸서리치게 느껴야 했던 겨울이 커서도 그리 반갑진 않지만, 아이의 마음에 내려앉은 눈은 아직 차가운 것만은 아닌 것 같아서 다행이다. 그러면서도 지금 내 마음 한쪽이 시린 이유를 아이가 모르고 살지는 않길 바란다. 몸을 충분히 녹일 만큼 따뜻한 집이 없다면 겨울은, 그리고 눈은 누군가에게 고통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반대로 아무리 추운 날을 맞이하더라도, 따뜻한 온기를 전해주는 손길이 있다면 그것을 견디고 살아갈 수도 있다는 것을.
그러니 익숙해 보여도 도무지 익숙해질 수 없는 추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중 한 명에게라도 기꺼이 손길을 내미는 사람이 되기를, 되어주기를. 그러기 위해선 얼마간 그 추위를 겪어봐야 한다면 너 역시 그것을 견뎌주기를. 늘 너에게 힘이 되어주길 원하지만, 오롯이 홀로서야 하는 시간 속에서도 기억해 주기를. 엄마마저 그저 딛고 넘어가는 징검다리 중 하나로만 여겨질 때조차도, 너의 발 밑에는 엄마의 눈물도 함께 흐르고 있다는 것을.
《내가 듣고 싶던 말, 네게 하고 싶은 말》
"추운 바람이 부는 계절에 엄마는 생각해. 시린 마음을. 매서운 바람을 막아낼 창문이 없는 사람들을. 차라리 동면을 취하는 동물들이 나을지도 몰라. 추위 속에서도 마음껏 웅크리지도 못한 채 살아가기 위해 움직여야 하는 사람들, 먹고살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있어. 먹여 살려야 하는 존재를 위해 추위 속으로 몸을 내던지는 사람들.
눈을 맞으며, 겨울냄새를 맡으며 잠시 낭만과 감상에 젖어보는 것도 좋아. 계절을 만끽하는 것도 그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는 거니까. 하지만 너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으면 해. 첫눈을 소망하기 전에, 내가 두 팔 벌려 기다리는 첫눈이 모두에게 따뜻한 의미로 다가갈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 있다면 좋겠어. 빙판길에서 신나게 노는 아이들을 보며 흐뭇해하는 마음을 지녔으면서도, 빙판길에 미끄러져 다치는 어르신들이 없길 바라는 마음을 지닌 사람이 되면 좋겠어.
너는 어떨 때 따뜻함을 느껴? 지금은 엄마가 너의 창문이 되어주고 있지만,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동안에는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피할 수 없을 때가 올 거야. 그때는 잠시 웅크리고 있으렴. 견뎌야만 하는 때, 견디기만 하면 되는 때도 있는 거니까. 네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것밖에 없을 때, 몸은 춥더라도 너의 마음을 녹여줄 따뜻한 기억들을 많이 심어주고 싶어. 지금은 엄마 품에 폭 안기는 작은 네가, 점점 자라서 언젠가는 따스한 엄마 품도 그저 추억이 되겠지만, 이 품 안에서 느꼈던 따스함을 언제고 기억해 주길 바라. 기억하지 못해도 좋아. 네가 누군가에게 너의 품을 내어줄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은 사랑의 대물림이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