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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Jan 14. 2024

결혼하면 사랑일까 3

몇 주째 각종 물약과 알약에 의지하는 생활이 이어지는 중이다. 목소리는 돌아오려다가도 여전한 이물감에 도통 편안한 발성은 되지 않는다. 말을 하지 않는다면 좀 더 빨리 호전될 수도 있을 텐데. 그러나 어찌 그럴 수 있을까. 그럴 리가. 가만 놔둘 리는 없지. 싸우지 않으면 천만다행인 걸. 이처럼 설거지를 하다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내뱉고 만다. 생각이 가시려던 찰나 오늘도 건강하고 씩씩하게 자라는 중이라는 것을 보란 듯이 증명하듯 아이들의 움직임과 목소리는 거실을 가득 메운다. 방학이라 에너지는 더욱 댁 내에서 열렬히 발산되는 중이다. 재빨리 고무장갑을 벗겨내고 오른쪽 귀에 꽂은 갤럭시 버즈의 음량을 한층 더 높인다. 경쾌한 멜로디가 고막을 더욱 자극시킨다. 미간을 찌푸리게 만드는 찰나의 순간엔 음악에 의지한다. 그것도 몇 분 가지 못하고 말지만. 



괴테의 문장을 일찍 알았더라면 나는 결혼하지 않았을까. '사랑은 이상이고 결혼은 현실' 이라던 말. '현실과 이상을 혼동하면 반드시 벌을 받는다' 던데. 그렇다. 그렇다면 나는 확실히 벌을 받고 있다고. 부끄럽지만 계속 생각해 왔다. 이 삶은 정녕 상일까 벌일까. 아니면 생각하기 나름일까. 아무렴... 무엇이든 일단, 자신의 몸이 피곤하고 건강하지 않은 와중에도 자신보다 더 아끼게 되고 마는 대상을 향해 심신을 모두 던지듯 돌보고 지키는 시간들은. 정말이지 고되다. 정말 한없이 그러하다... 딱히 적당한 국어적 문장을 찾는 데 늘 실패하듯. 말할 수 없을 만큼...



참으로 부끄러운 자백일 수 있지만 자주 신을 원망한다. '어째서 나에게 도대체 왜.' 그리고 앞으로도 몇 십 년은 그러할지 모른다. - 아이들이 성년이 되면 좀 괜찮아질까, 모르겠다... - 결혼 이후 두어 번의 유산. 그리고 연이은 가임과 출산과 양육이라는, 누가 보기엔 꽤 자연스러운 수순일 수 있지만 도무지 나로서는 그 모든 과정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마는 시간들이었다. 초산의 아들 쌍둥이는 정말이지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였다. 물론 여전히 키우는 과정들은 첩첩산중, 절대 쉽게 넘어가는 일은 없다. 그야말로 산 넘어 산... 돌봄의 세계에 끝은 없는 법. 좀 극단적으로 비유하자면 누구 한쪽이 생을 마감해야 비로소 끝이 난달까. 그만큼 심적으로 체력적으로 여간 힘들어서 나가떨어지고 마는 생활적 순간들과 자주 당면하다 보면 조용히 깨닫게 되고 마는 것이 있다. 조소처럼 느껴져도 어쩔 수 없겠다. 이처럼 극악무도한 게임은 없을 것이라고. 결혼을 하고 부모가 되어 산다는 건, 판돈 떨어졌다고 해서 쉽게 끝낼 수 있는 게임이 아니라는 것. 심지 깊은 각오 없이 함부로 덤벼서는 큰 코 제대로 닥친다는 것. (그러니 엄마... 도대체 당신은 우리 남매 어떻게 일하시며 키워내셨는지 말입니다... 그 정신은 제정신이었단 말입니까...) 



