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딜 수밖에

Walter Langley

by 헤븐

'인간은 결코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말할 수는 없는 존재'라던 프랑수아즈 사강의 문장을 기억한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 그녀의 문장들을 통해 내가 배운 건, 매우 복잡한 존재인 인간이란 무릇 절대 자신이 아닌 타자로 하여금 그 혹은 그녀의 모든 존재가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오직 자기 자신이 될 수밖에 없는 인간은 그리하여 자신 이외의 상대에게 그 무엇도 기대하거나 바라선 안 된다는 것. 기대에 어긋날 수밖에 없는 존재는 바로 내가 아닌 존재, 타자일 테니. 그러니 어찌 관계라는 것 앞에서 우리가 자유나 편안함을 원하고 또 얻을 수 있단 말일까. 지켜야 할 대상, 사랑하는 존재라면 더더욱 그러지 못하는 게 아닐지. 상처 입히지 않기 위해 기꺼이 자신이 상처 받을 걸 용감하게 감수하며 시작하는 대단히 위대하고도 아찔한 위험함이 도사리는 세계, 바로 사랑의 영역이 그렇지 않던가.



엉킨 감정의 실타래가 쉬이 풀리지 않을 것만 같은 시간이 지속되는 중이다. 천하의 아리아드네의 붉은 실이 양 손에 쥐어진다 할지언정 미궁을 빠져 나가기란 여간 수월치 않으며 시작된 붕괴엔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 것만 같다. 감정의 벽에 생긴 균열과 마음의 기둥은 기어코 쓰러졌고 나라는 공간은 기존의 형체를 알아보기 쉽지 않게 변해가는 것만 같은 시간... 원인을 규명하기 이전에 그저 이 몰려오는 파도가 잠잠해질 때까지 묵묵히 일상의 업들을 해내는 데 집중할 뿐 달리 방도는 없다는 걸 안다. 발 뒤꿈치의 갈라진 살 틈은 기어코 상처가 덧나서 피가 고여 있기 일쑤이며 급기야 걸을 때마다 찌릿해야 했지만 이를 악물고 운동을 하는 사투를 벌이는 우스운 형국이라니. 그러면서도 아침 등원을 마치고 운동을 하고 난 이후 예정된 오전과 오후의 여타 일과들을 소화해내기 바쁘다. 여기저기 왔다 갔다 가르치고 취재하고 원고 쓰고 가사하고 육아하다 보면 하루가 금세 지나가 있다. 시간이라도 일찍 가니 다행이지 싶지만 틈틈이 묘하게 기운 빠지고 기분 마처 불쾌하거나 속상함에 근접해지면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눈을 질끈 감아 버린다. 그리곤 생각하는 것이다. 잠시만 참으면 될 일이고 그렇게 참기 힘든 일도 아니라는 것을.... 견딜 수밖에. 달리 방도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라고.



Walter Langley, Never morning wore to evening but some heart did break, 1894, Birmingham Museums



살아온 인생이 갑자기 종잡을 수 없이 빈곤하고 빈약하게 느껴지는 순간이면 내가 이런 나 자신을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지 도무지 알 수가 없게 되고 만다. 그럴 땐 두 화가가 떠오른다. 정확히 말하자면 윌터 랭글리와 조지 클라우센의 두 그림이 떠오르는 것이다. '저녁이 가고 아침은 오나, 마음은 무너진다'라는 깊숙한 슬픔이 담겨 있는 것만 같은 항구에서의 두 여인이. 조지 클라우센의 '울고 있는 젊은이'는 또 어떠한가. 보는 이로 하여금 말로 어찌 표현하기 힘든 절체절명의 절망감마저 느껴지기에 감히 오래 보고 있기가 힘들 정도의 그림. 그러나 그들의 두 그림은 역설적으로 위로가 되고 만다. 불행과 슬픔에 위안을 주는 건 타자들의 불행일 수 있다는 생각엔 사악함이 담겨 있지만 사실 완벽히 부정하기도 힘들지 모른다. 나와 비슷한 누군가의 아픔을 바라보고 있자니 나의 아픔이 별 게 아닌 것만 같아서 오히려 그들을 위로하게 되고 마는. 그리하여 자신의 슬픔이나 고통에서 조금씩 객관화되어 버리고 마는 우스꽝스러운 역설을.



