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모든 순간엔 '처음'이 존재한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우리는 자신의 연령별 생애주기를 통과해 나가며 수많은 '처음' 들과 만난다. 대지에 두 발을 딛고 첫걸음마를 해냈을 때. 울기만 하던 아이의 음성은 어느새 언어와 문장으로 이어져 자신의 욕망을 '언어'를 통해 누군가에게 전달된다. 그뿐일까. 오감은 '처음'을 통해 자극되고 그렇게 점점 신체와 뇌의 기능들은 발달하기 시작한다. 귀로 들려오는 처음 듣는 소리, 음악, 그리고 누군가의 목소리. 입 속으로 들어오는 처음 마시게 되는 액체, 혀 끝에 닫기 시작하는 음식이라는 형태의 모든 것들. 신체에 닿아지는 모든 처음 느끼게 되는 사물들로부터의 자극. 피부, 살갗, 입술, 손가락을 통해 교감을 얻는 나의 촉감들. 그로 인해 발산되고 마는 도파민, 세로토닌, 피하고만 싶은 코르티솔. 무엇보다 나의 에스트로겐과 당신의 테스토스테론이 만나 기어코 폭발할지도 모를 두 사람... 그리하여 비로소 당신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하는, '처음' 마주하는 것 같은 나의 새로운 육신과 정신.
이처럼 '처음'이라는 것을 빼놓고 어찌 인생을 설명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우리는 수많은 '처음'을 경험할 테다. 그런데 그 처음이 정말 '처음' 일까. 바보 같은 생각일 수 있겠지만 나는 가끔 미궁에 빠져버린다. '처음'은 애초에 없는 시점이 아닐까라는 생각 탓이겠다. 시간과 순서적인 '시작' 혹은 '앞선 경험'을 의미하는 '처음'의 순간들. 그것이 어쩐지 모순 같이 느껴질 때가 종종 있기 때문이겠다. 특히 '사랑'의 세계만 보아도 그렇다. '처음'이라는 시간을 뜻하는 그 시점이 묘하게도 짓궂게 느껴지곤 하니까.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에 의하면 결국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라고 한다. 우리가 시간적 순서적으로 정의한 '처음'이라는 것은 결국 존재하지 않고 다만 '엔트로피의 증가가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의 흐름'이라는 것. 본질적으로 '기억과 예측으로 만들어진 뇌를 가진 인간이 세상과 상호 작용을 하는 형식'이며, 우리 정체성의 원천'이 바로 '시간'이라 하니. 결국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각 인간 존재의 개별적 사건을 명명한 것일 뿐. 결국 세상을 설명할 때 시간이라는 일종의 '변수'는 필요치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시간은 없고 오직 사건과 관계만이 존재한다는 것.
그렇다면 같은 시간을 지냈어도 그 시간은 절대 같았다고 말할 수 없겠다. 나의 사건과 관계가 누군가의 그것과 같아질 순 없을 테니까. 나와 너. 각자의 시간을 통한 경험의 축적. 그것을 '기억'이라고 말한다면 더더욱 그러하다. 같은 경험도 다른 기억으로 각자 편집되고 재배열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니 '나'의 기억, 마음, 감정은 결국 모두 나의 책임소관이며 결코 '너'에게 전가될 수 없는 것. 그렇지만 반대로 이렇게 변명할 여지는 남겨져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의 영향을 받고 만다는 것. 내가 아닌 너를 통해 '처음'을 경험해 나가면서 나라는 인간은 확실히 변하게 된다고도.
예컨대 술을 마실 때 최고의 안주로 아이스크림만을 고집하는 이상한 나로 인해, 단 것을 좋아하지 않는 당신이 어느새 투게더의 바닐라와 나뚜루의 녹차 아이스크림 그리고 캔맥주에 익숙해지는. 날 위해 변하려 노력하는 당신과 그런 당신에게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뭐든 더 열심히 하려고 애쓰던 나. 서로를 '처음' 원하는 마음이 닿아 두 몸이 포개어 겹쳐지던 날. 그날의 아이스크림은 채 다 먹지도 못한 채 녹아져 사라졌지만, 대신 이 세계에는 아이스크림과 맥주의 조합보다 더욱 격렬히 달콤할 수 있는 '합'이 있다는 걸 깨달았던, 당신과 '처음' 사랑하던 나.
