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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Nov 26. 2023

결혼의 맹세

결혼이란 무엇일까. 어쩌면 이 자문은 구닥다리 시대에 유물 찾는 식의 공허하고 의미 없이 들릴 수도 있겠다. 특히 기혼 만 10년 차를 넘긴 사람이 할 소리는 더더욱 아닐 수도 있겠지만. 부끄러움에도 어쩔 수 없이 나는 여전히 생각하고 만다. 결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사랑이라는 화두만큼이나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녀 제각각의 해석이 가능할 법한 바로 그것. 기혼의 세계. 결혼이라는 일종의 '제도'에 대해 여전히 자주 자문하는 그럴듯한 이유를 찾는 데는 늘 실패하지만 단 하나의 자명한 이유를 대자면 바로 이것일 테다. 그것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사는 것과 그렇지 않고 그냥 사는 것에는 생활적 태도의 차이를 만든다고. 나로서는 일종의 자기 성찰과 반성마저하게 되기에 꽤 생산적이고 괜찮을 수 있는, 그러나 확실히 따끔거리는 질문이라는 것. 



만기를 정하지 않은 법적 계약 관계의 시작. 꽤 진지하게 결혼에 대한 생각을 오래 해왔고 여전히 하고 있는 나로서는 이 정도 표현밖에는 달리 국어적으로 '결혼'에 대해 와닿는 문장을 찾지 못하고 만다. 사실 결혼이라는 것은 남들 앞에서 보여주기 위한 일련의 의식(儀式)적 이벤트일 수 있고, 무엇보다 중요하고 근엄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어쩌면 기혼'제도'에 입성하게 되는 시작점. 바로 '혼인신고' 일 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그것은 그간 속해있었던 원가족으로부터 벗어나 새롭게 '가족관계증명서'에 타자를 등재시켜서, 혹은 등재되어서 더불어 새롭게 사는 행위를 의미한다. 그런데 그 지점에서 우습게 들릴 테지만 나는 종종 이렇게도 생각하고 마는 것이다. 결국 기혼시장에 입성한다는 것은  '끝'이라는 종료 시점을 알 수 없이 우선 시작해 버리고 마는 정치적 성향을 지닌 프로젝트와도 같다고. 



법적 효력을 지닌 일부일처 기혼제도권 안에서 기혼자가 되기로 자처한 두 사람은 결혼식이라는 K/O 를 시작으로 그 이후 여러 예상치 못하는 이슈들을 넘기고 또 넘기며 지속적으로 생기는 미션과 목표를 클리어해 나간다. 물론 두 사람은 그 과정을 통과하며 맹세한다. 충실히 서로에게 헌신할 것을. 심신 모두. 여러모로. 또한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닐 것임을. 종료 시점 없이 시작된 프로젝트는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여러 생의 굴곡들과 고개를 지날 수 있다. 그 시간 속에서 때때로 서로 지칠 수 있어서 어느새 강제 종료- 이혼 - 시킬 수 있는 위험 요소가 다분한 프로젝트랄까. 여러 난관에 부딪혀 자칫 하나 있던 동료- 배우자 - 를 잃어버릴 수도 있겠지만 물론 그 반대로 새로운 어린 동료 - 자녀 - 가 생겨버려서 유자녀 기혼자의 세계로 더욱 커다란 난관과 엄청난 기쁨의 스펙터클한 세계로 돌진해 나아가는 대서사 프로젝트...!  


 


@Edward Hopper, Room in New York, 1932 


조금 우스꽝스럽게 결혼에 대한 생각을 늘어놓았지만 사실 결혼이라는 것을 나는 너무 모르고 시작했다. 몰랐기에 삐걱거리는 순간도 잦았다. 돌이켜 생각하자면 약간 아쉽고 참 미안할 뿐이다. 신혼 초기에 조금 더 기혼자로서의 책무와 자기 성찰적 태도의 어른다움을 갖췄더라면 어땠을까 싶다. 좀 더 지혜롭고 현명하게 배우자를 향한 노력을 제대로 했다면 그이를 그렇게 힘들게 하진 않았을 텐데 싶은 늦은 후회와도 같은 마음 때문에. 결혼식만 하면 되는 게 아니었음을. 남들 앞에서 '이 사람은 제 사람입니다'라는 것을 과감하게 보여주는 쇼에 불과한 두어 시간의 결혼식장에서의 맹세는 사실 남들 앞에서 할 게 아니라 살아가며 상대에게 더욱 충실하게 지켜질 것을 지속적으로 해야 하는 맹세여야 하는 것을. 기혼제에 입성한 이상 예전과 똑같이 살려고 해서는 안 되며 (최소한 상대 배우자를 생각한다면) 조금이라도 '나은 결혼생활'을 만들고 또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서는 끝없는 노력이 서로 필요하다는 것 대해서. 조금 더 성숙한 각오와 현명한 헌신을 하려 노력했다면 두 사람이었을 때의 시절을 그렇게 아프게 소비하듯 낭비되도록 놔두진 않았을 텐데 라는 뒤늦은 후회. 



