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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Jan 21. 2024

사랑의 이해

불변의 고정값이길 바라던 사랑은 어째서 유동적 변동값으로 점점 변하게 되는 걸까. 그리하여 언제나 생각의 결론점은 여기에 머무르고 만다. 사랑은 애당초 논리적으로 확실하고 명쾌한 답을 구할 수 있는 영역의 것이 아니라고. 다만 사랑을 함으로 인해 이익 혹은 손해라고 하는, 묘하게 불편하지만 확실히 우리가 애정전선의 과정 속에서 느끼고 마는, 형언이 쉽지 않은 온갖 감정들을 결국 사랑하는 사람들은 느끼게 되고 말 테니. 그러니 사랑의 이해(利害)로 인해 우리는 그 사랑이라는 것을 절대 이해(理解)할 수 없게 되고도 마는 것은 아닐까. 말장난에 가까울 수도 있을 테지만. 사랑을 진심으로 '이해'하려면 처음부터 그 득실을 따지려는 '이해'를 배제한 상태에서야 비로소 이해 가능한 것은 아닐지. 



또한 사랑이라는 것이 마냥 행복하고 좋은 감정을 느끼게 만드는 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물론 좋은 감정만 생긴다면 그야말로 지속가능한 형태의 더없이 기쁜 사랑의 형태겠지만. 어디 인간사에서 사랑이 그리 쉬웠던 적이 있었을까. 그럴 리가. 사랑은 제대로 한다면 굉장히 많은 정신적 피로와 희생을 감내해야 한다. 정녕 사랑하는 사람들은 결국 자신보다 상대를 더 챙기게 되고 마니까. 그러니 정서적 교류와 진정한 애정의 교감 없이 다만 육신의 감각에 의존한 원초적 친밀감인 정욕을 우리는 때때로 사랑이라고 포장하며 시작과 끝을 맺기도 한다. 건강함이 빠진 인스턴트식 사랑이어도, 사랑을 갈망하려는 욕망이 살아 있는 시대는 그나마 다행일지도 모를 일이다. 



뜬금없이 들릴테지만 이미 저출산 고령화가 상당히 심각한 사회적 현상을 가만히 생각해 보자니. 결국 어느새 사랑 없이도 충분히 즐겁게 만드는 요소들이 가득한 물질만능 초고속 세상이라. 가뜩이나 생존에 피로한 세계 속에서 더욱 피로한 희생과 감정을 요구하는 사랑을 애당초 포기하고 마는 문화가 교묘히 되어버리는 것 같은 것이겠다. 유튜브, BJ, 먹방, 게임. 이것들은 사랑보다 덜 피곤할 테니까. 사랑이란 무릇 자신의 살아 있는 에너지와 물리적 시간, 일정 수준의 경제력과 감정을 충분히 투여해야만 비로소 생성과 화합과 유지가 이뤄지는 것일 텐데, 냉정하게는 그런 과정은 인간으로 하여금 피로도를 쌓게도 만드니까 애당초 연애도 사랑도 누군가를 만나려는 용기 아니 시작 조차 하지 않고 '나'만 챙기며 사는 것을 택해버리는 것일 테다. 나쁘다고 말할 수 없지만 묘하게 애석하다곤 솔직히 말하고도 싶어 진다. 결국 사랑 앞에서 '이해득실'을 따지기에 그런 이들은 사랑을 쉽게 포기하게 되는 것 같아서. 사랑하는 연인을 발견하려는, 사랑을 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는 이미 온 데 간데 사라진 채 그저 유튜브를 틀어 놓고 먹방을 즐기던가 미디어나 인플루언서와의 단편적인 온라인 교류를 통해 느슨한 사회적 관계를 화면 속에서 소비해 버리면 그게 더 편하고 쉬우니까.



다만 아쉽고도 애석한 부분은 그런 부분일 테다. 사유와 깊이 있는 인문성은 점점 결여된 채 기술만이 끝없이 진화하고 점점 먹고사는 생존적 위기와 위협이 대두되는 시절 속에서 '사랑'이라는 가치는 평가절하되어 버리고 마는 것 같아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주는 것의 큰 이점과 가치는 결국 사랑으로 인해 그것이 주는 생을 향한 무언의 생동한 열정,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어느새 변하게 되고 마는 자신의 재발견. 때로는 무의식에서 솟구쳐 나오는 격렬한 용기. 사랑하는 사람들은 여러 감정의 굴곡들을 겪어가면서 비로소 내적으로 성숙해지는 걸지도 모를 일인데 말이다. 물론 아프고 시린 과정이 또한 사랑일 테지만.



그런 사랑을 어찌 감히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러니 이해할 수 없지만 나로서는 최근 어떤 미술 작품 하나를 발견했을 때. 단번에 이 생각이 들고 말았다. '사랑의 이해'. 어쩌면 그림 속 두 사람, 특히 한 사람의 마음이야말로 득실을 따지지 않은 상태의, 정녕 사랑을 이해하고 있는 순정한 용자의 모습으로 보였기에. 현시대 우리가 잊고 살기 쉬운 고결한 무엇. 사랑을 향한 귀한 마음과 정신. 나는 이 그림 속에서 발견한 것 같았기 때문일까. 사랑을 이해할 수 없다지만 사랑을 이해하고 싶은 사람으로서 발견한, 최초이자 최후의 마음이 보인 것 같아서. 



