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몽

Alphonse Maria Mucha

by 헤븐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그와 나의 단결력은 한층 강해진다. 올해도 어김없이 그이와 나는 아이디어를 도모하며 준비에서부터 실행 그리고 마무리까지. 나름의 최선을 다 하려 했다. 산타클로스의 존재가 아직 유효한 아이들의 세계를 지키기 위한 어른들의 귀여운 고군분투랄까. 첫째가 푹 빠져 있는 어몽어스에 대한 탐구는 그렇게 시작된다. 그리곤 잠시간 새삼스러운 놀람이 이어진다. 아이가 해맑게 웃으면서 종종 말하곤 했던 임포스터라는 캐릭터가 알고 보니 꽤나 무시무시한 존재였다는 것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같이 웃어주며 맞장구를 쳐 주었던 자신의 무지함에 잠시간의 부끄러움을 느끼며. 그러면서 뇌 구조의 한쪽은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첫째에게서 둘째의 세계로 자연스레 이동하며 다시 연구를 시작한다. 그의 마음을 휩쓸고 지나간 종이 접기의 세계 중 단연코 아이가 자주 언급했던 '팽이 책'이란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해서. 그리고 네모 아저씨의 페이퍼 블레이드 시리즈와 맞닥뜨리고 기쁘게 구매 버튼을 클릭하면서 나는 잠시간 투덜대고 만다. 네모 아저씨 종이 접기가 알고 보니 시리즈였어. 그리고 우리가 지금 그 시리즈라는 덫에 걸리고 말았어....!



그이는 나를 보고 웃었다. 그리고 무언의 어깨 토닥임과 동시에 말을 건넨다. 자신은 따로 준비한 게 있다고. 돋보기와 썰매가 곧 도착할 것이라고. 흙 속 지렁이와 각종 미세한 벌레들을 좀 더 자세히 관찰하기를 바라는 나름의 과학적 학습을 유도하는 전략이라나 뭐라나. 여하튼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선물들의 조합이지만 엄마의 신상템과 아빠의 구식템은 드디어 준비 완료. 누군가에게는 비현실적이지만 한편 다른 누군가들에게는 지극히 현실일 수 있는 세계. 산타와 크리스마스, 네모 아저씨와 어몽어스 임포스터. 아이들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분투하는 귀여운 어른들.



아이들의 상상 속 세계는 그들이 원하는 레어템들의 준비로나마 조금씩 현실 속에서 그 실체를 드러낸다. 반면 남은 두 사람의 '원함' 들은 어찌 된 영문인지 잘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설령 백일몽이라 할지언정. 당신의 내밀한 상상과 나의 은밀한 몽상은 언젠가부터 왜 서로의 눈에 잘 띄지 않게 되어 버렸는지. 하지만 그 이유를 그들은 또한 알고 있다. 가족이라는 단체의 충실한 공동 운영자로서의 두 사람은 그들의 크리스마스가 네 사람의 그것이 되었을 때부터 더더욱 깨닫게 된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는 백일몽의 주인공은 이젠 자신이 될 수 없다는 것에 대해서. 아마도 사계가 무한히 반복되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앞으로 당분간은 그렇게 살아갈 것에 대해서. 그것이 그들이 선택한 최선의 사랑, 기쁨의 원천,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견고하고 튼실한 마음가짐. 책임감. 책무에 대한 열정. 에로스가 아가페로 변했을 때. 두 사람의 백일몽은 각자의 몫인 걸로.


Alphonse Maria Mucha, The Seasons (series), 1896, 2013


알폰스 무하를 접했을 때 그야말로 '꿈같다'는 감탄사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의 작품들이 1900년대 전후의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도 비현실 같았다. 그는 한 여배우 (사라 베르나르)를 알리기 위한 석판 포스터를 만들며 등판하게 된다. 그런데 무하의 작품은 그야말로 혁신이고 혁명이었다. 그 시대에 그 누구도 접하지 못했던 아름다운 포스터. 지극히 상업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결국 대중은 그를 택했다. 큰 호평을 받게 되어 확실히 유명해졌고 그때부터 그에게 쇄도하는 회화, 포스터, 광고와 책의 삽화들. 어디 그뿐이던가. 각종 보석, 카펫, 벽지 등으로 콜라보 제작되던 그의 스타일은 그야말로 그 시대의 '무하 스타일'로 대변되며 아르누보를 대표하는 양식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다. 그의 전형적인 회화는 대부분 젊고 건강한 미적 아름다움과 품위가 돋보이는 여성이 네오 클래식한 옷을 입고 꽃으로 장식된 배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더욱 무언의 몽환적인 미적 감수성을 자극시킨다. 우아하며 섹시하게 어떻게 잘 나이들지를 고민하게 되는 순간 뱃살의 튼살을 잠시 쓸어보면서 자체몸평이 시작된다. 음, 아직 좀 괜찮네, 그래 이 정도면 뭐... (그렇다고 당신의 숨이 멎을 정도는 이제 바라지도 않지만, 나름 자극적이지 않니, 않은가...응?)



사계는 무하 스타일 판넬화의 첫 번째 세트다. 그는 4개 패널의 시리즈 안에 마치 신화 속 님프 같은 여성들을 주인공 삼아 인간 세상의 사계절을 의인화했다. 각각의 판넬에서 그는 계절에 따른 몽환적인 풍경을 배경으로 하여 순결한 봄과 정열적인 여름, 풍요의 가을과 얼어붙는 겨울로 각 계절의 분위기를 담았다.


