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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Feb 11. 2024

단단한 고요

이틀에 한번 꼴로 둘째의 토를 치우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몇 개의 소아과를 전전했고 뚜렷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들려오는 말들은 대체적으로 이랬다. 몇 주 더 지켜보는 정도 혹은 소아 상담을 받기를 권하는 수준. 아이와 내게 다가오는 질문은 예상하는 수준에서 맴돌았다. 학원을 많이 보내는지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지 요즘 아이의 생활이 어떤지 가족과의 관계는 괜찮은지 기타 등등등. 그러나 남편 말대로 소견서를 받아서 상급종합병원에 갈 정도로 심각한 사안 또한 아니라는 것 정도는 직감했었는데. 주변에서 너무 심각히 생각하며 일을 더 크게 만들면 아이는 그 '관심'으로 인해 더 그럴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는데. 조용히 대수롭지 않게 지나가기를 지켜보면서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요'였다. 말로'만' 아이를 걱정하는 이들의 말 따위에 동요되지 말고 직접 아이를 위해 모든 에너지를 쏟아내는 내 페이스대로 조용히 잠잠하게. 그렇게 확실히 더더욱 면밀히 아이를 관찰하면서 살피는 것. 누군가를 돌본다는 것은 언제나 상당한 에너지가 필요했는데 해가 지날수록, 계속해서 키워 내면서 역설적으로 더욱 체감하고 만다. 내가 고단해야 잘 자란다... 



다 쏟아내야 하는 것이 특히 부모의 사랑이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나'를 생각하는 마음에 대해 조금의 여지를 남겨둬야 돌볼 기운도 생긴다는, 그런 알량한 말이 가끔은 위로가 되었다. 그러나 원론적으로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도 행복하다는, 그 진부해서 지루하게 들리는 문장을 애당초 좋아하진 않았다. 그야말로 개소리나 다름없이 들리기도 했으니까. 내가 편하면 반대로 애들을 '대충' 키워지기 쉽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부모 편하자고 핸드폰 쥐어주면 애들은 핸드폰에 빠진다. 외주 기관 뺑뺑이 돌리듯 맡겨 버린 채 학습이든 관계든 관리 없이 아이를 방치하면 반대로 생겨버리기 쉬운 아이들의 우울감은 어른이 감지할 수 없겠지. 몸뚱이 편하자고 밀키트 인스턴트 외식으로 끼니 때우기를 반복하면 대신 그만큼 대가는 따라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결국 아이들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키워진다. 사실은 돈이 문제가 아니라 - 물론 돈이 없으면 실질적으로 더 큰일이긴 하지만 - 누군가의 시간과 상당수의 심신 에너지가 힘껏 필요한 것인데 사실 나이 드신 부모님을 살피는 일이나 간병 또한 마찬가지. 결국 돌보는 이들이 노력하는 만큼 그들은 상당수 고단하지만 모순적이게도 그 돌봄의 수혜를 받는 이들은 반면 그만큼 건강히 무탈히 생활을 지속해 나갈 수 있는 것. 참 모순적이지만, 인생은 그래서 확실히 모순 투성이라는 걸 절절히 체감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모순도 다 받아들여지게 된다. 그러라지 라면서... 나이드는 건 참 좋다... 잘 늙는 건 축복이다. 



그런데 솔직히... 고단함이 끊김 없이 더해만 가면 정말 사람이 가끔 제정신이 아니게도 되는 것 또한 사실이긴 하다. 매일 토를 치우거나 병원을 달고 살며 학습을 챙기고 세끼와 몇 번의 영양간식들을 챙기면 하루가 다 지나간다. 녹초가 되어 버리는 생활 속에서도 틈틈이 뭘 좀 하려고 사부작사부작 대다가도 시종일관 다가오는 돌봄자로서의 생활의 부침은 끊김이 없다. 늘 그 부분이 좀 억울했다. 악착같이 에너지를 24시간 풀 가동해 보아도 1인의 자원은 한정되어 있어서 늘 리소스 한계에 부딪히고 마는 것. 그래도 어쩔 순 없다. 고단함을 선택한 것도 나니까. 강박적으로 '반드시 잘 키워낸다'라는 사명감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모든 걸 직접 챙기고 나선 내 선택으로 인한 이난관은 나만 풀 수 있고 이 짜증과 분노와 눈물과 우울 또한 내 선택으로 인해 생긴 것들이라면 이것도 다 내 몫이고 결국 다 내 책임소관이라는 것......



