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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Feb 04. 2024

붉은 실


아리아드네는 신성한 여인이자 동시에 버림받은 여인이라는 모순적 상징과 어원을 지닌 그리스 신화 속 크레타 왕 미노스의 딸이다. 그녀는 헤라클레스에 비견되는 테세우스라는 영웅을 연모했다. 그가 반인반수의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무찌르고 크레타의 미궁 라비린토스를 빠져나올 수 있었던 건 아리아드네의 공이 컸다. 다름 아닌 '붉은 실'을 통해서.



테세우스는 아리아드네의 붉은 실을 따라 미궁을 빠져나왔다. 그러나 그는 그녀 곁에 머무르지 않았다. 윌리엄 워터하우스의 '아리아드네'는 그 장면이 담겨있다. 아리아드네는 잠들어 있다. 뒤의 배경으로는 떠나가는 배가 보인다. 아마도 테세우스의 배일테다.  그녀가 사랑했던 영웅. 그러나 아리아드네가 잠든 틈을 타 떠나가는 사람. 대부분의 미술사학에서 이 그림은 이렇게 해석된다. 아리아드네가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한 이성에게서 버림받고 있다고. 그러나 정말 그러했을까. 그러기에 아리아드네의 곤히 잠든 자태와 몸짓은 여전히 매혹적이고도 무척 평온해 보인다. 무엇보다 그녀가 입고 있는 붉은 옷. 그 무엇에도 지지 않을 무언의 열정을 대변하는 듯한 빨간 드레스는 아리아드네의 것이었기에 더욱 빛나 보인다.



그러나 사실 아리아드네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를 연모한 주신(酒神) 디오니소스는 표범으로 변해 잠든 아리아드네 곁을 지킨다. 지킨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틈새를 노려 그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 했던 것인지는 알 수 없겠다. 다만 분명한 건 그녀 곁에는 두 존재가 있었다는 것. 말없이 떠나가는 존재와 조용히 곁을 지키는 존재. 사랑이 만약 양가적인 것이라면 이 장면은 확실히 '사랑'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자신의 사랑을 지키지 못했지만 그녀는 나름대로의 최선을 다했음을. 그것이면 충분하다는 듯이 곤히 잠든 아리아드네의 곁엔 여전히 사랑이 숨 쉬고 있음을. 떠났지만 결국 새롭게 재회되는 것. 사랑은 양가적이면서 동시에 영속적인 것은 아닐까.



@John William Waterhouse,  Adriadne, 1898



'아모르파티'라면서 삶의 고통조차 받아들이며 삶 그 자체를 사랑하라던 철학자 니체는 그의 시집 '디오니소스 송가'에서 화자 아리아드네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지.



현명하라, 아리아드네

너는 작은 귀를 가졌으며, 너는 내 귀를 갖고 있으니

그 안에 현명한 말 하나를 꽂아놓아라.

자기에게서 사랑해야 하는 것을 먼저 미워해서는 안되지 않겠는가.

나는 너의 미로이다.



생각해 보면 삶은 미궁의 연속이겠다. 생각대로 흐르지 않는다. 때때로 슬프고 억세고 사납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런 삶을 저주하지 말라는 것. 운명이 주어졌다면 그것을 적극적으로, 되도록 긍정적으로 따르고 나아갈 것을. 니체라는 위대한 철학자는 분명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만 같다. 받아들이면서 묵묵히 자신의 삶을 사랑할 것을. 붉은 실을 건네주었던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말고, 그 어떤 결과에도 미워함 없이 그대로 현재를 사랑할 것을. 아리아드네에게 니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것뿐이었을까. 아니면 '나는 너의 미로'라면서 비록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그럼에도 네 곁에 있으니 혼자라는 사실을 너무 비관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다정하게 건네고 싶었던 걸까. 바그너의 아내 코지마를 '아리아드네'라고도 불렀다는 니체... 당신은 어찌 그리 단단할 수 있었던 걸까. 그 흔해 빠진 평범한 사랑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것 같았음에도. 휘청거리지 않은 그 기개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이었을지.





자주 반신욕을 한다. 잠깐이라도 물속에 들어가 있으면 그제야 숨을 쉬고 있는 내가 느껴져서다. 눈을 감는다. 그제야 살 것 같은 것이다. 내내 숨 쉴 수 없는 혼탁함에 미쳐버릴 것 같을 때 여전히 모자라고 나약한 인간은 어느새 눈물이 터져 나오려 한다. 입술을 꽉 깨물고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 보면 어느새 저녁이 되고 석양이 지는 것을 창문 밖을 통해 발견한다. 그제야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나도 모르게 숨을 고른다. 드디어 반신욕 할 시간이 되어 간다는 것... 내내 긴장했던 정신과 육신이 조금은 이완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는 것. 그러나 아직도 멀었다. 동시에 묘하게도 억울함이라는 감정은 좀처럼 씻기지 않고 마니. 도대체 언제까지 '시간'을 갈망하며 살까 라며. 도대체 언제쯤 제대로 된 해방을 맞이할 수 있을까 라면서. 죽어야 끝이 나는 게임인 셈인 걸까 라며 부끄러운 자조를 하면서...