@unsplash, Mink Mingle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에 기대어 생각해 보아도 확실히 그럴지 모른다. 나의 욕망은 결국 타자인 너로부터 탄생되고 마는 것. 결국 나라는 존재는 없고 당신의 존재를 통해 내가 만들어질 수도 있는 것. 즉 나의 처음은 사실 너의 처음과 그 이후의 경험들을 통해 자아가, 무의식이, 세계가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말이다. 동일한 시간 영역대에서 두 사람이 같은 경험을 했음에도 그것은 각자 다른 처음의 시점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의 첫 키스가 너에겐 숱한 몇 번째 중 한 번에 불과할 수 있고, 나의 첫 연인은 당신이었지만 당신의 첫사랑은 내가 아닐 수 있는. 애석하지만 확실한 사실. 그럼에도 사랑의 세계에서 '처음'이라는 '사건'은 얼마나 경이로운 것일까. 인생에서 분명 오래 회자될 수 있을 처음이라는, 시작이라는, 모든 것이 새롭게 느껴지는 그 순간들. 타자를 통해 처음 경험하게 되는 여러 시간들을 겪어나가며 나의 기억은 생산되고 축적되고 소멸되고 다시 새롭게 만들어진다. 내가 만들든 누군가로 인해 조작되든. 어쩌면 후자에 가까울 수 있는 것이 사랑의 세계. 당신이라는 존재, 너의 욕망으로 인해 확실히 영향받고 마는 이런 나.
모든 '처음'의 순간들이 그렇다고 마냥 기쁘고 설레고 좋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겠다. 마치 우리의 하루가 24시간 내내 행복하다고 할 수 없는 것처럼. (오히려 불행을 피하기만 해도 얼마나 좋은 삶인지) 어쩌면 당혹스러움과 애절함과 안타까움이 좀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할지 모른다. 특히 사랑의 영역 안에서 탄생된, 내가 경험한 모든 '처음' 들에 대해서 떠올리자면 사실 나로서는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겠다. 그 '처음' 들은 나로 하여금, 도무지 나라는 인간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알 수 없게 만들어, 내내 전전긍긍하게 만들기도 했노라고.
사람이나 사물 혹은 어떤 현상을 향한 자신의 호기심과 선호가 담긴 감정은 어느새 좋아함의 다리를 건너 사랑이라고 말하는, 꽤 밀도 깊은 세계로 나를 밀어 넣어 기어코 집중시키게 하고 때로는 집착까지도 만든다고. '너'라는 타자를, 꿈같은 이상을, 이루려는 목표를 향한 욕망을. 그렇게 내 앞에 놓인 오브젝트 (대상)를 향해 사랑의 감정을 품고 맹렬히 돌진하는 용자들은, 사랑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에 비해 어리석게 변하기도 쉽겠다. 그야말로 '바보'가 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부풀릴 수 있을 만큼 한껏 부풀려놓은 자신의 '처음' 감정에서 좀처럼 헤어 나올 수 없게 되고 마니까.
그럼에도 '사람'을 사랑하는 경험이란 우리 인생에서 얼마나 귀하고도 고통스러울 수 있는 영역의 것일까. 그야말로 인생의 모순과 양가적 감정을 듬뿍 느낄 수 있으니 말이다. 사랑을 하는 사람들의 모든 처음의 순간들은 그 시작을 계기로 때로 현재의 상황을 모두 버린 채 전혀 다른 세계로 뛰어들려는 아찔하고 위험한 유혹과 마주한다. 첫 고백과 첫 만남. 첫사랑과 첫 키스. 첫 연인과 첫 데이트. 처음 느끼는 상대의 체온과 피부의 감도. 두 사람만이 존재하는 완벽한 밀실에 산뜻하고 확실하게 갇히고 마는 아찔하고도 황홀한 경험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랑의 처음 장면들. 그것은 각자의 세계 속에서 참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겠다. 누군가에겐 마냥 아름답겠지만 누군가에겐 슬픔이나 아픔으로 기억될 수도 있다. 다시는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은, 다시는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겠노라 결심하던 자신조차, 기어코 사랑할 수밖에 없는 대상을 만났을 때.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모순과도 같은 그런 기적을 경험할지도 모를. 사랑이란 때때로 나 자신을 미화시키면서도 동시에 어느새 나 자신을 서서히 왜곡시킬 수 있는 뻔뻔하고 장렬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만 같다. 그것이 어쩌면 사랑이 지닌 특유의 에너지. 사랑하는 이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일지도 모를 일이다.