집, 결혼, 부모 됨은 그이와 내가 막연히 바랐던 가장 고귀한 인생의 가치였다. 물론 그 가치를 이뤘고 지키려 노력하는 우리 부부는 대신 얻는 것이 있다면 잃는 것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의도치 않게. 다만 말하지 않을 뿐. 우리가 '우리'를 선택함으로 인해 대신 잃게 된 것이 확실히 있음을. 집안청소와 섹스 중 뭘 선택할지 그가 내게 묻는다면 당연히 현실에서 나는 코드제로를 잡고 마는 것을. 청소는 내 삶에서 무시할 수 없는 영역인걸. 끝없는 댁 내 산재한 일과 가족들의 여러 치다꺼리로 인해 나의 심신은 끊김 없어야 하는 와이파이처럼 움직일 수밖에 없는 걸. 그로 인해 온갖 짜증이 한껏 밀려오다가도 해야 할 일들을 말끔히 끝내고 나면 그제야 묘한 뿌듯함과 생활의 주인이 되었다는 가학적 통제권과 효율성을 손에 쥔 느낌마저 들고 마는 걸. 



그래서 가장 좋아하는 하루의 시간대는, 석양... 해 질 녘. 저녁이다. 밤이 돼서야 혼자가 될 수 있으니. 



정자와 난자의 결합이라는 남녀의 사랑을 통해 아기가 태어나는 순간 묘한 직감으로 알았다. 우리의 로맨스는 확실한 위험에 처하는 모순이 발생할 것임을. 섹스는 부부 관계를 움직이는 활력소일 테지만 확실히 자녀가 태어나고 나면 그것은 남자와 여자라는 사적인 우리 두 사람을 산뜻하게 갈라놓고 말 것임을. 나로부터 그이는 확실히 내팽개쳐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 또한. 그이도 모를 리는 없었겠지만 정말 그토록 

무자비하게 우리의 삶을 기쁘고도 슬프게. 아슬하고도 아찔하게 난장판으로 만드는 엄청난 아이의 존재를 키우면서 우리 부부는 절절히 깨닫는 것이겠다. 



자녀 유무는 그만큼 엄청난 격차를 만들어낸다고. 모든 대상과의 관계가 바뀌어버리는 가히 심리적 혁명이 일어나는 엄청난 사건. 삶의 우선순위는 드라마틱하게 바뀌어 버리는 것이다. 신혼부부로서의 그와 나의 역할은 확실히 재정립되고 자유와 책임의 균형에 거침없는 전면적 재정비가 확고히 이뤄진다. 2인에서 졸지에 4인이 되어 버렸을 때. 당신과 내가 통과했던 그 시간들은 -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 엄청난 지층변화였음을. 체감적으로 통감하며 그저 묵묵히 견디듯 뚫고 나아갈 뿐. 후퇴는 없다. 있을 수 없다.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돌이켜서도 안 되는 영역의 것. 결혼. 출산. 양육. 부모로서의 남은 생... 



이쯤에서 결혼하면 사랑일까 라는 질문에 나는 정말 멍청이 같은 대답을 혼자 하고 만다. 연민과 걱정과 그로 인한 동지애적 파이팅도 사랑의 영역에 속한다면 아무렴. 그렇고말고. 정녕 그것이 사랑이라면 결혼을 해야 비로소 알게 되는 엄청난 사랑이 존재할 수 있음을... 사랑스럽고 징글징글한 인생의 돌연변이 같은 귀여운 침입자들이 우리의 인생에 들어오면서부터 부모의  생을 살기 시작한 그이와 나는 사적인 인간으로서의 연약함과 통제 불가능에 대한 걱정을 한껏 짊어지면서도. 우리는 나아간다. 나아가야 한다는 걸 아는 '어른'이 비로소 되어 감을 느낀다. 