'사랑한다'는 생각과 그로 인한 파괴적 호르몬에 이끌려 상대에게 기꺼이 심신이 묶여 버리려는 법적 공인 관계로의 발전을 향한 헌신적 맹세인 결혼. 나로서는 사실 부끄럽지만 어떤 '느낌'에 이끌린 채 동시에 어떤 불안함을 말끔히 해치워버리려는 작심의 결혼이었다. 물론 사적인 다른 이유도 충분히 한몫 거들었겠다. 배우자의 나이를 최대한 고려했다고 해야 할까. 그때는 솔직히 몰랐다. 기혼제에 입성한다는 것은 보다 어른스러운 준엄한 마음가짐에서 시작해야 보다 건강히 오래 유지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알았더라면 덜 다투며 더 사랑할 수 있었을까. 자녀라는 새로운 가족구성원을 탄생시킬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이며 가장 인생에서 중요할 수 있는 사회와 국가를 이루는 최소 단위. 꽤나 정치적인 집단일 수 있는 '가족'을 만들기 위한 신호탄인 결혼. '가족'이라는 단체를 보다 건강하게 발전시키려 한다면 더더욱 결혼의 맹세는 진짜 어른의 태도로 해야 마땅한, 좀 더 괜찮은 어른이 되려 하는 사람에게는 분명 생의 온갖 희로애락을 느낄 수 있는 인생의 도장이 될 수 있음을. 좀 더 일찍 깨달았다면 기혼자로서의 우리의 성장통은 덜 했을까. 그것은 잘 모르겠다. 겪어보지 않고서는 원래 모르는 법이니까. 



그이와 결혼을 맹세했을 때 다만 이런 각오는 했었다. 이 선택은 나라는 개인 한 사람만을 위한 것은 아닌 공적 선택이라는 것. 절대 사적일 수 없는 것임을. '가족'의 새로운 탄생과 더불어 그 단체는 국가와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장치로서 이용될 수 있음을. 그리하여 분명 어떤 불합리함과 모순이 정치적으로 숨겨져 있을 것임을 느껴버리고 마는 기묘한 불안함을 은밀히 조장할 수 있음을. 서로를 향한 공적 역할과 양투자의무자로서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 때로는 사적으로 무척이나 고달플 수 있을 부분들이 상대적으로 참 많이 생길 것이라는 상상. 결혼이라는 것은 인생의 달콤함을 위한 게 아니라 그 정 반대를 위해 존재한다는 생각이었겠다. 인생의 위기가 닥쳤을 때 두 사람의 기능과 효력은 비로소 드러날 것이라고. 결혼의 맹세가 제대로 동작하는지 아니면 확실히 깨져버리는지에 대해서. 비로소 화합이 잘 되는 두 사람이라면 생의 위기가 닥쳤을 때 탁월한 효과를 발휘하여 인생의 안전장치로서 서로를 확실하게 지켜낼 수 있음을.




@Frank Dicksee, The End of the Quest, 1921




아이를 강력하고도 간절히 원하던 그이를 '위하기로' 했던 나는 그리하여 피임을 하지 않았고 할 필요조차 사실 느끼지 못했다. 엉겁결에. 어쩌다 보니. 그런 점에서 당신은 탁월한 전략가(!) 였다며 가끔 나는 그를 놀리곤 한다. 아이를 갖는 행위는 사실 당신과 나 두 사람의 격렬할 수 있을 에로스와 섹슈얼리티에 종료 버튼을 눌러 버리게 만드는 아주 확실하고 산뜻한 트리거(!) 였음을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또한 누군가의 배우자가 되고 개인으로는 기혼자가 되려는 사람의 맹세는 사실 자기 자신이 상당수 위태로워지는 경험을 할 수'도' 있는 가능성이 많음을 시사한다는 걸. 우리는 사실 잘 모른 채 이백여 명의 하객 앞에서 감히 '영원을 약속' 했다. 만기 없는 계약을 하기로. 또한 암묵적으로는 법적으로 섹스를 교환하는 가장 이상적인 관계임을 공인받은 사이가 되기를 선언한 셈이었겠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헌신할 것을 맹세했다. 여러모로 자유롭지 않을 수 있음을 모른 채 한 공적 선언... 결혼의 맹세.  



