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러진 날개로도 날 수 있는 이유

Artemisia Gentileschi

by 헤븐

요 근래, 면접을 보았었다. 전혀 다른 커리어 필드지만 그렇기에 장단도 확실히 있는. 한 곳은 이미 합격했고 고용계약서 대기 중이며 한 곳은 최종 임원 면접 대기 중인 상태이다. 후자의 '커리어' 가 조금 더 애정과 마음이 갔던 나로서는 한편 그것이 순진한 기대였다는 실망감을 적잖게 앉겨 주었다. 어떤 문장을 듣게 되었을 때. '여자라서 고민' 이라는. 기타 그런 '여직원' 을 대하는 앞뒤 다른 그들의 속내에 대해서 상상해보며. 인사 권한을 지닌 누군가가 그저 큰 의미 없이 흘려 한 언사라 한다지만 아무튼 '여자'와 '약자' 라는 단어가 선명하게 귀에 들어왔을 때. 나는 무언의 분함을 느끼고 말았다. 불쾌한 기분은 둘째치고 무언가 아쉬웠다. 무언가 정말 아쉽고 또한 실망스러웠다. 고루한 변명 혹은 핑곗거리를 터진 입으로 잘 둘러대는 책임자들이 있는 곳이라면 굳이 '일' 이 좋더라도, 소중한 나의 에너지를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마저 하게 되면서. 잠시의 기대와 들뜬 마음은 조금씩 가라앉으려 했다. 일상을 유지하면서도 내내 생각이 떨쳐지지 못했던 건 왜 였을까. 여자라는 성별은 부러진 날개와 비슷한걸까. 그것이 때때로 큰 무기가 되어 줄 것이라고 믿었던 건 나만의 순진한 착각이었을지. 곧 다다를 면접장 앞에서 나는 웃으며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할까. 스스로도 기대가 된다. 나 조차도 예상할 수 없는 내일의 '나' 라서...



양파 6개와 바나나 한 다발, 주먹 만한 사과 9개와 딸기 한 팩, 표고버섯 한 봉지와 큼직한 양배추 반 통, 그리고 1.8리터 우유가 담긴 장바구니들을 각각 양쪽 어깨에 메고 청과물 가게에서 집으로 귀가하고 있던 중이었다. 일반적으론 무겁다는 생각이 들어야 했을 터인데 평소와는 달리 어찌 된 영문인지 나도 모르는 새에 집 앞까지 도착해 있었다. 어깨를 짓누르는 장바구니의 무거움이나 정면으로 맞이하던 찬 바람조차 '힘들다'는 의식적인 감정을 느끼지 못하게 했다는 건 어쩌면 그것을 능가하는 다른 버전의 무언가가 있었다는 것일 게다. 다른 생각은 할 수 없게 만드는 또 다른 생각. 그것은 문장이 되어 기어코 한 인간의 머리와 마음에 파고든다. 나는 나로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 정녕 원하는 삶의 방향으로 현재 흐르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대로 움직이고 있는지...



'부러진 날개를 달고 나는 법을 배워라'



11월의 마지막 밤, 여간 잠이 오지 않아서 읽히지 않은 책을 움켜쥔 채 드라마를 보던 때였다. 인물의 대사 하나가 마음에 각인되었다. 꽤 오랫동안. 그리고 떠올렸다. 아주 오래전 비틀스의 그 노래를. 아마도 비슷한 결을 지닌 문장 때문이었을 터. "검은 새가 한밤중에 울고 있다, 부러진 날개로 나는 법을 연습하며. 평생을 거쳐, 넌 오직 날아오르는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지." (Blackbird singing in the dead of night , Take these broken wings and learn to fly. All your life, You were only waiting for this moment to arise (Beatles, Blackbird 中))