결혼 생활과 부모 됨에는 확실히 일정 수준 이상의 엄청난 이타심이 필요하니까. 그 이타심은 인간이라는 종이 지닌 얄궂은 이기심과는 절대 공존하지 못한다. 타인을 돌봐야 하는 여성은 특히 자신의 욕구에 집중하고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며 성욕을 표현하고 무책임하게 굴기가 상당수 어렵다. 왜 아니겠는가. 본성은 남자에게만 있는 게 아닌 걸. 성적인 즐거움을 얻으려면 자신에게'만' 온전히 몰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걸 여자인 나'도 그 정도는 안다. 다만 알지 못하는 '척'을 할 뿐이지. 그리고 어디 나뿐일까. 많은 유자녀 기혼녀들은 가족을 보살펴야 한다는 부담과 실제 양육으로 인한 피곤에 절은 몸은 그 자체로 강력한 성욕 억제제가 되고 마는 걸. 유자녀 기혼 남녀에게 공통된 특징(?) 일 수 있지만 특히 여성은 남성 대비 더욱 극심한 환경에 처하고 마는, 지극한 현실. 



에로스라는 영역에서 성공의 기준이 만약 성욕의 회복이라면, 여기에 성공한 커플들은 극히 드물지 않을까. 심지어 우리는 일부일처 기혼제라는 제도 아래 놓인 불쌍한 인간들이니만큼. 이미 법적 관계로 묶인 사람을 '원하는' 일이 어디 그리 쉬이 가능하던가. 설마. 그럴 리가. 그이도 나도 아는 진부하지만 확실한 사실이 확실한 증명이 되어 주고 마는 걸. 우리는 아이들을 가졌기에 이제 그들 없는 '부부'가 될 수 없다고. 그 언젠가 그이가 웃으면서 했던 농담엔 슬픈 진실이 들어있다는 걸 나는 모르지 않는다. 그리고 그 생각에 동의하는 나 또한 마찬가지일 테고. 물론 내 의지와는 다른 방향의 현실이었지만... 우리는 온건한 삶을 살고 있다. 아이들로 인해 더더욱 '완전한 사랑'을 한다 했었다. 그리하여 인생을 그들 없이 내던지는 게 어떤 건지 알 수 없을뿐더러 안다 해도 그럴 수 없음 또한 너무 잘 아는 두 사람이 되어 버렸다는 것.  



좁았던 침대가 어느새 넓어질 줄은. 




요즘 부쩍 남편이 코피를 흘린다는 걸 알게 되었다. 식사를 하다 자연스럽게 일상의 시시콜콜한 대화들을 주고받다가 알게 된 사실이었다. 나 아픈 건 둘째치고 작년 초 적잖은 수술 이후에 꾸준히 복약을 하는 그이의 건강과 영양 상태를 수시로 체크하는 나에게는 일종의 적신호와 같은 심장 두근 거리는 그 한 마디로 인해 나의 예민지수는 더더욱 뾰족해지고 있는 중이다. 식구들을 제대로 잘 '지켜야 한다'는 강박지수도 은연중에 올라가고 있는데 그래서일까. 내 몸이 삐그덕거리는 건 아랑곳하지 않는 상태에서 자꾸만 가족들을 챙기면서도 무엇 하나 쉽게 지나감 없이 아이들이 순탄(?) 하면 그이를 걱정해야 하고, 반명 그이가 좀 괜찮은 것 같으면 다시 아이들 치다꺼리로 인해. 생활의 부침은 연속이고 끊임없는 채찍질만 자꾸 쥐어지는 연이은 상황 속에서.  