부끄럽지만 결혼이라고 하는 일종의 상대에게 공적으로 '묶임을 자처' 했던 그 맹세를 하면서도 내가 했던 가장 큰 실수적 생각이자 최대 착각은 바로 그것이었다. '자유'. 물론 여기서 말하는 자유라는 단어는 많은 의미를 내재하지만 내가 말하는 기혼자로서의 책임과 자유는 일종의 모순처럼 극명히 대립될 수 있음을. 그때는 몰랐고 지금은 너무 잘 알아가는 중이다. 결혼하면 마냥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에 대해서. 자유로워서도 안 되는 것임을. 그것은 결혼의 맹세에 대한 서로의 예의가 아닐 수 있음을. 기혼시장에 입성한 이들이 성숙하지 못한 채 방탕한 자유로움만을 갈망한다면 자칫 형편없이 외도시장으로 넘어갈 수 있는 아찔한 위험요소를 갖출 수 있는 것임을. 물론 외도시장에 참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어른다움의 자격조차 갖추지 못한 예의 없고 후진 멍청이 같은 방종자들은 여전히 많을 테고... 



어디 그뿐일까. 기혼시장에 입성된 두 사람이 가족계획이라도 세워서 자녀를 탄생시키기라도 한다면 그야말로 '유자녀 기혼자'의 세계는 그전에 살았던 세계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라는 것. 결혼의 맹세를 통해 기혼자로서 함께 한 침대를 공유할 법적 자격을 가지게 되는 관계로서 일종의 '가족 동맹'을 이어 나가려 자처한 두 사람. 그이와 나는 결혼 이후에 더더욱 어떤 성장통을 겪으며 선명히 알게 되어가는 것이겠다. 우리가 했던 결혼의 맹세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이후에 결혼생활을 지속하는 일이야말로 얼마나 여러모로 혹독한 모험이자 탐험일 수 있음을. 심지어 쌍둥이가 태어난 이후엔 도무지 형언할 수 없는 엄청난 미지의 세계를 우리는 함께 통과했었고 여전히 항해 중임을. 끝까지 순항하기를 바라지만 때때로 돌풍이 불어 닥치는 난항과 마주하게 되리라는 각오는 되어 있다..



주기적인 사적 좌절을 경험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바로 결혼생활 아니던가. 상대로 인해 뇌에서 열정적으로 가동되어버리고 마는 도파민과 세로토민. 그뿐일까. 열심히 분출되던 나의 에스트로겐과 당신의 테스토스테론 덕분에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결속된 관계를 자처하는 맹세를 시작했지만 사실 그 결혼의 맹세보다 더욱 중요하게 진지하게 근엄하게 정직하고 확실하게 온 에너지를 쏟아 바쳐도 모자란 것은 바로 맹세 그 이후의 시간이라는 것을. 우리가 서로에게 말했던 '예의'가 제대로 유효해지려면 어떤 태도로 상대 배우자를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JTBC, 인간실격 中. 부정은 정수에게 말한다. 서로 희생은 할 수 있지만 좋아할 순 없게 되었다고. 



그리하여 결혼의 맹세 그 이후에 기혼자로서 일종의 책임과 책무를 생각하며 우리는 다짐해야 한다. 스스로 한 공적 선택에 대한 책임을 다하려는 진짜 어른이 되고자 한다면. 원래 자유는 책임을 기반으로 존재하는 것이니까. 그리하여 나는 스스로 선언한다. 기존의 개인으로서 정해져 있었던 패턴이 서서히 어그러지는 것을 충분히 감내할 것. 더 이상의 '항상' 이라든가 '영원'이라는 것은 없음을 인지하고 서로 아껴줄 수 있을 때 사랑할 수 있을 때 더욱 사랑하려는 노력을 꾸준히 할 것. 또한 소위 말해서 '되는 집'으로 발전시키고자 하는 욕심 많은 아내로서 그이와 나를 비롯한 우리 4인 가족의 화평과 건강한 풍요로움을 만들고자 하는 야심에 응당한 어른스러운 행동을 서로 철저히 해낼 것. 상대 배우자의 의견을 묵살하지도 무시하지 않고 반대로 존중하고 배려하고 때로는 못 본 척 덮어줄 수 있는 도량과 그릇을 확실히 지녀야 함을. 상대의 권위를 우습게 추락시키기보다는 도리어 나로 인해 상대 배우자가 더욱 높은 권위와 명망이 유지되도록 아낌없이 지원하고 조력하는 배우자가 될 것. 기혼생활을 유지하며 예측하지 못한 돌발적 사건사고들로 인해 확실하게 찌그러지고 어그러짐의 사적 과정을 마주하게 되더라도 그 나름의 아슬아슬한 즐거움(!)이 있고 놀라운 성장도 있다는 것을 믿고 나아갈 것. 더 이상 침대 위에서 즐거운 긴장감이 소멸된 채 사라져 간다 해도 반대로 그 긴장 없는 지루한 관계 또한 불시에 종료될 수도 있음을 늘 명심하며 약간의 긴장감 조성을 해서라도 서로를 더욱 즐겁게 아껴줄 것.  



