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에서 부부 그리고 부부에서 부모가 되면서 겪는 변화들 중 가장 원초적일 수 있는 변화는 다름 아닌 에로스의 붕괴일 것이다. 우리는 확실히 말할 수 있을까. 법적인 인정과 접근의 안전지대에 속할 수 있는 나의 배우자를 나는 아직도 열심히 사랑스럽게 탐내고 싶다고. 그렇다면 칭찬받아 마땅한.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는 서로의 배우자가 되어 생활밀착형 커플로서 최선을 다하다 서서히 어떤 열정을 잃어버리기 쉽게 되는 건 아닐까. 사실 로맨스는 밥을 먹여주지 않으니까. 밥은 생존에 필수불가결한 것이고 우리 뇌는 생존에 특화되어 있기에.
의식주를 갖춘 우리의 생활은 멈출 수 없다. 그리고 그 생활은 두 사람에서 네 사람이 되어 버리는 지경에 이른다면 더더욱 생활은 안정적으로 지켜져야 할 뿐 아니라 자본주의 시대에서는 지속적인 레벨업을 요구받기 쉽다. 특히 부모가 된 부부는 생활권역에서 각자의 R&R 을 소화해 내면서 서서히 어떤 것을 잃어버리고 말 테다. 이미 소유한 법적 사람을 '원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는 영역에 속해져 버릴지도 모르는 것. 나도 모르게 어느새.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사랑할 때 이야기하지 않는 것들은 어쩌면 의외로 일상적인 요소에 속할지도 모른다. 가령 대화의 지적 수준. 자본증식의 잠재 가능성. 피지컬적 매력. 생활적 가치관. 자기 관리적 건강미, 위기 대처능력과 같은 지혜 등. 그러나 쉽게 그것들을 이야기할 수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내 기준이 상대의 기준이라고 할 수 없기에. 더구나 사랑이란 나를 확실히 없애고 남을 확실히 내 세계로 들어와 나를 변화시키고 마는 것 아니던가. 그러니 남이 지닌 요소들에 대해서 어찌 함부로 말할 수가 있을까. 사실 그럴 수 없고 쉽지도 않은 것이다. 정말 사랑한다면. 노골적으로 내 기준에서 '아웃'이라 생각되는 부분을 그럼에도 이야기한다면 상대로 하여금 다소 불편한 상상마저 자극시킬지도 모를 테니까. 이를테면 에로스의 붕괴가 그런 것의 일종이라고도 볼 수 있을까. 그야말로 결혼까지 한 마당에 나는 더 이상 너에게 공들일 필요가 없다는! 대단히 속상하지만 지극히 자연스럽게 변해버리고 마는 생각. 그 (남편) 또는 그녀 (아내)를 유혹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생각하고 살게 되는 것이다. 상대에 대해 몰랐기에 생기는 신비로움이 어느새 사라졌다고 어리석게 한탄하면서. 혹은 각자 서로에게 속았다고 뒤늦은 후회랄까.
물론 안타까운 속사정들은 사람마다 커플마다 제각각 다수일 테다. 예컨대 대나무 같은 뻗뻗하게 굳은 몸을 가진 채 어느새 육체의 대화를 하지 않은 커플로서, 한쪽의 심드렁함과 삭막한 일상의 잔소리로 매일 매 순간 상대에게 무섭게 들볶인다 한들. 혹은 댁 내 가족들의 건강한 영양과 야무진 살림 관리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이미 각종 인스턴트 밀키트와 배달음식 혹은 외식과 쇼핑, 자녀 교육의 완벽한 외주화를 일찌감치 세팅해 두고 골프와 브런치, 타자와의 만남과 대화만이 일상이 되어 버린, 소위 집 안의 새는 바가지가 있다 한들. 그야말로 형편없는 배우자 및 상대가 되어 버린, 한 때 자신이 선택한 사랑했던 연인을 두고 이런 말은 쉽게 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더 나은 사람과 사랑을 하고 싶다고. 침대 위에서 너를 안고 있지만 사실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있다고. 특히 더 매력적인 새로운 대상과의 섹스를 언제나 꿈꾸기 쉬운 글러먹은 XY 염색체들은 더더욱 그러할지도.