@ 영화 헤어질 결심 중, 서래와 해준. 모든 처음은 귀하고 뜻밖이고 그렇게 반복된다. 처음이라는 오브젝트로 인한. 그런걸까
사랑하며 경험하는 모든 처음, 그리고 그 이후 재현되는 순간들은 상대적이다. 같은 장면으로 기억될 수 없다. 각자의 세계 속에서 기억의 불일치를 탄생시킨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의 클레멘타인과 조엘의 경우를 떠올려볼까. 기억이 지워진다고 사랑이 지워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그럴 수 없다. 심장에, 뇌리에, 마음 깊은 심연 속에 확실히 각인된 사랑의 기억은 잊고 싶다 해서, 떨쳐버리고 싶다 해서 깔끔히 소멸시켜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닐 테다. 그것 안에는 어떤 불가항력이 필시 존재하기에 피하려 해도 좀처럼 피해질 수 없는 것이라고. 그것이야말로 사랑의 이면에 숨겨진 마법 같은 에너지라고.
누군가 그랬다. 나라는 사람이 살고 있다는 존재의 기원은 결국 내가 살아온 경험들로부터 나온다고. 경험. 삶의 경험은 또한 반드시 기억을 탄생시킨다. 그리고 그 기억이란 시간과 사건의 연속들 속에서 쌓인 순서대로 천천히 흐려지고 또 지워지겠지만. 우리에게는 뇌의 변연계 속 한 기관으로서 기억의 저장과 상기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해마가 확실하게 존재하고 또 작동하는 한(!) 의식 속에서 지워진 기억은 내 존재 가운데 어딘가에 분명 각인되어 있을지도 모를 일인 것이다. 무의식의 어딘가에서. 또한 그것은 비밀의 방에 갇힌 채 나에게 발견되기를 내내 기다리고 있을지도. 그리고 뜻밖의 어떤 사건, 상황, 사람이 그 열쇠를 덜컥 찾고 싶게 만드는 동력이 되어 줄지도 모른다. 어쩌면 '처음'은 그렇게 '다시' 시작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처음이란 어쩌면 계속 반복되는 게 아닐까. 계속 처음. 처음처럼. 처음의 순도, 처음의 마음. 시작하려 결심한 그 처음의 용기가 끊김 없이 매 순간 이어질 수만 있다면. 그렇게 사랑할 수만 있다면. 그건 아마 기적일지도 모를 테지만. 그만큼 힘겨운 것이 사랑의 세계.
원래 처음 그 자체는 힘이 없다. 처음은 이내 사라진다. 시간과 만나 강력해짐의 고개를 넘다가도 이내 고꾸라져버리기 쉽다. 그건 마치 조금 우스꽝스럽게 표현하자면 하이먼민스키차트의 불트랩을 지나 그 이후의 추락곡선과 비슷하다고도 생각될 수 있을까. (나만 이런 우스운 생각을 하겠지만;) 사건과 상황에 따라 물론 제각각의 형태로 '모든 처음의 순간들'은 천천히 혹은 재빨리 힘쓸 겨를 없이 결국 소실된다. 다만 반대로 이렇게도 생각하고 싶다. 결국 처음을 '기억' 하는 그 마음과 지속해 내려 노력하는 동력. 어쩌면 시작과 처음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이후의 시간들에 사랑의 핵심, 힘이 실려야 할 것이라고.
귀하게 잘 지키려는 마음과 그런 행위. 내게 사랑의 정의는 그런 것이라서. 물론 약간 시선을 비틀어 '다시 처음'을 느끼게 만드는 새롭게 급 부상하는 오브젝트가 발견된다면 '맙소사 신이시여'를 외치며 스스로 어떻게 눈을 질끈 감고 입술을 깨물어야 하는지. 아니면 돌진하려는 마음을 힘껏 누르든 샘솟든 결정을 끝내려 애쓰든, 이도저도 아닌 상태로 시간을 보내야 할 테지만 말이다.
볼품없는 자신이라 생각되어도 분명 누군가에겐 '처음' 눈 안에 들어온 영롱한 보석처럼 끌릴 수 있다. 반대로 물질적으로 가진 게 많다 한들 누군가의 마음과 의식은, 그와 그녀의 '처음' 으로써의 나로 존재되기 쉽지 않다. 결국 우리는 상대의 그 무엇도 가질 수 없는 노릇이겠다. 애당초 소유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닌 것이 바로 사랑일 테니까. 물론 지금. 여기. 2023년. 퐁퐁남녀와 동탄미시룩, 중매술사라는 우습기 짝이 없는 신조어가 우스꽝스럽게 난무하며 의도된 저의로 짝을 찾는 데 익숙한, 자본주의적 인간의 난폭한 이기심이 파생시킨 다양한 폭력이 현란한 이 시대.
