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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Feb 25. 2024

지나가는 거죠

엘레나 페란테의 '잃어버린 사랑'과 그것이 영화화된 '로스트 도터'를 다시 읽고, 보았다. 중간중간 심장이 멈추듯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심호흡을 해야 했고 그러다 한동안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기를 반복했다. 주체 없이 흐르는 눈물이 멈출 때까지 기다려야 했으니까. 




- 애들이 없으니 어떻던가요

- 너무 좋았어요. 폭발하려는 걸 참다가 결국 터져버린 것처럼 


- 남편과 행복하다면서요. 모든 게 만족스럽다고 했죠.

- 맞아요. 사실 잘 모르겠어요... 어떻게 생각해요?

- 당신이 하고 싶은 게 있으면 해야죠. 


- 지나가긴 하나요?

- 뭐가요?

- 뭐라고 말해야 할지.. 우울증인지 뭔지 모르겠는데... 지나가는 거죠?


- 영화, 로스트 도터 中, 니나와 레다의 대화 - 




자식이란 끔찍한 의무다...라고 말한다면 '이런 나'에게 누군가 비난과 저주를 퍼부어도 이젠 상관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모성신화 따위 내면에서 없어진 지 오래이고 대신 이제 나는 그 모든 사회적 통념을 감당하고서라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아니, 정확히 그렇게 말하고 있었으니까. 혼자서는 언제나. 니나든 레다든 그녀들이 발화하는 문장은 나의 목소리와 같았다고. 차오르는 감정에서부터 끝내 도망치지 못한 채 충실하게 고백하자면. 정말이지 내가 말하는 것 같았기에. 



아이들을 오랜 시간 돌보며 자연스럽게 그이와 나는 우리 각자를 그리고 서로를 돌볼 여유를 잃어버렸다. 아니, 잃어버리고 있는 중이다. 여전히 그런 생각에서 가끔 벗어나지 못한 채 좌절한다. 물론 이 생각은 지혜롭지 못한 자, 끝내 피안에 닿지 않은 채 현실에 허덕이는 이의 핑계로 들릴지 모른다. 맞다. 그렇다. 피안에 닿기는커녕 아이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어느새 아이와 '거래'를 하고 마는 안타까움과 목도하고 만다. 그리고 반성한다. 자책하고 질책하는 것이다. 나 자신을. 내 카르마를. 이건 진짜 사랑이 아니라고. 내가 너희들에게 쏟아붓는 온 심신의 에너지와 시간의 대가로 너희들은 반드시 잘 커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 집착. 결국 무조건적 보리심이 기반이 된 진실된 사랑이 아닌, 그로 인해 얻으려는 일종의 '거래'라는 것을 자각한다. 그러면 다시 좌절과 환멸을 오고 가다 나가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모두 다 내 탓이라고....



영화, 로스트 도터 중, 젊은 시절의 레다와 두 아이...



한 달째. 나는 스스로를 의심했다. 극심한 PMS 때문일 거야, 프로게스테론이 저하되서일 것이라고. 뇌하수체에서 지속적으로 코르티솔이 뿜어져 나와서 그런 것이라며. 내 탓이 아니라 다 호르몬 탓이야 라고. 액체 이외에 고형식을 좀처럼 소화하지 못한 채 먹은 걸 게워내기 일쑤인 한 달째 개인으로서는 엉망진창이지만 역할과 기능적인 면에서는 다행히 식구들에게 내색 없이 무던히 잘 지내고 있으니 다행이기도 하다고. 이 얼마나 모순일까 싶지만. 그렇게 스스로 조소하듯 위로하듯 자위하듯 파이팅을 외치면서 매일 새벽 운동을 하고 미친 듯이 달리고, 미친 듯이 읽어 해치우는 나날들. 



