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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Jul 08. 2024

'쉬었음'이 '죽었음'이 되지 않게 하려면

고립, 은둔형 청년들에 대해


"왜~앵"

모기 소리에 잠을 깼다. 그러나 귀찮아서 다시 잤다. 일어나 보니 아들은 한 방, 딸은 네 방이나 물렸다! 다시 잠들면서 염려했던 부분이지만 이렇게나 처참하게 당하다니... 분하다. 모기는 원래부터 하등 쓸모없는 존재다. 그런 존재에게 여지를 허락한 나에게 분하다. '모기를 즉시 퇴치하지 않은' 나의 행위로 인해 애꿎은 아이들이 고통을 당했다. 마음이 무겁다.




개월 또는  년을 '쉬었음'으로 소개되는 청년들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2024년 4월, 통계청 기준으로 39세까지의 청년 중 '쉬었음'으로 분류되는 청년은 70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나도 나이로는 청년의 범주에 들어가고, '휴학'을 했었고, 현재 '휴직'중이지만 여기서 다루는 '쉬었음'은 그 무게가 달랐다. 다른 사회활동을 하며 재충전의 시간을 보내는 이들도 있었지만, 점점 '쉬었음'의 시간이 길어지는 고립-은둔형 청년들이 있었다.


인터뷰 대상 중에는 방문을 굳게 닫고 얼굴도 마주하지 않은 채로 생활하는 아들과 어머니가 있었다. 물론 인터뷰는 어머니만 참여했다. 아들이 언급될 때는 굳게 닫힌 방문이 클로즈업되었다. 고립된 청년의 삶도, 그를 지원하기 위해 밤낮으로 일하는 어머니의 삶도 너무나 애달팠고 고달팠다. 그 삶을 들여다보며 마음이 아팠다. 어머니는 퇴근 후 그의 흔적을 치우며 식사 여부를 확인할 뿐이다. 한 번씩 카톡으로 대화를 하지만 그마저도 뜸하다. 한 집에 살면서 얼굴도 못 보고 산다니, 얼마나 보고 싶을까. 얼마나 걱정이 될까. 거울을 뒤집어놓았던 다른 청년처럼, 그 아들도 자신의 모습을 누구에게도 보이기 싫은 걸까. 아들이 모든 것을 포기할까 봐, 그것이 가장 무섭다는 어머니는 차마 먼저 방문을 열어젖히지도 못한 채 아들이 나오길 기다릴 뿐이다.


'쉬었음' 청년들을 보며, 무겁게 가라앉은 마음을 꺼내 무엇이라도 쓰고 싶었지만 건져 내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아주 오래전의 일이지만 내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속의 바위처럼 무겁게 가라앉은 마음이 몇 번이나 들썩였다. 그 위로 부유하는 찌꺼기 같은 기억과 감정이 있었다. 그것들을 천천히 길어 올리고 한 데 모아 조심스레 활자로 옮겨본다.




우울과 무기력에 젖은 솜처럼 바닥과 하나가 되어 내리 잠만 자던 시간이 있었다. 내 방도 허름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문을 열면 보이는 쓰레기 같은 짐짝들과 거실, 주방, 그리고 늙은 어머니와 아버지를 마주하는 것이 버거워서 문을 꼭 닫고 지냈다. 그 닫은 문 너머에서 나는 많이 울었다. 용기를 내어, 또는 할 수 없이, 겨우겨우 나갈 채비를 마치고서도 낡은 신발장 앞에서 주저앉아 울던 날이 선명하게 기억난다. 나는 늘 도망치듯 집에서 나왔고, 도망치듯 집으로 들어갔다. 딱히 지은 죄도 없이 쫓기고 숨어 사는 조마조마한 시절이었다. 그곳은 나의 은둔처였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나를 둘러싼 사회적 관계망이 두터웠다는 것이다. 내 고향을 돌아보기 싫어하면서도 고마운 마음이 드는 이유다. 나를 어릴 적부터 지켜봐 왔던 소중한 고향 친구들과 선배들이 이렇게 저렇게 나를 불러주었고, 기다려주었다. 그 시절 내 가슴을 가장 철렁하게 하는 건 다름 아닌 전화기 소리였다. 전화기가 울리는 게 무서워서 무음으로 해두거나 아예 꺼두었다. 툭하면 단톡방을 나가고 전화기를 꺼놓는 나를 비난하거나 욕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그들을 이해한다), 걱정하는 메시지를 남겨놓은 사람들이 있었다. 당시에는 그 관심마저 부담스러웠으나 어쩌면 나는 꾸역꾸역 그것을 먹고살았는지 모른다.