설 명절 연휴에 시부모님 댁에서 기어코 울어 버렸다. 무엇에 또 심통이 났는지 아이는 시종일관 도마뱀을 사달라고 칭얼대다가 급기야 아이는 내게 말실수를 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상하다. 평소 같으면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 텐데. 무엇에 나도 마음의 나사가 풀려버리고 말았을까. 시어머님 앞에서 그야말로 펑펑 울어버렸다. 그냥 다 속이 상했던 것이었을까. 평생 약 먹고 지내야 할, 당신 아들 챙겨야 하는 며느리. 그것도 모자라 당신의 귀한 손주, 손 없는 집에 아들 두 명 낳아서 여태 그리고 앞으로도 키우느라 나날이 정신과 육신 만신창이 되어 가는 기구하고 박복한 팔자 탓을 부끄럽게도 어머님 앞에서 대 놓고 쏟아붓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언제나 명절 때만 보면서도 아이들 거지 취급하듯 몇 천 원짜리 과자 몇 봉지 건네주면서 아이들이 하는 애교나 인사에도 따뜻한 호응이나 관심 없이 그저 말 주변머리 여전히 없는 큰형님네 부부의 속 좁은 그릇과 인성이 여전히 꼴 보기 싫고 원망스러웠던 걸까... 아니면 나는 무엇이 그리 속상하고 슬프고 억울해서 기어코 어머님 앞에서 울음을 터뜨려버리고 말았을까. 



어머님은 몇 마디를 하셨고 하시는 말씀들 모두 틀리지 않다는 걸.... 알지만 좀처럼 눈물은 그치지 못했다. 올해 설날은 결국 바보 같이 눈물로 막이 내려지고 있었다. 시댁에서도 울고, 5시간에 육박하는 고속도로 안에서 내내 울어버렸고. 새벽에는 첫째 아이가 오줌을 싸는 바람에 새벽에 일어나 이불빨래를 해야 했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허리와 다리와 머리가 아프다는 둘째의 마음이 평온해지도록 그의 비위를 맞추느라 다시 진땀 빼야 했고. 친정에서 엄마가 주신 반찬들과 밥을 먹으면서 억지로 더 많이 먹었다. 눈물이 나오지 않도록.... 콱하고 흐를 같은 눈물을 대신 음식으로 꾸역꾸역 채워 넣어 버렸다...




엄마에게 괜한 심술을 내버린 요즘이었다.... 친정엄마가 계시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데...나는 늘 나중에 후회한다...


산란하고 사나운 시절이 이렇게 다시 지나가고 있지만 지지 않을 생각이다. 지지 않고 싶은 마음만큼은 여전하니까. 가족으로 인해 눈물 마를 날은 없겠지만, 가족으로 인해 다시 살아낼 힘을 얻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가는 이 시절. 다만 내가 조금 더 할 수 있는, 새해에는 더더욱 해내고 싶은 건 다름 아닌 이것이겠다. 



고요. 



세상의, 주변의, 중요하지 않은 정신 사나운 것들에 휩쓸리듯 동요되지 않고, 반대로 내 인생에 중요한 것들에만 제대로 집중하며 잘 지키면서 그렇게 고요하게 흘러가고 싶다는 생각. 아마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할 것이고 또 상당수 난관이 찾아올 테지만. 새해엔 좀 더 단단한 고요로 무장한, 그런 나로 지내고 싶다는 생각을. 



설 연휴에 틈새 시간을 내어 이 글을 쓰면서 소망한다. 

고요하게 나만의 철학과 생각의 기준점이 굳건히 흔들림 없이, 이 시절 잘 지켜내 더욱 나아갈 것을.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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