부러진 날개를 가진 새라도 모두가 같은 마음은 아닐 테다. 날개가 부러진 이유를 생각하며 스스로 원치 않은 환경적 불편함에 갇힌 채 절망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는 새. 반면 부러진 날개를 지녔다는 것에 통렬한 분함을 느끼면서 그 분노를 동력 삼아 어떻게 해서든 날아오르려는 새. 후자는 하늘을 노려볼지 모른다. 그리곤 그야말로 있는 힘을 쥐어짜 내서 나는 법을 배우려 기를 쓸 테다. 그리하여 그 새는 어떻게 해서는 날갯짓을 펼칠 것이다. 그리곤 실제로 날아오르는 순간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물론 보통 새보다는 낮게, 좁게, 어설프게, 흔들리면서 아프게 난다 할지언정. 시작이 다르지만 그것이 틀린 건 아니니까. 목표는 같겠지만 그 목표를 향한 분투는 제각각인 것처럼.



@Artemisia Gentileschi, Self-Portrait as the Allegory of Painting, 1638–39, Royal Collection



부러진 날개를 가지고 나는 법을 배워서 끝까지 날아오르려 했던, 아니 그 누구보다도 확실하게 천공을 날아올랐다고 말할 수 있는 존재. 내게는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Artemisia Gentileschi)'가 확실히 그런 존재로 기억될 것만 같다. 그 어떤 그림보다도 확실한 잔혹성이 담긴 그녀의 '유디트'와 '자화상' 은 보는 내내 어떤 불굴의 의지와 더불어 여성이라는 한 인간이 지닌 고달픔을 뚫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가려는 화염 같은 열정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으니까. 여성이 화가로서 작품성을 인정받고 의뢰를 받기가 여간 쉽지 않았던 그 시대조차 그녀의 그림과 열정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려는 그 의지를 앗아가진 못했겠다. 메디치 가문을 비롯해 왕후 귀족으로부터 작품을 의뢰받아 제작하는 그녀의 자화상을 가만 보면 무언의 경건함과 존경심을 갖게 되고 만다. 붓과 팔레트를 들고 화판을 응시하는 한 인간의 모습은 여자 이전에 그 누구보다도 자신의 '일'을 사랑했던 한 '인간'이 표현되어 있으니. 진지한 눈매와 붓 끝과 그려지는 화폭을 향한 신실한 자세. 여성으로 태어나 그 여성성이 지닌 에로스 자본에 의지하지 않은 채 철저히 그저 자신이 열망하는 커리어 자체에 집중하는 모습.



굳이 페미니스트 라벨링을 해야 할까 싶지만 아무튼 서양 역사상 '최초'라는 수식어가 곧잘 따라붙고 마는 최초의 여성 화가인 그녀는 남성 중심 지배 사회에서 능동적인 자기 결정을 시도한 화가로 불린다. 그런데 역설적이지만 그의 극적이고 역동적인 여러 작품들이 탄생된 에너지의 원천이 만약 소녀시절의 강간 사건이 계기가 된 것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인생을 이해할 수 있을까. 빌어먹게 참담한 인생의 역설에 대해서. 18세가 되던 해 그녀는 아버지의 친구이자 미술 선생이었던 아고스티노 타시(Agostino Tassi, 1580-1644)에게 강간당한다. 그러나 그 시대, 여성에 대한 편견과 차등이 강하던 탓에 피해자였음에도 그로 인해 길고 고통스러운 재판을 치러야 했던 그녀는 재판 과정에서 치욕스러움을 뚫고 그럼에도 모두에게 선명한 자백을 몇 번이나 해야 했다. '사실이에요, 사실이어요, 사실이라고요! 라던. 그녀의 외침은 훗날 화폭에 담겨 보는 이로 하여금 한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어떤 통렬하고 강한 무언의 메시지로 다가오는 건 아닐지.



유디트.JPG @Judith Slaying Holofernes, 1614–1620, Galleria degli Uffizi, Florence



성경에 나오는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 일화가 그려진 여러 '유디트' 관련된 작품들은 무언가 대게는 보는 이로 하여금 관능적인 팜므파탈의 면모가 강조되곤 하는 반면에 젠틸레스키의 유디트는 빛과 어둠의 극명한 대비로 하여금 극적인 긴장감과 무언의 공포를 확실하게 자극한다. 어두운 밀실로 추정되는 공간엔 세 인물이 존재한다. 새하얀 시트가 덮혀진 평평한 침대 위의 누운 홀로페르네스의 목은 이미 긴 칼날이 관통된 채 검붉은 피를 선명하게 뿜어낸다. 그것을 정면으로 또렷하게 직시하는 여성과 그녀를 돕는 조력자의 모습을 통해 젠틸레스키는 무언의 의지를 표현하고자 했던 건 아니었을까. 여성은 '당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는' 존재일 수도 있다는 것.