인간은 복잡하고 이율배반적이다. 모순 그 자체이고 자기 자신 스스로 한 선택으로 인해 딜레마에 빠지고 마는 존재. 그렇다. 나는 확실히 내 선택에 의해서 내 행동으로 인해서 미궁이자 미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안다. 내가 만든 사랑은 나를 동시에 옥죄어 확실히 가둬둔 미궁이 되고 말았으니까. 아이들로부터 나는 벗어날 수 없다... 가족을 선택한 건 나였다. 그리고 그들이 삶의 최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확고한 가치관에 힘을 싣는 주체도 나라는 걸 아니까. 그런데 동시에 참으로 형편없는 생각을 하고 마니 이것이 패러독스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일까. 그 가족이 때때로 너무해서.... 소스라치게 무겁게 느껴지고 만다는 것...



이것은 확실히 자신만 아는 감정이고 좀처럼 풀 수 는 난제이자 모순이라는 걸 안다. 동시에 그 누구도 해결해 줄 사람은 없어서 숨이 탁 하고 막혀서 그대로 증발해버리고 싶은 극한의 지옥 같은 마음의 늪에서 허우적댈 때. 이 문장을 떠올린다.  '아모르파티'. 운명을 사랑하라는 말... 스스로 만들어 버린 미궁임을 잘 알고 있다면 반대로 기꺼이 사랑해 버리라고 말해주는 것 같은 말...



좀처럼 묘한 분함이 가시지 않은 요 며칠 동안 모든 일은 엉터리 같이 꼬여만 갔었다. 접시를 깼고 발등은 찍혔고 싹이 난 당근들을 깎다가 살점이 도려나갔고 지혈은 좀처럼 되지 않았다. 원래도 저혈압에 빈혈수치는 높았었는데 갑자기 핑 하고 세상이 샛노랗게 보였을 때 그대로 부엌에서 잠깐 일시정지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생활은 일시정지 되지 않는다. 아이들은 다투다가 깔깔 대다가 거실은 그들 나름의 파티로 언제나 시끌벅적하며, 요 근래는 특히 자주 토하는 아이 덕분에 언제나 토사물을 이틀에 한번 꼴로 치워야 했다. 다른 건 다 견딜 수 있다 치지만 늘.... 나를 구겨지게 만드는 건 무릎을 꿇고 온갖 음식물 건더기로 범벅이 된 바닥을 치울 때다. 이상하게도..... 나는...... 살고 싶지 않아지고 마는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우스운 자조도 하고 만다. 이불 빨래  매일 하지 않는 게 어디야 라면서.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라면서....



견디기 쉽지 않은 사나운 시절. 나날이 쳇바퀴 같은 도돌이표 같은 생활. 휘몰아치는 시간의 폭풍 한가운데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술을 깨물고 눈을 질끈 감아버리면서도 움직이는 것뿐이다. 청소를 하고 설거지를 하고 토를 치우고 지혈이 되지 않은 채 시큰거리는 왼손바닥의 아픔에도 아랑곳없이. 묵묵히 조용하게 내 일을 수행해 나가는 것뿐이라는 걸 안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조금의 여유가 나면 공병과 스포이드를 준비하고 여러 향들을 조합하여 오늘의 향을 만들어 낸다... 마음 깊숙이 언제나 상상했던 공간과 장면을 떠올린다. 그리고 눈을 감는다. 눈물이 흐른다.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지금은 너무나 형편없고 하찮고 보잘것없는 나약한 인간에 불과하지만.



붉은 실.

자꾸만 나쁜 생각을 하고 마는 나를... 기꺼이 건져내 올릴 것이라는 생각을. 오늘도 반신욕을 하면서. 눈물을 닦아내고. 생각했었다. 붉은 실타래는 애당초 발견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야 하는 것임을. 삶이라는 미궁에 빠졌을 때 나는 나를 괴롭히는 탁월한 재주로 인해 자신을 한없이 깎아내리는 지옥을 살아내느라 여전히 자주 힘들어하지만. 나는 오늘도 내게 말을 건넸다. 너만이 너를 건져낼 있음을. 그래야 사랑할 힘도 다시 생길 것임을. 그리고 또한. 아직 영원히 잠들 수 없음을 확실히 아니까. 그 확고한 의식과 책임감 덕분에. 나는 괜찮을 것이다....



                     

붉은 실타래가 없어도. 미궁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시간은...신이니까...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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