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쉐어 운영 5년 차, 카드 두 장과 모더레이터가 남았네.
아버지는 내가 배우가 되길 원하셨다. 어린 시절 연극영화과를 다니셨지만, 끝내 이루지 못한 자신의 꿈을 내가 펼치길 바라셨다. 하지만 시키면 오히려 더 하기 싫은 것이 있는지, 나는 영화를 좋아하면서도 내가 감히 배우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않았다. 스크린을 사로잡는, 뮤지컬 위의 무대를 활보하는 배우들을 보며 내 안에 예능인의 끼는 없다고 생각했다. 잠시 흔들리다가도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을 고쳐맸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나는 춤과 꽃을 참 좋아하는 9살 초등학생이었다. 끼가 많았던 어린 시절이었지만 십대를 거치며 대부분 사라졌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과장된 남성성이 강함의 상징이었던, 1998-2002년 부산에서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그곳에서 내 안에 감수성은 꼭꼭 감춰야하는 간첩이었다.
음악을 몰래 듣고, 소설 책을 가방 깊숙히 감추고 다녔다. 학교를 통틀어 유일하게 밴드 콘서트 장에 가는 남자 중학생이었고, 멜로 영화를 좋아하는 친구들과는 일부로 버스로 1시간 거리를 달려 남의 동네에서 영화를 보곤했다. 이런 영화를 본다는게 또래 친구들에게 걸리면 모든 것이 끝장이었다. 우리는 007 첩보 영화의 한장면 처럼 몰래 영화를 보고, 책(원작)보다는 못한 영화에 실망해서 투덜투덜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웃긴 건 그 친구들도 겉으로는 모두 운동이나 싸움 꽤나 잘하는 이미지들이었기 때문에, 동네로 돌아오자 마자 자신의 본캐릭터로 빠르게 돌아와야만 했다. (마, 남자 아이가~)
그렇게 나는 스스로를 드라내는 것보다 감추는데 최선을 다해 적응했다. 사춘기 시절 우는 법도 몰라, 일부로 콘서트 장에서 열심히 뛰며 땀과 함께 몰래 눈물을 흘렸다. 표현을 못하니 당연히 내게 감정을 드러내고, 남 앞에서 무언가 연기할 자질은 당연히 없다 생각했다.
그래도 예술적 기질은 어느정도 가졌는지, 졸업 후 기획 일을 택했다. 광고회사에서 이벤트 마케팅 일을 하고, 음악 반기획사에서 뮤지션들과 같이 앨범을 만들었다. 그 일에는 분명 감동이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일은 매우 고되었다. 내 안에 감동은 스치듯 지나가고, 대부분은 하드코어한 환경에서 야근을 하고 철야를 하며 버텨내는 일들이었다.
나를 표현하는 일은 여전히 내 안에 누구도 알지 못하게 흘리는 눈물이었다. 30살이 넘어서도 더 강인하지 못한 나를 탓했고, 여전히 여린 나에게 실망을 했다.
그런 내가 처음으로 내 속 이야기를 한게 한국을 찾은 낯선 외국인과의 '라이프쉐어'다. 이건 술먹고 부리는 투정이나, 어리광이 아니었다. 진짜 내 이야기를 했다. 어떤 벽에 가로 막혀있는지, 왜 힘든지, 내 감정은 지금 어떤 지, 무엇을 쫓아왔는지 등등이었다. 주고 받는 질문에 이상하리 만큼 몰입되었고, 진솔했다.
그리고 대화 중에 상대방도 나와 같은 것을 느끼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서로의 마음은 동했고, 내 가슴에 오래 쌓여있던 매듭은 저절로 스르륵 풀려버렸다. 지구 반대편에서 온 이 친구가 나와 같은 고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위안이 되기도, 용기가 되기도 했다.
라이프쉐어에 첫 경험이었다. 이 모든 것은 라이브(live)였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순간이었다. 마치 연극처럼.
내가 좋은 걸 남도 경험하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억압 받았던 모든 것을 해체하고 싶었다. 그래야 우린 누리 삶에 배우가 되고 작가가 되어 진짜 내 이야기를 할 수 있으리라. 마치 낯선 외국인과 대화하듯 자유롭고, 안전하게 말이다. 나는 이 분위기를 이끌어주고, 판을 잘 깔아주는 역할이 '모더레이터(moderator)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앞으로 이 시리즈에서는 4년 동안 라이프쉐어 현장을 운영하며 쌓이게 된 모더레이터로서의 생각, 철학, 방법론, 사례 등을 연재해 나가려고 한다.
한 명의 강연자나 경영자의 이야기를 일반적으로 듣는 시대가 아닌, 모두가 각자의 이야기가 있는 이 시대. 서로의 이야기를 잘 이끌어내주고, 교류하게 해주는 모더레이터가 점점 더 많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회사, 브랜드, 커뮤니티, 마을, 가족, 연인, 친구. 그리고 나와 나 사이에서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