당신이 라스베이거스로 출국하는 오늘... 아마 나는 아이들과 아이들의 친구를 환영하며 양념치킨과 크림소스파스타를 만들 것이다. 그리고 참으로 이기적인 귀여운 인생의 훼방꾼들과 신나게 하루를 지내며 난장판이 된 거실과 집을 치우면서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며 창문을 바라볼 테지. 그리곤 아마 이런 말을 혼자 읊조리게 될 거야. 서른아홉 생일이 별 건가. 당신을 쏙 빼닮은 두 사람이 한 사람의 부재의 자리를 꽉 채워서 정신없이 하루가 그저 흐를 뿐일 텐데. 에르메스 샤넬 루이뷔통 구찌 디올. 명품을 건네려는 당신에게 반대로 LVMH 주가에 대해서 떠들고 마는 멍청이 같은 나라는 인간을 당신은 이제 너무 잘 인지했던 걸까. 특별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일상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럼에도 단 하나. 한 입 베어 물었을 때 너무 맛있어서 미간이 찡그러질 정도의 크리미 한 케이크와 밀크티 한 잔의 시간. 결국 나는 언제나 어떤 '시간'을 사실 너무나 간절히 여전히 어리석게도 갈망하고 바라고 있음을. 그러나 그 열망을 말하지 않고 그저 웃고 사는 이유는 그보다 당신이 약 봉투를 한껏 챙기며 떠난 그 출장 일정을 그저 무사히 마치고 안전하게 귀국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조금 더 센 힘을 가졌기에. 그리하여 이제 내 마음은 당신과 아이들을 향해 언제나 최우선적으로 앞으로도 지고 말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안다. 지는 법을 알아갈수록 결혼의 맹세는 더더욱 굳센 힘을 갖추고 우리의 화평을 확실하게 지켜주고 있음을...



오직 혼자만 아는 비밀을 의외로 간직하게 만드는 세계. 사실 내게 있어 결혼생활은 그렇다. 상대를 많이 아끼기에 도리어 한 사람의 좌절은 아픔은 슬픔은. 철저히 숨기고 삭힐 줄 아는 어떤 지혜가 조금 생긴 걸까. 아니면 우리가 했던 결혼의 맹세를 여전히 유효하게 지키려 힘껏 노력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 안정적이고도 상당수 이상적으로 만들어 놓은 우리의 관계가 언제 부지불식간에 휘발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상상 때문일까. 그리하여 우리가 날마다 맞닥뜨려야, 공유해야 하는, 선언해야 하는 결혼의 맹세는 바로 이것이겠다. 확실한 사랑. 우리는 확실하다고 말이다. 당신과 나. 우리는 확실하게 서로를 지켜야 하며 심지어 확실하게 지키고 싶은 우선순위가 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것이 서로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주던 날. 당신과 내가 건넨 결혼의 맹세에 대한 예의이자 근엄한 약속과도 같은 것. 또한 우리로 인해 태어난 아이들과 당신을 향한 내 사랑은 결국 어느새 내 인생의 대부분을 바친, 절대 소모되거나 사라질 수 없는 유일한 사랑임을. 내 삶이 낡아지고 저물어질 때마다 반대로 그들의 삶은 피어난다는 것을 당신과 나 우리 두 사람만은 확실하게 알아야 함을 기억할 것... 


@zero take, upsplash   (기억으로 영원히 잠가둔 장면들이 존재한다. 내게는 바다. 해 질 녘. 그 시절의 우리. 그런 것들...) 



그런데 확실할까. 정말 확실하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나는 당신에게 여전히 아름다운 단 하나의 확실한 대상으로 유효할까. 우리가 했던 결혼의 맹세는 서로에게 '단 한 사람'이 되어 주겠다는 것이었는걸. 당신은 기억할까. 기억을 바라는 것 자체는 모순인가. 그렇다면 인생의 모순은 어쩌면 거기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확실하지 않음을 확실하다고 믿어버리는 인생과 결혼의 어떤 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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