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이야기
독한 약 기운 때문이었을까. 인간이라는 존재가 너무 하찮고 작게 느껴졌던 것은. 요 며칠. 그리고 오늘 새벽까지도. 극심한 오한과 두통, 끊김 없는 기침과 연신 들끓는 목의 이물감과 걸쭉한 가래. 몸은 이미 충분히 만신창이여서 아침 일찍 응급병원에 다녀왔다. 몇 알의 약들을 처방받고 나니 겨우 회복이 되어갈 즈음. 그이와 차를 타고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오면서 이런 대화를 나눴다. 아니 사실은 대화라고 할 수 없는, 나의 일방적인 토로였겠다. 인간에 대한 나약함과 한심함에 대한. 우리 인간이 얼마나 하찮고 이기적인 존재냐며. 예컨대 새벽에 너무 아팠을 땐 건강만 챙기고 살아도 남는 것이다라는 생각에서 이윽고 아픔이 서서히 가시기라도 한다면 다시 건강은 어느새 잊어버리고 마니까. 잊은 후엔 그 이외의 것들로 가득 다시 채워 넣은 채 우리는 그렇게 뭐에 홀린 듯 계속 앞을 향해 나아가게 될 테지.
그이는 늘 이야기를 들어주는 쪽이었다. 좋게 이야기하면 귀가 열려 있는 경청에 능숙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 테지만 십수 년 듣기'만' 익숙한 사람과 사는 생활이란 때때로 갑갑함에 견디지 못하고 말게 되는 순간을 견뎌야 생활은 가능해진다. 물론 그럼에도 누군가 듣는 쪽이냐 말하는 쪽이냐를 묻는다면, 나는 단연코 전자를 택할 테지만. 말이 너무 많은 남자는 나로서는 안타깝게도 졸렬하고 가볍게 느껴지고 말아서 이성적 매력을 크게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내가 지금의 남편을 택했지만 과묵함 또한 도가 너무 지나치면 함께 살며 어지간한 숨 막힘을 자극한다는 건 결혼 한 뒤에 깨달은 나의 대가였다. 뭐든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 것처럼.
약 몇 알에 금세 몸이 회복되어지는 오만함을 느끼면서 나는 이내 일상생활로 돌아갈 채비를 하듯 분주히 다시 가사를 했다. 밀린 청소와 빨래. 곧 돌아오는 가족들의 끼니. 갖지은 밥과 야채로 이뤄진 몇 가지 반찬들. 메인 요리로는 보쌈을 준비하면서. 가스레인지 앞에서 삶아지는 보쌈을 지켜보며 문득 냉소를 짓고 마는 나를 발견하고 말았다. 이거 봐. 또 건강은 온 데 간데 없이 생활에 전념하지. 원래 인간이란 이런 것이야. 결국 하나를 제대로 잃어야 그 소중함을 안다니까. 제대로 잃어보지 않았으니까 다시 다른 것에 기웃거리기나 하고...
아플 때는 그렇게 다급하고 간절히 나 자신의 건강을 떠올렸으면서. 어느새 회복되고 난 뒤에 내가 걱정하는 것이 고작 가족들의 다가오는 끼니라니. 정말이지 참으로 기가 찼다. 솔직히 화가 나고 부아가 치밀어 오르려 했다. 뭐에 심통이 났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익어가는 보쌈을 바라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이런 게 사랑이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엉뚱하게도. 사랑이 뭔지, 자신이 어떻게 해야 이 관계를 제대로 운영해야 하는지를 이윽고 이런 식으로 배워 나가고 마는. '나'라는 자기중심적인 세계가 어느새 '너'라는 타자를 향해 완전히 이타적인 존재가 될 수 있게 만드는 것. 그것은 사랑으로 인한 움직임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것이 아니던가. 내가 아닌 너를 위해 존재하고 싶게 만드는 것. 더 크고 더 깊게 사랑할 존재를 위한 연습과 훈련 같다는 느낌... 그렇다면 나는 참 바보 같게도 너무 확실히 가족들을 사랑하고 말기에. 그래서 이토록 고통스러운 환멸을 느끼게 되는 걸까 라는. 나만 아는 감정. 깊어 가는 묘한 분함...