항구로 짐작되는 바닷가를 등지고 한 여인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며 울고 있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런 그녀의 어깨 위에는 그녀보다 훨씬 더 연배 있어 보이는 노파의 손이 올려져 있고 그녀는 울고 있는 젊은 여성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다. 마치 너의 슬픔은 한때 나의 것이었음을 아는 것처럼. 밝지 않은 명암과 채도, 잿빛에 가까운 배경은 생활과 일상의 고역이 느껴지는 것 같은 그녀들의 복장과 닮아 있다. 친정엄마와 딸인 것일까. 아니면 같이 일하는 일터의 동료였을까. 아니면 이웃의 주민일까. 그녀는 무엇 때문에 고개를 숙이며 절망에 빠져 있는 것일까. 무엇이 그녀를 고통스럽게 만들었을까. 생활고일까. 궁핍한 일상이 몸서리치게 지겨워져서 도무지 희망이라곤 찾지 못했던 것일까. 아니면 실연을 겪은 것일까.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떤 배신이라도 당한 것일까. 해결책 없는 사건사고에 휘말린 걸까. 아니면 치유하지 못하는 불치병을 선고받기라도 했을까. 그도 아니면 끝없이 반복되는 잿빛 일상이 문득 너무나도 무거워서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푹 숙이고 눈물을 훔쳐야 했던 것일까. 그림의 제목처럼 '저녁이 가고 아침은 오나, 그녀의 마음은 이미 무너지고 말았기에.




George Clausen, Youth Mourning, 1916, Imperial War Museums



'인간은 부서지고 또 부러지는 존재'라 했었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그 말은 지극히 옳다고 생각한다. 대체로 인생은 올바로 흘러야 하는 곳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게 마련이니까. 그러니 어찌 인간으로 태어나서 부러지고 부서지지 않을 수가 있을지. 조지 클라우센의 이 그림은 무엇보다 극도의 절망과 슬픔으로 부서져버린 한 인간의 모습을 느끼게 만드는 그림이 아닐 수 없다.



머리를 곱게 올린 한 여성이 보인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그녀는 나체로서 흙바닥에 엎드려 맨몸을 웅크린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다. 발가벗은 이유는 무엇인가. 아니 발가벗겨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의도하든 그렇지 않았든 맨 몸과 맨살과 그녀의 흰 살가죽은, 밤에 가까운 어두운 배경과 흙갈색의 차갑게 느껴지는 맨바닥과 그 앞에 오래된 나무 십자가와 극명히 대조되어 더욱 커다란 깊이의 슬픔을 자극시키고 만다. 무언가에 참회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회생하기 힘든 무거운 생의 비통함으로 인해 그녀의 온 심신은 무너져 기꺼이 나체가 되어 우는 미친 여자로 만들었던 것일까. 무엇이 한 여자를 울게 만드는 것일까. 무엇으로 인해 우리는 기어코 참던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인가. 기뻐서 흘리는 눈물과 그렇지 않은 눈물의 차이는 아마도 뜨거움일지 모른다. 차가운 눈물과 분한 열기... 그것은 때에 따라 화력이 되어 인생의 다른 동력이 되기도 한다. 물론 견딘 이후에 찾아오는 동력일 테지만.



배송지를 입력시키고 하루가 지나서 얼그레이 케이크가 도착했다. 하원한 아이들의 호기심을 말릴 틈 없이 그들은 먼저 정신없이 포장물을 뜯어보았으리라. 아이들의 흐트러진 패딩과 가방을 정리하고 쉴 틈 없이 저녁 준비를 하고 있는 사이에 살펴보니 기어코 케이크 상자가 찌그러져있었다. 식탁에서 바닥으로 고꾸라진 케이크는 엎어져서 보기 좋게 박살이 난 채 납작하게 뭉게져 있었으니. 입술을 꽉 깨물고 정신없이 소란스러운 거실을 지켜보며 묵묵히 치밀어 오르는 무언의 감정을 애써 잠재운 채 아이들의 저녁 식탁을 준비했다. 오늘의 짜장밥은 맛있다면서 한 그릇 더 달라는 아이들의 목소리는 그 와중에 현실적으로 그들의 영양과 건강상태를 챙기는 데 만전을 다하는 어미로서 무척이나 반가웠지만 한편 한 인간으로서는 기묘하게 슬프고 분했던 이유는 도대체 무엇 때문이었을까.