물론 그런 것들이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이해도 한다. 자신이 지닌 자원으로 최대치의 ROI를 뽑아내려는, 생존과 욕망에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걸 이제는 알 것 같으니까. 다만 이런 시대에 내가 말하고 싶은 사랑의 무결한 가치와 상대를 향한 진실된 태도, 처음을 대하고 지나가며 도리어 만들어 내야 하는 사랑하는 자들이 지켜야 하는 어떤 예의들. 한 개인의 이러한 철학적 소견들 따위가 누군가들에게는 지극히 무용하고 쓸모없이 들리고 말아서, 때때로 거북하게 치부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럼에도 나로서는 이렇게 부끄러움 없이 잘도 떠들어대면서 솔직히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믿고 싶어지는 것이다. 사랑의 어떤 완전무결한 가치에 대해서. '진짜'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 Herbert James Draper, Ulysses and the Sirens, 1909 우리는 망각과 착각에 빠지곤 한다. 세이렌이 세이렌이었음에도.
그이와 나 우리는 서로의 처음이 아니었다. 첫 키스와 첫사랑 첫 경험과 첫 설렘의 대상이 애초에 될 수 없는, 그는 나보다 세상을 좀 더 경험한 경륜자로서. 반대로 나는 갓 이십 대의 어린 티를 겨우 벗어내어 서른의 세계에 입성하기 전, 나름 자본주의 속에서 생존하는 기술을 여러모로 또래보다 더 빨리 그리고 일찍 터득하려 산전수전 공중전을 경험하려 애썼던. 우리는 각자 '어른'의 옷을 입고 있었다. 마냥 어린이일 수 없는. 어린이로 살고 싶으나 그렇게만 살아선 '진짜' 어른이 아니라는 걸 아는 그런 사람들... 자신의 위치에서 지켜야 할 것, 이루고 싶은 소박한 인생의 목표, 해내고 싶은 열망을 조용히 품은 채 생존적으로 부여된 여러 생활 미션의 도장 깨기에 익숙한 그런 어른...
그래서였을까. '이런 나'를 품을 수 있는 성품과 그릇, 도량이 되는 '남자'이자 부양투자의무를 확실하게 지니며 - 물론 함께 부양해 나갈 것을 열렬히 다짐하는 꽤 독립적인 여성상이 또한 나라는 여자였지만 - 동시에 나의 '모든 것'을 허락하게 만드는 유일무이했던 사람. 그를 놓치면 정말 진심으로 후회하겠다고 생각했을 때 '우리'가 되기로 맹세했던 것 같은데. 그이는 어떤 마음으로 나를 선택했는지 사실 정확히 알 길은 없지만 그도 '나라는 여자'를 놓치면 확실히 후회할 것이며 더 좋은 이상향에 가까운 이성은 더 찾을 수 없을 것이라 했었다. 우리는 비로소 서로의 연인이 되었고 다시 각자의 '처음' 들은 시작되었다.
나이차이가 꽤 있었고 나는 도리어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는 걸 그이는 알까. 그야말로 '잘' 나이 들어가는 중인 그 시절 30대 후반에 접어든 그의 나이스한 생각과 바른 태도. 잘 생긴 편은 아니지만 사실 잘생긴 남자를 전혀 선호하지도 않고 보이는 외모가 성적 매력으로 끌리는 요소가 전혀 아닌 편에 속하는, 독특한 나의 취향도 한몫했겠지만. 확실히 다가오는 그이의 클래식한 어떤 매력과 무엇보다 당신의 목소리와 발화하는 어른스러운 여백의 문장들이... 나는 너무 좋았기에. 감히 '너무'라는 부사를 자주 사용할 만큼. 나는 당신이 무척 좋았노라고. 그리하여 이런 나의 '모든 것'을 당신이 감히 '소유'해도 좋을 만큼 내 모든 걸 그이에게 허락하고 싶었노라고. 나는 꽤 '여러모로' '잘하는' 매혹적인 여자라는 걸 당신에게 어필하고 싶었을 만큼. 지금 생각해 보면 서로를 향한 뻔뻔하게 들리지만 완전무결한 힘을 지닌 사랑의 문장들은 서로를 놓치지 않기 위한 우리의 필사의 노력이었겠다.