사랑을 하면서 가장 치열한 감정의 부딪힘을 겪는다고 생각한다. 사랑이 아니고서야 우리는 살면서 그리 치명적이고 아찔한 감정의 곡예를 건널 일이 사실 별로 없을 테니까. 일상은 무던하고 조용하고 대부분 지루하게 반복되어 자칫 권태를 낳게 되지만. 그런 일상에 활력과 기운, 반대로 고통과 슬픔마저 자아낼 수 있는 건 결국 사랑하기 때문일 테니. 감정의 전력질주를 하게 만드는 것이 사랑이라면 사실 사랑이란 꼭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만다. 사실 나로서는 그러하다. 사랑해서 결혼을 결정했지만 그렇다고 그 결과로써 행복만이 내게 다가올 것이라는 생각은 사실 완전한 나의 오만과 편견과 착각이었음을. 도리어 불행과 고통만 잘 피해가도 넘치는 복임을. 지금은 너무 잘 안다. 다만 이것 하나는 확실히 배워가고 있는 중일테다.
사랑 이후의 결혼 그리고 그 결혼 이후에 서로 사랑하는 시간은, 비로소 더 깊고 크게 사랑할 수 있는 인간으로 거듭 태어나기 위한, 일종의 가혹한 맷집과 훈련을 아주 혹독하게 생활 속에서 배우고 치르는 과정 중에 하나임을. 내게 결혼 이후의 사랑은 그러하다. 출산과 육아를 거쳐 양육과 자녀 교육 전선에 이제 막 뛰어든 유자녀 기혼녀로서의 인생은 더군다나 왜 아니겠는가. 누군가에게는 식욕이 아닌 의무감으로 위 속에 무언가를 욱여넣어야 살아지는 시간. 발에 물집이 잡혔어도 러닝머신 위에서 기어코 뛰어야지만 겨우 감정을 누를 수 있고 다시 내일로 향할 수 있게 된다. 되롤려 볼수록 멍청한 생각이고 해서는 안 되고 할 필요조차 없는 말일 수 있지만 그렇다고 나는 나 자신을 속일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내밀한 생각은 은밀한 문장으로 치환된다. 그리하여 결혼하면 사랑일까에 대한 두 번째 대답으로서 나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겠다. 함께 어둠을 건널 수 있는 사람. 그리고 그런 사람과의 사랑. 그것이야말로 결혼이라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제도에 맞서서 대항할 수 있게 만드는 것. 결혼해서 사랑인 것이 아니라 결혼 이후의 사랑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은 단연코 삶의 어둠을 함께 헤쳐 나가는 것에 있음을. 더더욱 그래야 한다. 성숙한 기혼자들이 주고 받는 사랑은. 그저 좋은 것만을 나누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런 사랑은 너무나도 조야하다. 단순하고 빈곤한 사랑이다. 그저 희희낙락 기쁨과 유희와 환희를 즐기는 건 그저 인간의 욕망적 탐욕적인 향락만을 위한 뒤틀린 디오니소스적인 이기심만으로 가득할 뿐. 나로서는 그렇다면 그것을 사랑이라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조야한 사랑은 인정하고 싶지 않고 인정하지도 않는다.
사랑이란 나로서는 이런 것이라 말하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둠을 기꺼이 함께 맞이하려는 용기. 용자야말로 사랑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용기가 없다면 사랑을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처럼. 상대의 슬픔과 그늘을 충분히 함께 품고 나아가려는 용자의 사랑은 보다 높은 차원의 사랑이다. 또한 이 생각은 이렇게 바꿔 말할 수 있겠다. 상대의 그늘진 어둠을 발견하지 못한 채 그저 무언의 통속적 기대감으로 상대를 대한다면 그것은 진짜 사랑이 아님을. 상대의 어둠을 기꺼이 환대하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상대의 사랑을 받을 자격조차 없다는 것.
그러니 당신은 알아야지...정녕 사랑이었다면. 사랑한다면. 사랑하고 싶다면.
조용히 입술을 깨물고 마는, 한 여자의 촘촘한 어둠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