상대를 배려하고 생각하기에 비로소 사랑할 때 이야기하지 않는 것들이 더욱 많아진다는 것은 어쩌면 인생의 모순을 확실하게 느끼고 만다. 이 시점에서 이언 매큐언의 '체실 비치에서'라는 문학이 원작이 된 영화를 떠올리게 된다. 여 주인공인 플로렌스와 남 주인공인 애드워드는 핵반대 집회에서 만나서 호감을 느끼며 서로에게 빠져든다. 흔히 남녀가 연인관계로 발전하게 되는 수순으로 보이지만 사실 그들에게도 각자의 상처가 고스란히 숨겨져 있다. 에드워드의 어머니는 뇌손상으로 인해 그의 가정생활은 활기가 없고 그의 집에 방문한 플로렌스는 그런 그의 어머니를 잘 돌봐드린다. 그리고 에드워드의 아버지는 그에게 권한다. '결혼해라'라고. 결혼은 때때로 그렇게 얼결에 맺어지기도 하듯이.
한편 플로렌스는 치명적인 유년시절의 슬픔이 있다는 것을 에드워드에게 말하지 않는다. 그녀로서는 그를 사랑할 때 이야기 하지 않는 것. 할 수 없는 것에 가까운 마음이겠다. 왜 아니겠는가. 사랑하기에 할 수가 없는 말이 있다는 것. 사랑하기에 하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는 것에 대해서. 스킨십 없는 어머니와 성적으로 학대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란 플로렌스는 정서적으로 사랑받지 못한 결핍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녀는 섹스에 대한 혐오를 지니며 자신의 욕구와 욕망을 표현해 본 경험이 별로 없는 여성으로 자란다. 하물며 자신의 사랑을 제대로 받아들여진 적도 없었던 유년시절을 겪은 그녀가. 첫날밤 에드워드의 애정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사랑에 대한 열정이 있다 한들 두려웠을 것이다. 플로렌스는 에드워드를 심적으로 사랑하지만 육체적으로는 그 사랑과는 별도로 두려울 수가 있는 것. 에드워드와의 섹스는 그녀에게 기쁨을 더하는 요소가 될 수 없었다. 기쁨을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였을 뿐. 그렇게 두 사람의 첫날밤은 실패. 결국 체실 비치에서 날 선 대화로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말아 결혼한 지 6시간 만에 헤어지고 마는 형국에 처하게 되고 만다. '넌 세상에서 젤 고지식한 여자야, 라 했던 에드워드에게. '그래도 나를 사랑해?'라고 확인받고 싶었던 플로렌스에게. '그러니까 너를 사랑해' 라던 그 순정한 사랑은 도대체 어디에 간 걸까. 사랑의 기쁨을 위해 도대체 남녀는 어떤 대가를 치러야 되는 걸까. 결혼 전이든 결혼 후든.
그녀에게 필요했던 건 그의 확실한 사랑과,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많으니 서두를 필요가 전혀 없다는 그의 다독거림뿐이었다. 사랑과 인내가, 그가 이 두 가지를 동시에 가지고 있기만 했어도, 두 사람 모두를 마지막까지 도왔을 것이다.
- 체실 비치에서, p. 197 -
플로렌스와 에드워드가 만약 체실 비치에서 함께 돌아가 6시간 만에 헤어진 게 아니라 그렇게 서로 결혼을 유지했다면 과연 두 사람 사이의 결혼 생활은 어떠했을까를 상상해 본다. 아마 서로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를 오래 유지하기 위해서 더더욱 말할 수 없는, 이야기할 수 없는, 이야기하지 않는 것들을 많이 감춰둔 채 생활을 지속하지는 않았을까. 반대로 플로렌스가 마음의 빗장을 열고 에드워드가 자신의 몸 안으로 깊숙이 들어오는 걸 혐오하지 않고 오히려 사랑으로 기쁘게 맞이할 수 있으려면, 또한 에드워드도 인생에서 '생기'를 느낄 수 있는 삶은 결국 '사랑' 일 수밖에 없다는 걸 더욱 깊이 알 수 있으려면. 결국 서로 간의 속도와 기다릴 줄 아는 '노력'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을 드러낼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할지 모를 일이다.