이분법이 지배하던 그 서양의 구시대적 발상은 솔직히 말해서 아직도 여전히 유효한 것만 같다. 문화나 의식, 제도와 사회적 정책은 물론 달라지고 있다지만 아직까지도 '남자다움' 이라든지 '여자다움'과 같은 성별을 가르는 이분법적인 생각과 제국주의적 마인드가 우리에게 어떤 식으로든 남아 있는 이상. 그런 이들에게 그 옛날 젠틸레스키는 다시금 그녀가 재판장에서 말했던 자백처럼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나는 여자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줄 것입니다. 당신은 카이사르의 용기를 가진 한 여성의 영혼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1280px-Artemisia_Gentileschi_-_Sleeping_Venus.jfif @Venus and Cupid, c. 1625–1630, Virginia Museum of Fine Arts



누구보다도 능동적이고 강한 확신을 지닌 인간은 자신의 몸과 행동의 주도권이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아는 인물이다. 주체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으로 살려했던 젠틸레스키는 여성으로 태어나 비록 아픈 시간과 맞닥뜨려야 했지만 그랬기에 더더욱 남성 중심적이었던 그 시대의 역사와 종교가 지닌 주체의식의 위계를 확실하게 무너뜨리고자 했던 여성은 아니었을지. 그야말로 덜떨어진 후짐들에 대항하는 강인한 품위와 위엄을 보여주려는 듯. 그녀의 또 다른 작품인 '비너스와 큐피드'를 보면 여타 남성 화가들이 그렸던 '비너스'라는 여제가 지닌, 마치 관음과 타자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억지스러운 성적 매력을 발산하는 자세나 곡선과는 달리 젠틸레스키의 비너스는 그런 면에서 조금은 다르게 보인다. 그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은 채 눈을 감고 자신의 안위와 평온한 시간을 즐기는 비너스가 달리 비치는 이유는 어쩌면 화폭 속 인물을 바라보는 타자들을 위함이 아닌 그저 자기 자신으로서의 당당함, 그 누구에게도 함부로 굴복하지 않으려는 무언의 위엄과 아우라 덕분일지도.



부러진 날개로도 날려고 애쓰는 새는 아픔을 느끼고 만다. 그들은 지지 않으려 한다.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 그리하여 마침내 그들은 지지 않는다. 최소한 자기 자신에게만큼은. 비록 통증을 불러일으키는 기억과 뼈 아픈 고통을 감수해야 할지언정. 그럼에도 하늘을 날고자 하는 무의식적인 의지는 부러진 날개라는 결핍과 아픔을 각성제로 삼아 자신 조차 예견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로의 돌파구를 찾아 헤매게 만든다. 상처와 고통은 당연하다고 믿어온 생각에 균열을 일으키고 기존에 알던 모든 세계를 시험대 위에 올리게 된다. 삶은 그렇게 새롭게 정렬된다. 그리하여 부러진 날개는 더 이상 날아오르려는 새에게는 문제가 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미 변화하기 시작했을 테니까.



부러진 날개를 지녀도 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날고 싶다는 자신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바라는 것이다. 부디 내가 스스로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기를. 나의 언어를 찾고 그 언어를 발화하며 끝내 기록으로 '원한다'는 어떤 내면의 목소리를 외면하며 살지는 않겠노라고...그것이 참고만 있지 않으려는, 움직이는 자의 특권, 바로 자기 자신으로서의 자유일지도 모르니까.




#Source : Artemisia Gentileschi, Judith, Self-Portrait

https://en.wikipedia.org/wiki/Artemisia_Gentilesch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