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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May 15. 2024

찬란한 찰나의 믿음


"어떻게 연기를 하게 되셨어요?"


무명의 극단 출신 연기자에게 인터뷰어가 자주 하는 질문이 있다. 부모님의 반대는 없었냐는 단골 질문이 따라온다. 배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길을 선택하고 걸어온 여정을 풀어놓는다.


나는 이런 보통의 인터뷰 방식이 좋다. 사람마다 이야기가 다른데도 그 불확실한 길 앞에서 자신의 선택을 믿었던 그 순간은 똑같이 찬란하다. 그리고 그때를 이야기하는 그들의 얼굴은 화면을 넘어서 내 앞에 나타난다. 나는 그들을 마주할 때마다 나를 마주한다. 나는 왜 나를 믿어주지 못했을까.


어느 길에 다다르기까지 커다란 확신으로 들어선 사람은 몇 없을 것이다. 매일이 힘찬 발걸음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은 그저 하루하루 열심히 하다 보니 되었다고 말한다. 그래도 '하고 싶은 방향으로'(받아쓰기 매거진 <취향의 몰락> 참고), 자신의 취향을 따라 열심을 낼 수 있었던 것은 자신에 대한 한 줌의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 길에 들어설 수 있었던, 계속 갈 수 있었던, 벗어나지 않을 수 있었던 찰나의 순간은 있었을 것이다.


애석하게도 내겐 그 찰나의 순간이 없다. 아주 가끔 글쓰기 대회에서 상을 탔을 때 받았던 칭찬은 고무적이었지만, 그 찰나의 순간은 되지 못했다. 그것을 포착하는 카메라가 내 마음에는 없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고장 났거나. 예컨대 셔터를 눌렀지만 찍어야 할 빛나는 순간은 찍지 못하고 흔들리는 순간만 담아낸 카메라처럼. 그러나 내 카메라는 고장 나지 않았다. 어머니의 흔들렸던 눈빛이 아직도 이토록 선명한 것을 보면.


어머니는 아무 말없이 나를 바라볼 때가 많았다. 어떻게 그리 오래 나만을 바라보고 있을 수 있는지, 필경 나를 보며 상념에 잠기신 게 분명했다. 그런 어머니의 눈빛에는 사랑도 있었고, 걱정과 근심도 있었다. 나는 어머니의 사랑을 받기 위해 그 눈동자에 기꺼이 나를 담아내었다. 그러다가 어머니의 눈빛에 스위치가 꺼진 것처럼, 근심과 걱정의 그림자가 드리워질 때 나도 같이 꺼지는 기분이 들었다. 마치 그 눈동자에 담긴 내가 어둠에 갇히는 것 같았다.


사랑과 믿음은 다른 걸까. 그 대상이 신이라면 사랑과 믿음은 같은 말일 수 있다. 그러나 보잘것없는 아이의 숨겨진 가능성을 믿어주기란 그보다 어려운 일인 것일까. 자녀를 통해 부모의 소욕을 채우기 위한 믿음은 위험하지만, 자녀를 향한 부모의 나약한 믿음도 애석하기만 하다.


음악을 반대하는 부모님을 설득하기 위해 전교 1등을 했다는 어느 동생만큼 무언가를 원해도 간절히 원한 적 없다. 자기 확신을 갖고 확실하게 설득해 본 적 없다. 꺼져가는 어머니의 눈빛에 나 역시 무력하게 꺼져갔으니 부모님이 믿음을 거두신대도 할 말 없는 입장이 되었다.


어머니의 꺼져가는 눈빛은 나를 향한 믿음이 나약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나의 어떤 재능과 됨됨이가 누군가에게 확신을 주기에는 부족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자기 확신을 갖기까지는, 나를 믿어주는 타인의 믿음이 필요하다. 그것은 불이 타오르기 위한 찰나의 불꽃이다. 그것은 누군가에게는 따뜻한 말 한마디, 확신에 찬 눈빛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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