구찌의 하운드투스 코트 550만 원, 옥스퍼드 셔츠 89만 원, 캔버스 더플백 460만 원. 에르메스 룰리스 23 가방 1,188만 원. 티파니 빅토리아 로즈골드 목걸이 1,940만 원. 이런 것들을 사실 알고 있지만 안다고 말하지 않고 사는 이유는 열렬히 '원한다'는 영역의 것이 나로서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대신 그이에게 다른 어떤 것을 내내 '원하는' 마음으로서 연애 시절 그리고 결혼 이후에도 줄곧 그 원함을 유치하게 내비쳤었다. 가령 서로 필요할 때 기꺼이 내주는 시간. 내가 좋아하는 소박한 일상의 기쁨 같은 것들을 당신이 기억해 주는 마음. 추운 겨울 카페에서의 밀크티 한 잔과 책 한 권, 과실주를 좋아하기에 늘 미소를 짓고 말게 되는 서머스비나 호가든 포멜로 자몽맥주와 시시콜콜한 일상 이야기, 철학자들의 담론을 진지하게 주고받을 수 있는 지적인 대화, 겨울에 먹어야 제맛인 투게더 바닐라나 하겐다즈의 녹차 아이스크림. 케이크 한 조각과 함께 기꺼이 건네는 다정한 위로의 한 마디. 슬프고 기쁠 때 함께 하는 그런 일상의 작지만 확실한 고마움의 요소들...
나의 원함과 그의 원함의 요소들은 서로 일치되는 부분이 많았다. 우리가 우리로서 함께였을 때 상상할 수 있게 되는 두 사람의 대화적 지적 수준과 생활의 발전적 가능성, 서로를 통해 더 증진되는 매력이나 지혜 등. 여러 면에서 우리는 굉장히 운이 좋은 커플이었을까. 서로를 발견했기에. 특히 나로서는 중요한 '대화'의 영역. 그 대화라는 것을 주고받으며 상대를 면밀히 관찰하다 보니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는 정말 배려 많은 다감한 사람이라고. 나를 더 좋은 여자로 만들게 하고 반대로 상대의 넥스트를 지속적으로 기대하게 만드는 유일한 남자였다는 것. 물론 상대도 그러했을 터이니 그 믿음에 부합하도록 노력하려는 내가 되게 만드는. 우리는 서로에게 그런 사람이었겠다. 그랬기에 결혼이라는 서로를 향한 헌신과 사랑을 맹세했었지. 물론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내며 시간이 흐를수록 어떤 열정은 아쉽게도 잃어버리기 쉽게 되고 만다는 걸 몰랐던 우리는 다만 한 가지는 알게 되는 것도 같다. 상대를 아끼고 사랑하기에 도리어 이야기하지 않게 되는 것들도 새롭게 생긴다는 사실에 대해서.
다만 바랄 뿐이다. 사랑해서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라면 대신 이야기되지 못한 것들로 인해 우리들을 각자 너무 가혹하게 몰아가지도, 자책하지도, 슬퍼하지도 말기를. 차라리 그럴 것이라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여지와 용기를 가지길. 자신을 귀히 여기는 진짜 상대라면 비로소 이야기된 마음은 두 사람 사이에서 사랑으로 다시 재생될 것이라는 믿음이겠다. 물론 사랑에 빠지는 그 시간과 그 이후의 시간, 이야기되는 것과 이야기하지 않는 것 전부 그러하듯 사랑이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세계라지만. 이야기되지 않은 것들 조차 모두 품게 되며 어느새 자신의 온 에너지와 마음을 결국 던져버리게 되고 마는 사람. 그 대상을 어찌 사랑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럴 것이다. 예전이나 앞으로나 계속. 나의 당신. 그리고 그로 인해 생긴 너희 둘.
나를 다 가진, 나를 움직이게 만드는 유일한 나의 세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