우습지만 그렇다.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고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가고. 세끼 따뜻한 새 밥과 건강한 식탁을 준비하기 위해 매일 몇 번씩 식재료와 제철 식재료를 준비하고 소분하고. 헹여나 토하기라도 할까 봐 아이의 눈치를 면밀히 살피면서 헛기침을 하거나 아이가 트림을 할 때 좀 더 신경이 예민해지고. 그러면서 틈틈이 메일함을 확인하며 예상했던 부정적 답들을 듣게라도 되면 묘하게 구겨지고 마는 기분. 그런 기분과 마주해도 생활은 이어진다.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다. 왜? 난 너희들 엄마니까. 절대 포기할 수 없는, 포기하지 못하게 된 사랑. 이제 완전히 엄마로 살고 있는 이 시절의 시간들. 나는 망가지고 있어도 너희들을 망가지게 절대 놔두지 않겠다는, 참 초라하고 서투르고 부끄럽고 뒤틀린, 이런 사랑일지라도.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우리는 자신이 더 완전해졌다는 느낌을 받는 경우가 있고 흔히 그것을 나는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기쁨을 주는 감정. 기쁨의 대상은 다름 아닌 사랑. 그런데 어쩌지. 인생이 너무 모순 같아서 기쁘면서 동시에 최악의  슬픔을 주는 대상 또한 사랑이라면 이건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한단 말일까. 어떤 사랑은 최선의 기쁨을 주지만 동시에 최악의 슬픔을 낳기도 한다는 것에 대해서. 부끄럽고 못난 고백일 테지만,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을 기만하고 싶지 않다. 그러니 솔직할 수밖에. 너희들과 24시간 온종일 붙어 있으면서 챙기고 살피고 돌보고 가르치다, 가끔 손목을 그어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일지언정 - 실제 그러진 않았지만 - 그 정도의 균열과 흔들림으로 묘하게 정신의 끈이 탁 하고 끊어져버리고 말아서 갑자기 돌아 버리기도 한다는 것에 대해서. 가족을 위해 살면서도 동시에 그 가족으로 인해 이 세계에서 하루라도 빨리 증발해 버리고 싶기도 하다는 것에 대해서. 당신을 사랑하지만 왜 나는 점점 당신과 닮은 이들만 사랑하게 되고 마는지에 대해서. 아이들에게 잠식당하는 우리의 시간이 마냥 숭고하고 고귀하다고 우아하게 표현하는 건 반대로 우스운 절망이기도 하다는 것. 



그이가 매일 세 번의 약을 챙겨 먹고 아무렇지 않게 아이들의 좋은 유년시절의 기억을 만들어 주기 위해 분투한다는 걸 너무 잘 알기에. 나는 요즘의 '이런 나'를 그이에게 보이지 않는다. 아마 앞으로도 영영 보이지 않을 것이다. 대신 매일의 안부와 건강 상태를 관찰하며 확인하겠지. 대화의 대부분은 아이들을 중심으로 흐르고 이 시절은 확실히 그러해야 유지되고 앞으로 10년 정도는 더 그래야 할 테지만. 각오는 되어 있지만 어째서 나는 계속해서 분함과 분노를 좀처럼 삭이지 못하고 마는지. 무자식 상팔자라는 옛 말을 붙잡고 울어버리고 싶기만 한걸... 



여러모로 다시 무너지기 시작한 나는... 다만 지나가 보는 중이다. 이 시절이 너무 크게 흔들리지 않기를 기원하면서. 떨어질 수 없는 존재들로 인해 너무 아파하지 않기를. 부디 고통스러운 만큼 지혜도 같이 생기기를. 거래가 아닌 진짜 사랑을 할 수 있는 마음의 도량을 쌓을 수 있기를. 피안에 닿을 수 있는 청정한 마음으로 매일 침묵하기를. 참고 참고 또 참아도 부디 괜찮기를. 그렇게 매일 같이 입술을 깨물며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는 이 말이 진실과 현실로 다가오기를.



지나가는 거죠...



마음은 강릉 바다에 있다... 매일. 상상한다.... 피안에 닿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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