삶에 희롱당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까. 글은 백날 써도 읽히거나 인정받지 못한다. 아무리 잘해봤자 제로섬 게임인 가사와 양육 앞에서는 그 누구의 칭찬 한마디 혹은 여간 고달픈 사소한 수고스러움들의 연속과 반복에 대한 행위의 공로치하는커녕 '엄마가 되서 제 때 먹이고 제대로 키워야지' 란 은은한 압박체의 암묵적 목소리만 양가로부터 듣지 않고 지나가도 감지덕지. 하루 일과를 소화해내고 아이들의 건강도 그들의 일상도 무탈하고 순조롭게 흐르며 석양을 맞이했다면 기어코 감사하고 다행인 삶. 그러나 그들을 지키는 한 인간에게는 알 수 없는 참담함과 동시에 삶의 깊은 의미부여를 하게 만드는 언페어 게임... 뭉게진 얼그레이 크림이 잔뜩 묻은 바닥을 닦고 찌그러진 케이크를 일으켜 세워서 다 버리기에는 아까워 그나마 형체를 알아볼 수 있는 몇 부분을 숟가락으로 떠서 혀 끝에 대니 쌉쌀한 달콤함이 감돌았다. 그리곤 나도 모르게 생각했다. 손바닥만 한 크기라, 그렇게 작은 크기의 케이크라 다행이라고. 그러면서 묘하게 눈물이 핑 돌다가 다시 문득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렇지 이랬어야지 라면서. 엎드려 절 받기와 모순의 집합체인 인생은 설상가상 엎친데 덮친 격이 제맛이지 라며. 원래 인생이 이래야 하는 법이지 라면서...


Walter Langley, Idle Moments, 1882-3, Birmingham UK



그럴 때. 그럼에도 견딜 수밖에 없을 때. 언젠가부터 분하면 더 책을 찾았다. 그렇게 읽고 읽고 또 읽으며 다른 이들의 인생 속으로 들어가기를, 그 안에서 오랫동안 살다 나오기를 택했다. 초라한 자신을 고결하게 일으키는 힘은 그리하여 나로선 역시 밤의 독서밖에 없었다. 유일한 도피처이자 그만큼의 위로도 드물었기에.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비극의 주인공들이 책 속엔 왜 그리도 많은 것인지. 윌터 랭글리와 클라우센도 알았을지 모른다. 그런 여자의 마음에 대해서. 한껏 잿빛투성이의 일상을 보냈더라도 그녀들의 앞에 책이라는 또 다른 세계를 쥐여준 것은. 그럼에도 견디라고. 견딜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기 때문에. 인생은 한 번이고 그렇게 무너지기엔 한편 너무 아까울 테니까. 그러니 읽으면서 달래라고.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한낮의 심신을. 대낮의 소란스러운 소음과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은 그렇게 편집하듯 흘리고 지워버리면 그만이라고.



비록 한 페이지를 넘기기조차 쉽지 않은 고갈될 데로 말라버린 수분기 하나 없는 상태라 할지언정. 한낮의 메마름은 그렇게 밤의 고요함으로 다시 채워진다. 그리고 조금씩 느리지만 천천히 '다시'를 외칠 수 있는 준비를 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견딜 수밖에 라면서. 일단 그러다 보면 뜻하지 않은 행운과 마주하게 될지도 모를 테니까... 언제 찾아올지 다만 알 수 없을 뿐. 그러니 일단 견디는 것이다. 망자들에게는 견디고 싶어도 그럴 권한조차 주어지지 않는다는 걸 아니까. 견딜 수밖에 없는 지금, 무겁고 앞이 보이지 않은 한 시절이라 할지언정 묵묵히 통과하며 살아가야 한다. 결국 우리는 살아 있는 인간이기에.




George Clausen, Reading by Lamplight,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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