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헤븐 Dec 24. 2023

사랑 후에 오는 것들

사랑은 방황을 낳는다. 사랑하면 자신이 가던 예전의 길에서 탈피하여 어느새 상대의 길을 향하다 헤매고 마는 걸. 왜 아니겠는가. 나라는 사람의 이성적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느새 심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기어코 마음이 시켜버린 것만 같은 '그 생각' 그대로 돌연 움직이게 되어 버리는 것. 예컨대 나로서는 이런 것들일까. 어느새 발걸음이 빨라져서 종종 거림. 함께 하는 시간이 어느새 지나가버리고 있다는 사실에 묘하게 분해서 입술을 꽉 깨물고 있음. 어느새 눈길이 계속 머물게 되고 말며, 상대의 목소리, 그의 다음 문장이 무엇일지 내내 궁금해져서 안달이 나고 마는 것. 그런 것들은 일종의 시그널일 테다. 



무엇보다 이런 것. 어제보다 오늘 더. 오늘보다 내일 더. 그러다 결국 보고 싶게 되고 마는 것. 그렇게 아끼게 되어 결국 상대의 일상 속으로 풍덩 뛰어들고 싶게 되고 마는 것. 허락이 필요하기에 무척 힘든 '꿈'에 불과할 수 있겠으나. 어쨌든 사랑이란 그 자신의 인생뿐 아니라 상대의 인생에도 확실히 끼어들 준비를 하게 되는 것이다. 상대의 세계에 입성해도 좋다는 일종의 허락되는 존재가 되기를 바란 채로. 남들에겐 유치해 보여도 자신만큼은 한껏 비장하게 느껴지는 각오를 지니며. 기꺼이 자신의 것을 모조리 내어주려 하는 것. 마치 '카발리에로'가 되기를 선언하는 기사의 고결한 마음과도 같은 것일지도. 그리하여 그것이야말로 '진짜'에 가까운 사랑이겠다. 최소한 나로서는. 이 시대의 숱한 인스턴트식 만남과 의도된 저의,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다가가는, 일종의 팔리는 상품과도 같은 사랑과는 분명 어딘가 다른. 희소하고 보기 드문. 그런 것.



치기 어린 젊은 시절의 사랑은 언제나 오래가지 못했다. 길어야 1년이었다. 최소한 사랑에 임하려는 나의 자세가 성숙하지 못했기에 그랬겠다. 상대가 아니라 내가 중요했다. 내 공부, 내 아르바이트, 내 글 쓰는 시간. 그렇게 못되고 나쁘고 이기적이었던 나였음에도. 그래도 참 감사하고 운 좋게도 인연들은 먼저 다가와 주었다. 사랑을 잘하지 못하는 바보 같은 이런 인간에게도. 마냥 아껴준 그런 인연들이. 다가왔기에 시작은 했지만 나로서는 모르는 세계에 대한 호감과 인류애적 좋아함 정도에 그치고 말았을 뿐, 감정이 '확실하게' 동요되는 사랑은 결국 아니라 생각해버리고 말아서 결국 아프게 떠나보낸 사람들이 있었다. 생각해 보면 모두 내 탓이었겠다. 그들이 떠난 후에야. 끝난 뒤에야 비로소 나는 조금씩 사랑을 알게 된 것 같아서. 



@영화 만추 中. 훈과 애나. 장난처럼 시작되었다지만, 시작이 있었기에 비로소 두 사람의 하루는 이어졌던 것.




십수 년 전, 2005년 한일 우호의 해의 끝자락에 출간된 두 권의 책이 있다. 일본 작가인 츠지 히토나리와 국내 작가인 공지영 님의 작품 '사랑 후에 오는 것들'이 그것인데 책을 아직까지도 기억하는 이유는 그 해 날 열렬히 사랑해 준 상대와 헤어졌기 때문이었겠다. 그를 떠나보낸 후 나는 알 수 있었다. 그 친구의 모든 것은 진짜 사랑이었음을. 너무 늦게 알았다. 상대에게 힘껏 뛰어드는 대가로 자신은 아픔과 절망, 방황이라는 감정의 다리를 건너며 내적으로 아픈 성숙을 한다는 것을. 비록 과거에 한껏 빠지게 만들어 우울의 늪에 빠져버릴지언정 사람이란 진실된 사랑의 경험을 발판 삼아 다시 새로운 오늘과 내일로 그럼에도 나아가야 비로소 살아지기도 한다는 것에 대해서. 더 이상 사랑할 수 없겠다고 생각할 때 비로소 더 깊고 더 진짜에 가까운 사랑과 연결되기도 하는, 시간과 순간의 역설. 사랑의 형언하기 힘든 모순...