내게 '사랑'은 그야말로 이젠 확실한 사치에 속해지고 있음을 느낀다. 사랑한다는 말이 이상하게 위험하게 들려지고도 만다. 식구들이 다 잠든 자정이 되어서야, 어질러진 거실을 제대로 정돈하고. 다시 식탁 위에 노트북을 열고 혼자 앉아서 읽다 만 책을 피고 필사를 정리하고, 쓰다 만 원고, 그 외 일 적 서류들. 정리하다 만 엑셀 파일들. 기타 여러 가지 것들을 붙잡고 앉아 있다가. 나도 모르게 멍하니 뇌가 정지된 채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순간. 눈을 질끈 감는다. 몇 십분 그렇게 앉아 있다가 노트를 펼치고 일기를 쓴다. 나라는 인간을 유일하게 잘 아는 사람. 바로 나 자신. 그런 나에게 쓰는 일기는 결국 내가 스스로 오늘을 위안 삼고 내일을 살기 위해 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일종의 구원의 문장들이겠다. 그리고 그 문장의 끝엔 결국 '사랑'으로 다짐해버리더라. 지긋지긋해도 어쩔 수 없이. 



이제 막 유년기를 지내는 중인 아이들을 향한 이 사랑은 인생을 바친 사랑임을. 이것은 도무지 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내 생에서는 절대 사라질 수 없는 유일한 사랑임을. 이 사랑이 생기기 이전에 물론 당신을 선택했기에 또한 이와 같은 새로운 사랑이 처절하게 파생되었음을 나는 안다. 그리하여 당신과 나. 결혼해서 얻은 사랑은 바로 이것이라는 것. 우리 부부의 삶이 저물면 아이들의 삶은 도리어 피어날 것임을. 아이들은 우리 안에서, 부모의 열렬한 헌신과 처절하게 고단한 한 시절들의 희생을 먹어가며 자랄 것임을. 피 속까지 각인된 타투 마냥 그들은 우리 삶에서 언제나 살펴야 하는 아이로 존재할 것임을... 그러니 생이 마감하는 끝까지 아마 우리들은 이 사랑에서 벗어나지 못할 테지. 이것이. 결혼하면 사랑일까에 대한, 내가 얻은 기쁘고도 슬픈 답일 테다. 인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사랑할 수밖에 없는 늪에 빠졌노라고. 가족이라는. 자식이라는. 처절하고도 확실한 사랑이라는 늪. 



오늘, 당신에게 웃음을 주려고 애써 내가 했던 말. '우리 언제 하냐' 라며 '약 기운에 서로 힘들지. 아무튼 파이팅 하자. 키우려면 아직 멀었다' 했을 때 당신의 크게 웃는 그 미소를 나는 기억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그런 것. 그렇지만 그 '고작'이 사실 고작이 아님을 알기를 바랄 뿐. 우리의 현실이 비록 이젠 우리들이 아니라 우리의 아이들이 중심이 되어 그들의 웃음과 눈물과 투정과 고성과 보람과 여타 각종 생활적 에피소드로 인한 생활전선의 연속임에도 그 속에는 두 사람의 사랑이라는 밑바탕이 탄탄히 있기에 이 모든 네 사람의 순간들이 가능하다는 것을.  그리하여 도대체 그와 나. 부부가 된 우리 둘 사이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라는. 재밌는 시절은 정녕 다 갔구나 라는. 가끔 끝도 없이 계속되는 엉뚱한 사유의 시간 속에서 나는 이제 '사랑'을 생각하지도, 의심하지도 않는다. 다만 제대로 살아가는 일. 확실히 살아있는 시간. '우리' 로서의 모든 순간을 함께 긍정하며 고난 또한 기꺼이 껴앉으려 부단히 애쓸 뿐이다. 애를 쓴다는 건 의지. 그 의지는 사랑. 결국 사랑에 대한 의지다. 마음과 노력의 결실... 



앉아줘야지. 괴로웠을 테니.



드라마에서 그 문장을 들었을 때. 얼마나 울었는지......나는 앞으로도 것이다. 날은 또한 아직 한참 많이 남아 있을 것을 안다... 그러니 우리는 그럴 때마다 서로 힘껏 앉아야 한다. 진짜 사랑한다면.



바다. 석양. 파도. 흐르는 강물처럼.. 아플 때 더 생각나는 것들... 아프면 답도 없다..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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