나로서는 그이와 모든 '처음'들을 꽤 많이 누렸다. 나에게 확실한 자극과 좋은 에너지를 듬뿍 주었던 연인. 나라는 사람이 이렇게도 '여러모로' 변할 수 있다는 걸 당신을 통해 알게 된, 그만큼 영향력 강한 남자. 그저 언어로만 서로를 알아왔던 두 사람은 몸이 더해져 서로를 바라볼 수도 만질 수도 있는 두 사람이 되었고 나의 그 시절의 연인은 지금의 배우자가 되어 있는 현재의 우리. 가끔 짧았던 연예 기간이 안타깝게 느껴지곤 하지만... 기혼의 세계에 그와 함께 입성한 지 이제 12년이 지나간다. 기혼자로서 깨달은 것이 있다면 나라는 사람은 상대의 그 무엇도 절대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이겠다. 애당초 상대의 것을 '소유' 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는 것. 그럴 월권은 애당초 내게 없다는 것을 더욱 알게 되고 만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주체이자 객체로서의 인간인 나와 당신이 만나 다만 '우리' 일 것을 맹세한 그 '처음'부터 그러한 생각은 확고했다. 내가 아닌 누군가의 육신과 정신. 물질과 마음. 그 무엇도 나라는 인간의 것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것을. 어쩌면 그랬기에 아직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감히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사랑이란 흔한 말로 파생되는 이런 나의 감정과 마음을 그에게 제대로 전할 길을 도무지 알 수 없게 되곤 하지만. 당신에게 매일의 안부를, 당신의 안녕을, 우리의 화평에 대한 확신과 확인을 당신에게 자주 종알거리며 여전히 묻는 이유는 다름 아닌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결국 당신을 향한 나의 마음이 아직 소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로서의 시간은 아직도 이렇게 유효하기 때문이다. 관심과 애정이 있음으로 인함이다. 자주 살피고 관찰하는 나로서는 댁내 외 당신의 권위를 더 높여주려는 어떤 힘겨운 노력을 생활전선 속에서 주저 없이 실현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내가 당신에게 더 좋은 영향력을 끼치는 그런 '관계'가 지속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비록 처음의 설렘과 에로스, 격렬한 호르몬의 열정은 천천히 소실되어 가고 있음을 알면서도.
당신을 향한 이 사랑의 '처음'은 그런 갸륵한 마음에서부터 출발했다고. 그리고 스스로 자주 다짐하려 애쓰는 것이겠다. 우리로서의 '처음'을 오래 기억할 것을. 그렇기에 이 사랑은 꽤 건강히 유지존속되고 있음을. 처음이란 기억하는 자에게는 추억이 되고, 망각하는 자에게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은 것이 될 수도 있겠으니. 그리하여 나는 이 얄궂은 생각에서 여태 벗어나지 못하고 만다. 사랑의 영역에서의 가장 큰 적은 결국 시간일 수 있다는 것. 처음이 때때로 처음이 되지 않게 되고 그렇게 숱한 경험이 쌓일수록 어떤 감정들은 묻히기 쉬우니까. 그러나 이렇게도 변론할 수 있을까. 잊히기 쉬우니 반대로 잊지 않으려는 이들의 의지와 마음은 얼마나 갸륵하고 귀할 수 있는 것이란 말인가. 그것은 애달픈 용기. 잊히려는 마음을 시간이라는 적과 함께 그대로 사라지게 두지 않으려는, 상대를 향한 최선의 마음. 그것 또한 사랑...
두 사람이 함께 공유하던 기억은 이제 네 사람의 사랑으로 재탄생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가끔 생각하게 되고 말아 버린다. 당신에게 나는. 여전히 '처음'처럼 귀하게 여겨지고 있을까. 그렇다고 믿고 살지만 가끔 그러지 못한다는 느낌으로 인해 어떤 분함을 속일 수 없는 어리석고 바보 같은 나는 그리하여 가끔 발칙한 생각을 하고 만다. 새로운 오브젝트로서 누군가에게 발견될 수 있을까... 그럴 리가. 그럴 수 없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가끔 좌절스럽게도 묻고 만다. 무얼 원하냐고. 원하는, 바라는, 닿아지는, 다가오는, 다가가는, 그런 대상으로서의 자신을 바라는 것이냐고. 그러나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럴 수도 없다. 나는 내게 화답한다. 그것으로 되었다고. 다만 그저 잠깐의 처음을 다시 만난 시간으로 충분하다고.
우니가 듬뿍 담긴 초밥 한 조각. 천천히 목으로 넘겨야 했던 화이트 와인 한 잔.
마음의 빗장이 열리지 않게 조용히 아랫입술을 깨물어 지그시 어떤 마음을 누르려는.
다시 '처음' 과도 같았던 어떤 시간과 기억을 흐르는 시간 속에 놓아 두려 애썼던.
내가 가장 예뻤던 때. 보고 싶은 그때의 나를, 아주 잠깐 덕분에 보았기에. 그대로도 충분할 것이라고...
@John William Waterhouse, Miranda, 18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