우리는 오랜 길을 돌아왔다. 슬프고 고통스러운 반추의 길이었다.

그러나 결국 이렇게 만났고 그러니까 나는 이제 그를 더 사랑해도 괜찮은 것이다.


- 사랑 후에 오는 것들 中, p. 236, 공지영 -



한국식으로 부르면 윤오 (潤吾)라는 이름의 아오키 준고와, 일본식으로 부르자면 베니(紅)라 불렸던 최홍.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 비로소 헤어지고 난 이후 달리기 시작한 남자와, 반대로 준고와 헤어지고 나서 한동안 달릴 수 없게 되어 버린 여자의 이야기다. 책의 제목에서 연상되듯, 두 사람은 사랑했고 헤어졌다. 사랑이 늘 그러하듯 준고와 홍에게도 작은 틈이 생긴다. 사소한 말. 별 뜻 없이 한 문장은 때로 틈에 균열을 만들어 버리듯. 균열은 자라지만 그 순간에는 준고도 홍도 그것이 심각한 줄 모른다. 그러다 아픔이 선명히 느껴질 즈음, 두 사람은 서로에게서 멀어진다.



시간이 오래 흘러 두 사람은 각자의 나라에서 다시 각자의 곁에 새로운 연인과 함께 과거를 묻고 현재라는 일상을 지낸다. 그러다 우연한 계기로 두 사람은 재회한다. 그리고 알게 된다. 헤어졌지만. 잊었지만. 잊고 있다 생각했으나 사실은 그대로 두었을 뿐 없어지지는 않았음을. 잊을 수 없고 지울 수도 없는 인연이었음을. 두 권의 소설을 통해 우리는 현재 자신의 사랑을 떠올려볼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고 무엇보다 헤어진 이후, 그야말로 '사랑 후에 오는 것들'에 대한 각자의 시간에 대해서 반추해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차마 입 밖으론 낼 수 없어도 확실히 내 안에 살아있는 사랑의 형태에 대해서.



그날 우리는 함께 웃었다. 그날 우리는 등을 돌리고 잤다.

그날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손을 뻗었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이야기를 시작했으며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를 어루만져 주었다.

그날 나는 나무 그늘에서 혼자 달리는 홍이를 지켜보았다.

그날 나는 흐느껴 우는 홍이를 꼭 끌어안았다.


- 사랑 후에 오는 것들 中 p. 244, 츠지 히토나리 편 -




@영화 만추 中, 애나의 3일, 함께의 시간은 너무 짧아서. 그래서 오래 기억할 수 있는 것일까. 속상하게도...



최근 인후염 판정을 받았다. 코로나나 독감이 아닌 것에 감사했지만 여간 일상생활을 불편하게 만든 건 다름 아닌 '목소리' 다. 갑자기 이럴 수 있는가 라는 의문이 들 만큼 나는 이번주 목요일부터 갑자기 발성이 되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목소리 상태를 겪고 있다. - 말을 못 하는 정도라 - 또한 '가는 날이 장날'이라는 우리 속담은 정말이지 빗겨 나가는 법이 없듯, 학수고대했던 몇 시간의 모임이 있던 날이어서 더더욱. 내색하지 않았지만 실은 묘하게 길고 긴 슬픔과 분함을 겨우 눌러야 했다. 동시에 드는 생각은 남들은 절대 보통 생각하시지 못할, 나만 느끼는 고충에 가까울 수 있는, 우스우면서도 꽤나 뾰족하게 진지한 고민들과 사투하는 중이기도 했다. 이 건강상태로 가능할까. 막차를 타고 가야 하는데. 혼자 택시를 탈 수 있을 만큼 '그 일'을 이젠 잊게 되었을까. 그이도 회식이고 늦을 것이고 무엇보다 아이들과 같이 잠들었을 텐데. 방해할 순 없지. 의지하면 안 되지. 기타 등등의 별 걸 다 고민하는 내가 좀 우습다와 같은, 밋밋하고 속상하기도 한 나만 아는 감정의 물결...  