Alphonse Maria Mucha, The Four Seasons, 1900



그의 작품 속의 인물은 대부분 여성이 등장하는데 그녀들은 특유의 오컬트한 품위와 우아한 곡선미를 자랑한다. 여자라면 닮고 싶다거나 남자라면 만져보고 싶다는 백일몽에 빠져들게 만들 만큼. 특이한 배경과 장식품들의 섬세한 붓터치와 다양한 색채들의 기묘한 조화. 다소 상업적이고 탐미적으로만 비칠 수 있어서 결국 아르누보는 단명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100년이 지난 현시대에도 그의 작품은 여러 예술 매체와 상업 안에서 내내 회자되며 재활용되고 있지 않던가.



무하의 작품들이 새삼 더욱 인상 깊게 마음에 박혔던 건 사실 그 몽환적이고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이 담긴 작품이라는 그늘에 가려진, 지극히 현실적인 분투의 일화를 접했기 때문이었다. 학창 시절에 재능이 없다고 통보받은 그는 미술을 시작조차 못할 줄 알았지만 타인들의 평가에 구속됨 없이 그저 좋아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하다 결국 승승장구한 예술가. 그것이 바로 알폰스 무하였다는 점...


800px-F._Champenois_imprimeur-éditeur.jpg Reverie, poster for the publishing house Champenois, 1897



모두에겐 연휴인 크리스마스에 그는 인쇄소에서 친구의 일을 도와주었다지. 그러다 새해 첫날 붙여야 하는 극장 포스터를 제작할 디자이너를 찾던 중 그에게 급히 의뢰가 들어오고 그는 그 주문에 응한다. 그동안 갈고닦은 그만의 방식으로.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파괴적 혁신으로. 신비롭고도 웅장한 인간의 말초신경을 자극시키는 그 특유의 아름다운 감정을 건드리기 위해 그는 당시 일반적인 석판화 양식에서 크게 벗어나는 디자인과 크기의 포스터를 제작했다. 운이라는 것은 어쩌면 그렇게 조용한 열정으로 끝없이 움직이는 이들에게 더 자주 다가가게 되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알폰스 무하는 그저 운이 좋았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을지 모른다. 물론 아무리 좋은 작품이어도 일단 유명해져야 사람들은 결국 알아볼 수 있었을 테니... 그가 비로소 유명해져서 정말 다행이라고.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의 작품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자면 어딘지 마음이 찌릿해진다. 유명해져야, 크게 성공해야 비로소 알아보게 되는 것에 대한 사색을 나도 모르게 하고 나니 드는 어딘지 모르는 헛헛한 무엇으로 인함일지도.



Madonna of the Lilies, 1905



아이들은 이제 지켜야 하는 대상이 되었다. 좋든 싫든 설령 바라지 않았다 해도 이제 아이들은 내게 그런 사람이 되어 간다. 확실히 그러하다. 내가 선택한 당신이라는 완벽한 타인을 포함하여 심지어 나 자신조차 초월하고 마는 신적인 존재가. 그들이 그들의 꿈을 이룰 수 있다면 어떤 것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조력자로서의 정열적인 책임감으로 무장한 나와 그이는. 그리하여 반대로 사적인 그들의 어떤 '꿈' 은 이제 그들에게는 일종의 닿을 수 없는 백일몽이 되어 버리며 흐릿해져 갈지도 모른다. 크리스마스는 일 년에 한 번 꼬박꼬박 찾아오지만 누군가에게 꿈이란 그에 비하면 찾아와도 밀어내야 살아지기도 하는 생의 모순을 접하게 만드니까. 간절한 바람, 아무것도 먹을 수 없는 상태, 어떤 열병과도 같은 것, 끊임없는 판타지를 자극하는 그런 당신과 나의 미뤄두고 감추게도 되는 내밀한 어떤 꿈들... 내가 여전히 당신으로 하여금 밀로의 비너스가 될 수 있을까. 누군가에게, 어떤 영역에서는 뚜렷하게 그런 확실하게 유일한 존재가 되기를 여전히 갈망하는 욕심쟁이인 이런 나를, 당신은 그럼에도 감내하며 사랑해줄 수 있을까. 우리는 사랑일까. 에로스가 아가페로 변해간다할지언정 우리가 사랑일 수 있을까. 사랑으로 끝내 남겨질 수 있을까...



나아가든 멈추든, 후퇴를 하며 쉬어가든. 다만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고 싶을 뿐이다. 자유롭게... 어떤 덜 떨어지고 어리석은 행동을 해도 덜 자책하고 후회하며 한껏 우울하다가도 다시 일어날 수 있기를. 자주 백일몽에 빠지는 여전한 자신일지언정, 그 자유로운 상상을 여전히 포기하지 않기를. 그것이 결국 단어와 문장, 그렇게 자신만의 이야기가 되어 흐르는 삶을 채워나가 줄 테니까. 결국 그 백일몽을 품고 살아가려는 그 자유가 자기 자신을 얽매이는 현실로부터 보다 자유롭게 해방시킬지도 모를 테니까. 자유가 없는 삶은, 자유로부터 출발하지 않은 삶과 사랑은 결국 자신을 기만하게 만들 테니까.



12월 25일이 다가왔다. 그리고 남겨진 며칠, 한 해의 기억을 들춰보며 나는 꿈꾸기를 택한다.

두려워하지 않고, 그렇게 나아가기를. 멈췄다가도 다시 사랑해내기를.

사계의 여신, 그 행운을 상상하며 내 곁의 당신들을. 그리고 내 앞의 또 다른 시작이라는 출발들을.




#Source : Alphonse Maria Mucha, Dream

https://en.wikipedia.org/wiki/Alphonse_Much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