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언제부터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언젠가부터 그림을 보기 시작했다. 그림 속 인물들을 따라가게 되는 내가 있었다. 화가에 대해서. 그림의 배경에 대해서. 그것이 가진 다양한 해석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한다. 아티스트도 아니고 그림 전문가가 아니며 그렇다고 그림에 대한 애호가도 아니었던 나였으니. 그렇지만 잘 알지 못하기에 오히려 자유롭게 마음을 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야말로 제멋대로 그렇지만 느낀 그대로.
그림을 바라보는 '나'는 어느새 그림에 기대고 있었다. 오늘이라는 시간을 현재라는 멈춤 없이 흐르는 순간들을 보다 매끄럽게 돌파해낼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얻고 싶어서. 존 콜리어의 '고디바 부인'과 찰스 윌리엄 미첼의 '히파티아',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의 '판도라'에서부터 에드워드 호퍼의 '아침의 태양', 뭉크의 '마돈나'와 존 윌리엄 고드워드의 '러브레터'에 이르기까지. 명화 속 마주한 그녀들과 화폭에 담긴 풍경들이 무언가 말을 거는 것 같을 때. 그리하여 나로 하여금 키보드 자판 위에 열 손가락을 지그시 올려 기어코 쓰게 만드는 순간.
나는 오늘도 하나의 그림 앞에서 멈춘다. 멈추게 만드는 그림을 바라보며 마음을 쓰기 시작한다. 시선은 고정되고 마음은 빼앗긴 채. 생각은 연신 날아든다. 소실되어가는 내면의 언어와 궤도에서 이탈된 감정. 잃어버린 영혼과 상처 입은 마음일지라도. 의심하고 주저했던 어제와 오늘이지만 결국 희망하게 만드는 내일과 기대하고 싶게 만드는 언젠가가 있을 것이라는 스스로의 약속을 지닌 채로. 흘러간 어제, 지나가는 오늘, 다가올 내일을 떠올리며 그림에 기대던 밤.
그림을 보며 마음을 쓰기 시작한다.
달콤한 게으름에 취한 채로.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