사랑할 때 나에 대한 궁금함으로 연락을 '먼저' 주었던 당신은 사랑 '후'에는 자연스럽게 그 궁금함이나 관심을 조금씩 잃어버리게 되는 걸까. 물론 사랑하기에 당연히 걱정도 한다 했지만, 동시에 그이는 나를 너무 믿는(?) 것 같아서 가끔은 그것이 묘하게 분해진다. 아무리 늦어도 연락을 좀처럼 먼저 하지 않는 당신이라서. 물론 그 전후엔 시시콜콜 늘 일상의 안부나 내 일정을 자주 소통해 왔기에 그것이 가족으로서 함께 살면서 우리 부부가 쌓은 신의이자 그이에게는 특히 학습화된 '내 탓'이기도 하겠지만. 아무튼 여러 문장들이 머리와 마음속에서 범벅이 된 채 내면 속에서 한껏 목소리를 내던 중. 그중 선명한 문장이 들렸다. 내 인생에서 평일 새벽 강남역이라니.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는 일... 살면서 단 한 번도 어긋남 없으려 노력했던 나는 그래서 양자물리학의 '결어긋남'이라든가 '변수'라는 단어가 어찌나 마음에 들던지. 무엇보다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는 양자역학에 어떤 터무니없는 상상을 보태고 싶었다는 것. '일어나길 바라는 일이 일어난다'라고 제멋대로 문장을 바꿔버린 채로.



@상민과 기홍이 핀란드에서 처음 조우하던 순간. 영화는 그렇게 시작된다.




감정의 기원은 어디일까. 어디서부터 출발하는 것일까. 왜 어떻게 생기는 것이란 말인가. 좋아한다는 언어로 인해 학습된 인식에 의해 자연스럽게 그렇다고 느끼는 것인지 아니면 인간의 감정은 일종의 뇌와 호르몬으로 조종되는 확실한 착각에 지나치는 것은 아닐지. 좋아한다는 문장을 떠올리기 전에 이미 좋아하는 감정이 있었기에 발화될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발화되고서야 비로소 좋아한다는, 좋아지는 그 상태에 대한 표현을 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되는 걸까. 그런데 왜 좋아진 것인지. 왜 좋다고 느껴지는 것인지. 아니면 이유조차 제대로 존재하지 못하는 좋아함의 형태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일지. 그저 모두 뇌하수체의 신경전달물질들에 의해서, 혹은 호르몬의 영향에 확실히 좌지우지되는 인간으로서 처한 상황과 인지적 편향과 오류적 착각에 불과한 자신만 아는 시공간에 산뜻하게 갇힌 상태의 일방적 환상에 불과한 것일지. '그럴 수 없는' 상황을 '그럴 수 있음'으로 바꾸려는 객기나 방종의 일종일지도 모를 일이고. 



우리는 사랑 앞에서 감정의 주인이 될 수 있을까. 반대로 사랑의 세계 안에서 의사결정의 힘을 갖는 주체는 어쩌면 내가 아니라 상대에게 있는 것은 아닐까. 상대를 나 보다 먼저 생각해 버리고 움직이는 것이 사랑이라는, 어떤 기준점에 의지해서 해석한다면 말이다. 사랑에 있어서는 '나'라는 인간의 자유의지는 있을 수가 없는 것이라는 생각을 곧잘 한다. 자유는 내가 아닌 내가 향하는 상대에게 있는 것. 상대를 그만큼 생각하고 아끼고 있다는 반증이 일상에서 자주 보이게 되고 마니까. 예컨대 기혼 후 신혼이었을 무렵 침대에서 그이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는 것을 위에 올라 타 바라보는 것을 무척 선호하던 기묘하게 뒤틀린 사적 섹슈얼리티는 이기적으로 보였지만 사실은 한없이 상대를 향한 이타적 기호였음을. 상대에게 철저히 맞추어 합을 이루고자 했던 기특한 한 사람의 노력의 일환으로서 내 입술은 쉼 없이 당신을 향해 힘들지 않은 '척'을 하며 분주했음을. 그리하여 사랑의 세계에서는 특히 자유는 있을 수가 없는 것이라고. 