어쩌다가 그 터널에서 나오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사랑에 빚진 자로서 그에 부응하여 움직이다 보니, 우연히 마주하게 된 햇살과 가을날의 공기가 기억날 뿐이다. 내가 추구하던 기준과 모든 이상이 허상이었다는 것을 깨닫고선 하나씩 다시 쌓아 올리는 시간이 있었다.


걸음마하듯 다시 세상을 향해 나아갈 때쯤 나는 성실의 아이콘인 남편을 만났고, 남편과 한집에 살면서는 결코 혼자일 수 없었다. 혼자가 아니었기도 했지만 혼자를 주장할 수도 없었다. 싸우더라도 해가 지기 전에는 반드시 풀어야 하는 남편 덕분에 방문을 걸어 잠그는 일은 결코 허용되지 않았다. 처음 만나던 날, 지하 이십 층에 있는 것 같은 나를 지상으로 끌어올려주고 싶다던 남편의 각오는 헛되지 않았다. 그리고 태어나던 순간부터 나를 바삐 움직이게 하는, 작고 여린 생명들이 내 곁에 있다.


결국 사랑이었다. 방문 걸어 잠근 나를 지나치지 않고 끊임없이 노크하며 기다려주었던 사람들의 사랑이 있었다. 지하 20층에서 21층까지 땅굴을 파고 내려가는 동안, 지상에서 아래로 아래로 부러 내려와 나를 끌어올려주던 사랑이 있었다. 내 이름을 불러주던 그 음성이 있었다. 너무나 고요하던 나의 동굴 속에 울려 퍼지던 메아리가 있었다.




해당 영상에는 1.4만 개의 댓글이 달렸다. 댓글에는 위로와 격려의 글이 가득했다. 나도 그런 시간을 보냈노라고 고백하며 영상 속 은둔 청년들을 위로하는 댓글에는 칭찬과 응원의 대댓글이 달렸다. 사랑이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이들이 댓글을 통해 위로를, 격려를, 칭찬과 응원의 사랑을 건네고 있었다. 그 댓글들을 보며 감히 내가 위로를 받아버렸다.


'쉬었음'으로 분류되는 청년들은 사실 쉬고 있지 못하다. 자신을 이런저런 모양으로 판단할 세상으로부터 숨느라, 실체 없는 대상에게 쫓기느라 그 마음은 쉬질 못한다. 오히려 끊임없이 자신을 미워하느라 바쁘다. 자신마저 스스로를 한심하게 여긴 나머지 자기혐오에 빠지고, '죽었음'으로 분류되는 청년들의 숫자도 늘어나고 있다. 출산율이 낮은 것보다 청년 자살률이 높은 것이 더 큰 문제다. 새 생명이 탄생되기도 전에 너무나 많은 청년들의 생명이 꺼져간다. 둘 다 세계 최저, 세계 최고 순위를 기록하고 있다는 건 정말로 비극이다.


'쉬었음'이 '죽었음'이 되지 않게 하려면 결국 사랑이어야 한다.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단어를 입에 올리고 싶지 않았지만, 은둔형 청년들의 마음속엔 충분히 많이 떠오르는 단어일 것이다. 은둔과 고립을 선택한 그들 곁에는 가족과 몇몇 친구만이 남아있을 것이다. 심지어는 그들의 손길마저도 닿지 않은 채 스러져가는 젊음도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가 닿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온라인상의 콘텐츠와 댓글뿐일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내가 시청했던 다큐멘터리 영상과 그에 달린 댓글들에 감사하다. 온라인에 떠도는 몇 글자일지라도 사랑의 마음을 담은 글이 그들에게 가 닿기를 바란다. 그 바람으로 이 글을 쓴다.


그리고 혹시라도 이 글을 볼지 모르는 고립-은둔형 청년 분들에게, 그리고 그 시절의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모든 것은 허상이라고. 진실한 것은 이 순간 숨을 쉬고 있는 당신의 존재라고. 그리고 당신이 내디딜 한 발자국을 숨죽여 바라고 있는 당신의 사람들이 있다고. 그것은 사랑이라고.



*참고 영상

추적 60분 1368회 《‘쉬었음’ 청년 70만, 저는 낙오자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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