@Joseph Wright,  The Corinthian Maid,  c.1782 - c.1785 



18세기 영국 화가 조지프 라이트가 그린 '코린토스의 처녀'라는 이름의 이 그림은 구전으로 전해지는 하나의 전설을 소재로 한 그림이다. 그리스의 코린토스 지역에 한 소녀가 있었다. 그녀에게는 은혜하는 연인이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먼 나라로 그를 떠나보내야 했다. 떨어져 있어야 하는 의도치 않은 상황, 그 속에서 슬픔과 안타까움에 빠진 그녀는 어떻게 해서는 그를 곁에 두고 싶어 하는 절절한 마음 끝에, 사랑하는 연인과 떨어져 있는 동안에도 그의 모습을 계속 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그리고 떠올린 묘책은 바로 그림이었다. 잠든 연인이 기댄 벽에 비친 그의 그림자를 따라 사랑하는 연인의 형상을 그대로 복원시키듯 그리는 것이었다고. 그림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처럼 남자의 등잔불이 밝게 비추는 벽 쪽으로 그를 데리고 가, 등잔불로 인해 생긴 그림자를 따라 연인의 윤곽을 정확하게 그녀는 그려나갔다 한다. 연인의 부재를 극복시키려는 애틋한 그녀의 염원과 정서. 



'코린토스의 처녀'를 바라보며 사랑이란 명사로 이해할 게 아니라 '동사'로 이해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녀야말로 자신이 택한 사랑을 확실하게 이해하기에 그 사랑을 지키려는 의지와 열정이 그녀를 움직이게 만들었기에. 단순한 존재 상태가 아니라 시간과 사건을 통해서 사랑이란 계속해서 진화하고 변화하고 또 발전하고 성장해 나갈 수 있는 귀한 생의 흐름이라는 것. 결국 그러하니 사랑이란 명사일 뿐 아니라 동사로서 결과를 가져오는 의도이자 인간의 의지가 담긴 확실한 행동일 수 있는 것이겠다. 우리는 사랑을 발견하려는 노력을, 유지하려는 애씀을 기꺼이 맞이한다. 물론 때로는 벗어나려는 노력을 할 수도 있을 테지만. 궁극적으로 사랑은 감정과 어떤 심적 물리적 헌신과 그로 인한 행동들을 다채롭게 요구하게 되고 마는 것이니.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사랑이라지만 결국 이해할 수 없어도 상대를 이해하고 싶은 것. 반대로 상대로부터 이해받고 싶은 것... 사랑이란 원초적인 에로스, 욕망, 배려, 황홀경, 질투, 애증, 분노, 슬픔, 상실, 혼란, 열망, 야망 기타 등등, 우리 마음속에 깊이 박혀 있는 여러 원초적이고 감각적이면서 지극한 현실적 감정의 혼합을 다채롭게 낳는다. 그 속에서 진정한 사랑이란 단순한 집착이나 호기심 어린 열정 수준을 넘어선 특히 더 순정한 헌신과 책임이 수반되어 결국 '우리'라고 하는 새로운 결합체를 탄생시킨다. 그리하여 나라고 하는 자신을 조금 더 확실하게 변화시키고 새로운 도전을 하게도 만드는 인생의 엄청난 사건. 그것이 바로 사랑이 아니던가. 많이 부족하고 어설프고 여전히 모자라서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내가 생각하는 사랑을 향한 이해는 바로 이런 지점이겠다. 내게 맞닥트린 사랑이라는 사건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긍정하려는 애달픈 강함. 끝까지 이해받지 못해도 사랑하려는 간절한 용기. 사랑하기에 흘리는 눈물을 기꺼이 맞이할 초연한 마음...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생각했을 때. 나는 늘 결심했었다. 내 선택을 후회로 만들지 않을 것이라고. 내 선택이 옳았음을 스스로 증명해 낼 것이라고. 설령 돌이켜 실망스럽고 후회되는 순간의 늪에 빠져 내내 울고 마는 내가 존재할지언정. 기꺼이 내 눈물의 대가를 짊어지고서라도 내 마음이 옳았음을 나 하나만큼은 믿고 지켜낼 용기를 포기하지 않겠노라고. 당신과 연인이 되고 부부가 되고 부모가 되어 가면서 처음 우리의 에로스적 황홀함은 서서히 소실되지만 대신 아가페에서 펠로스, 그리고 스토르게에 가까운 형태의 또 다른 새로운 사랑들로 이해되어 나아가는 시절을 함께 지내게 되며 우리는 더욱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될까. 



이해받지 못하는 순간이 여전히 존재할 테지만. 나는 당신을. 당신은 나를. 이해하면 좋겠다는 그 마음을 이해하기를 바라는 희망... 어쩌면 그 희망이 있기 때문에 나는 '우리'로 만든 이 사랑을 계속 지켜 나가게 만드는 동력을 만들어 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로서는 때때로 여전히 사랑이라는 것이 너무 어려운 인생의 숙제 같기만 해서. 내가 만든, 내가 선택한, 그리하여 내게 다가온 사랑을 현실이라는 굴레 속에서 지켜낸다는 것 또한 만만찮은 시시포스의 형벌 같은 순간이 잦지만. 그렇지만. 



크린토스의 그 소녀처럼...'기꺼이 사랑할' 마음을 내내 이곳에서 글로 써서 남기려는 것 또한. 글로 기록된 것만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기에. 영원할 수 없는 우리가 영원할 수 있는 유일한 것. 그것은 오직 글뿐이어서. 이해하고 싶은 마음.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이해받고 싶은 마음... 이해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이해하려는, 이해한다는 마음이야말로. 



사랑의 이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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