테스토스테론과 에스트로겐이 만나 침대에서 '합'을 이루는 에로스는 왜 기혼 이후에 서서히 소멸되기 쉬울까. 왜 당신은 나의 욕망이나 선호, 일상의 안온, 심적 건강 상태 등에 대해 전혀 궁금해하지 않는 것일까. 그것이 정녕 우리의 탓인가 아니면 기혼제가 만들어 놓은 제도의 희생양이 되어 양육이라는 거대한 미션을 통과하기라도 하면 더더욱 가족이라는 단체를 열심히 지키는 대가로서 개인의 욕망을 말살시켜 버리는 데 학습화되었다면 결혼은 얼마나 정치적인 행위인지. 정말 우습게도 평소에 혼자 생각만 하던 것들에 대해서 이런 발칙한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지그시 바라보며 경청해 줄 수 있는 성품과 그릇이 넓은 인물.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내게는 언제나 '뛰어들고' 싶은 대상이었고 그 대상 중 유일하게 예의 바르고 내 눈에 들어온 한껏 섹시한 이성은 쉽게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서로에게 유일함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런데 말이다. 살다 보면 믿음은 깨지고 변하기도 한다는 걸 알게 되기도 한다. 애석하게도. 자신의 믿음이 틀렸다는 것 또한 알게 해 주는 은밀한 계기가 다름 아닌 사랑 후의 또 다른 사랑의 시간으로 인함이라면.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그야말로 '사랑 후에 오는 것들' 이야말로 이 세계에서 그 누구도 함부로 말하지 못하지만 누구든 한 번쯤은 느끼게 되는 얄궂은 면이 존재함을 알게 되는 것만 같은 것이다. 처음의 사랑하는 시간과, 그 이후에 유지되는 사랑의 시간들은 점점 변해가는 것. 그러면서 동시에 확실히 양가적이라는 것. 애정과 동시에 증오와 질투를 낳기도 한다는 것. 또한 믿음에 대한 착각과 모순, 어떤 절망과 좌절을 불현듯 동반하게도 된다는 것에 대해서. 



늦은 저녁 혹은 새벽이 좋은 이유는. 혼자가 되는 유일한 시간대역이기 때문일 테다. 어떤 시절은 그렇게 지나가야 한다..




사랑 전과 사랑 후가 묘한 경계를 이루는 것이라면, 그것은 좋아한다와 좋아지려 한다, 그리고 좋아하지 않는다는 어떤 감정선도 함께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좋아하기에 사랑도 깊어지나, 깊어진 사랑으로 매듭지어진 관계에서 남겨진 사랑 그 '이후'는 어느새 좋아하던 면이 사실은 좋지 않게 변하기도 하는 일종의 모순을 파생시키는 것과 같은 것. 또한 '좋아한다'는 생각이나 어떤 감정의 기원도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좋아지려 한다가 먼저일지 좋아하지 않지만 그렇게 변하려는 그 찰나의 경계에서 머뭇거리면서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 쪽에 무게중심을 두어야 할지 고심한 채로 그저 자신도 모르게 존재하게 되는 것...  그리고 그 고심의 기준점은 다름 아닌 '선'



누군가에게는 사랑 후에 지켜야 할 일종의 '선'이랄 것이 생긴다. 사랑의 세계 안에서 다시금 생겨버리는 그것은 선함을 의미하는 선(善)과 그 선을 지키기 위해 어떤 경계를 넘지 않으려는 선(線)을 명명하는 것이겠다. 어떤 기준을 넘지 않겠다는 무언의 약속과 신념. 그것은 사랑 전보다 사랑 이후에 더욱 두 사람 사이를 견고하게도 흐트러지게도 만드는 일종의 이 세계, 아니 기혼제의 은밀한 규율.  '사랑 후에 오는 것들'의 준고는 칸나를 곁에 두고서도 홍을 떠올리고 홍도 민준과 함께 있지만 준고의 모습과 문장을 떠올린다. 민준과 칸나와 함께 있을 때의 각각의 두 사람. 그들은 어떤 선을 넘어가지 않으려 애쓰지만 한편 자신도 모르게 기꺼이 넘어가길 바라는 생각에 닿고 말아 정말 원하는 대상이 눈앞에 보였을 때 그토록 사투했던 마음은 무너진다. 사랑 후에 또 다른 사랑이 오는 것을 막지 못한 채 그대로 마음이 흐르는 것을 조용히 바라보며 두 사람의 재회라는 열린 결말을 소설 속에서 최근에 다시 들춰보았던 나는.



생각을 언어에 가둬두기를 바라듯 눈을 질끈 감은 채 괜히 이런 선언을 해 버리게 되는 것이다. 부쩍 엉뚱하고도 불온한 상상을 가끔 하게 되고 마는 나를 더 이상 좋아하지 않겠다고. 본능은 남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지만 상상은 상상으로 그쳐야 하는 것. 떠올리지 않는 연습에 더 매진할 것. 하루 3시간 정도의 다소 과한 운동량을 중독된 듯 유지하는 이유는 사실 다 있기 때문일지도. 오래전, 당신 차에 들어 있던 구찌 향수. 맥락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장소의 주차위반 영수증 고지서를 보았을 때 본능적으로 심장이 쿵 했던 오래 전의 순간. 하지만 이미 선언적 언어에 생각을 가둬 두었으니 괜찮다. 물증 없는 심증을 절대 믿지 말 것. 또한 좋아해선 안 되고 좋아져서도 안 되는 상상도 있음을. 위태로운 상상을 현실로 만들기에는 절대 젊지 않은 시절임을. 위태와 불안은 그저 젊음의 특권뿐. 그리고 훗날 파생된 또 다른 생각들도 언어에 가둬두려 하는 것.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지만. 그것이 부디 우연의 옷을 입고서 어떤 형태로든 제발 내게 일어났음도 싶지만. 반대로 그 문장을 뒤집어 말해보면 이렇다는 것도. 일어나지 않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도. 기억할 것임을. 



그래서 대신 텍스트로 남겨 두는 것이겠다. 콘텍스트에 숨길 수 있으니까. 발성되지 못한 마음이 유일하게 살 수 있는 곳...



한파가 요동치던, 다음날로 넘어간 금요일 새벽. 떨리는 차가워진 양손을 스스로 부여잡으며 택시를 혼자 타고 돌아오는 동안 창문을 멍하니 바라보는 사이 생각이 급습했다. 방종으로만 뭉쳐진 예의 없는 디오니소스는 어른도 초인도 무엇도 될 수 없음을. 다만 방종하지 않은 채 자신만의 축제를 소박하게 즐길 수 있는 디오니소스적인 시간은 살면서 스스로에게 조금은 허락해도 되는 것이 아닐까라는. 그것이 그리 어긋나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라는 일종의 우스운 자조적 희망을 꾹꾹 생각 속에 구겨 넣듯 누른 채로. 그러나 그 생각은 이윽고 다시 찾아온 생각과 사투를 벌이고 만다. 그렇지만 너의 시간의 반 정도는 너의 것이 이미 아닌 걸... 그렇지. 맞지. 나의 시간 대부분은 현재 내가 아닌 나보다 더 애지중지하는 내 사랑들에게 좌지우지되기 쉽기에. 확실히 이것이 지금의 내 인생이겠지만. 내 인생은 내 것이라고 뻔뻔하게 말할 수는 없는 그런 시절도 있음을. 그리하여 그저 겨울이면 늘 입술이 더더욱 부르트고 말아서 피가 묻어 있는 아랫입술을 검지손가락으로 누르는 버릇을 여전히 버리지 못한 채 조용히 어떤 답답한 시간을 통과해 나가고 있을 뿐... 더군다나 지금. 이 순간. 발성되지 못하는 목소리 상태임에도 그저께는 아이들의 우렁차고도 씩씩한 데시벨이 엄청났던 다툼의 목소리를 듣고 나도 모르게 소리 없는 울부짖음과 포효로 거실을 메우다가 눈물을 터트리고 말았다는 것. 당신과의 사랑 후에 오는 장면들이 고작 이런 것들이라고 자조하면서.  


사랑 후에 오는 것들. 그것은 다름 아닌 사랑의 또 다른 이면이 지닌 모순과 역설로 점철된 감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감정의 기원을 알지 못한 채. 다만 현재를 지키기 위해 빌어먹을 금욕주의적 절제와 인내를 끝없이 동반하여 훌륭하게 자신을 기만할 용기와 내적 고통에 휩싸인다 할지라도. 수면 위로 급기야 떠오르려 했던 나의 부끄럽고도 불온한 마음과 발화되지 못한 어떤 문장들은 그 또한 그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았음을. 입술을 깨문 채 다만 어디로 흐를지조차 알 수 없이 그저 할 수 있는 것은 마음과 생각의 스위치를 단숨에 차단했음을. '걱정이 돼서'라는 특별한 의미 없는 어떤 문장과 목소리가 마음에 맺히고 말았지만. 그 순간. 쏟아내고 싶었던 욕심 어린 어떤 문장들을 그대로 드러내려 했지만. 확실히 어긋나보고 싶었지만. 새벽의 강남역엔 몸을 녹일 카페 하나 여는 곳은 없었고 - 도리어 다행이었을까 - 신은 내게 목소리를 막으셨고 - 그러니 도리어 정말 다행이었을까 - 대신 마음속으로 생각을 언어에 가두며 이렇게 읊조릴 뿐이었음을.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그것은 다시 말하자면 일어나지 않은 일은 일어나지 않음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움직이지 않으면. 발화되지 않는다면. 뛰어들지도 끼어들지도. 그 어떤 것도. 하지 않는다면. 

시간이란, 알 수 없는 다음 인생의 장면을 향해 그저 흐르는 것뿐이겠다... 알지 못한 채로.





평일 저녁. 그리고 혼자. 이 시간은 올해의 크리스마스 선물과도 같았음을. 울컥해서 왈칵했었던. 이 날들의 장면들... 



#메리 크리스마스...

                     

                     

이전 08화 Interlude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