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쏜살같다...
애매모호하게 들릴 법한 문장으로밖에 표현이 잘 되지 않아 부끄럽지만. 요즘 나는 자주 놀라고 만다. 스스로는 바쁘게 지냈다지만 겉으로 보기에 크게 변함없어 보이는 일상이기에. 속절없이 지나간 시간 앞에서 요즘 이 말을 가장 자주 마음속에 달고 산다. '실속 없이 바빴네'라고. 궁색하고 부끄럽고 남루한 핑계일까. 쓸모없는 것이 가장 큰 쓸모라는 장자의 철학관에 기대어 살고 있지만 그 위로도 유효기간이 다 되어가고 있는 걸까. 하긴. 철학 인문 문학을 주로 읽다가 어느새 읽는 책의 대부분이 요즘은 온통 실용서로 치우쳐졌기에 아마 마음의 근력이 닳아진 것일 수도.
월요일이었는데 어느새 금요일을 지나 주말이 되어 버린다. 분명 아이들 학교 보내고 난 아침이었는데 아이들이 갑자기 돌아와서 놀라 시계를 보니 오후 2시가 되어 있기 일쑤다. 분명 주말 아침과 점심을 챙겼는데 어느새 주말 저녁 식단을 고민해야 할 시간이 되어 버리다든지. 무턱대고 연재해 버린 브런치를 몇 주 내내 쓰지 못하고 말았던 것도 이유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아무튼 일상 속에서 묘하게 시간을 놓쳐 버리고 말았다는 은은한 열패감은 여전히 자신을 주눅 들게 만든다. 그래서 쓰지도 못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누구나 볼 수 있는 이 플랫폼에 '대놓고 쓸' 용기가 없어졌달까. 대신 읽고 달리고 보살피며 다만 실속 없이 혼자 일하는 시간으로만 가득 채워 나갔을 뿐...
생각해 보면 사랑하는 일만큼 자본주의에서 실속 없는 '일'이 또 있을까 싶기도 하다. 어불성설 아이러니한 말일 수 있지만 나로서는 사랑하는 행위란 그야말로 아무 기대 없이. 결과를 따지지 않고. 나의 모든 것을 내어 주는 마음이라서. 내 뜻 보다 상대의 뜻에 따라 사는 시간으로도 충만한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상태. 바로 그것이 '사랑' 이기에. 오직 사랑에 빠질 때만 가능해지는 시간은 어쩌면 그렇게 실속 없는 시간을 힘껏 사랑하며 자본과 권력에 확실하게 저항할 수 있는 용자 만이 사랑을 제대로 할 수 있겠단 생각... 청소를 하며, 설거지를 하며, 아이들 가방과 학습준비물을 챙기며. 각종 병원 일정들을 달력에 기록하고 매일의 체크리스트의 달성유무를 체크하면서. 노트북 앞에서 깜빡이는 커서를 멍하니 바라보며 한 문장도 쓰진 못했지만 늘 묘하게 따라오는 생각. 바로 그 생각이다. '용기가 있어야 사랑도 할 수 있다'는 생각.
용기가 없어졌다. 아니 없어지고 있었다. 정확히 말해서 없어질 뻔했다. 그러다 어제 남편의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문장 하나가 완벽히 각인되어 나는 이상한 용기가 불쑥 샘솟고 말았다. 말 한마디에 천냥빚 갚는다고 했던가. 반대로 말 한마디에 번개를 맞듯 소름 끼치게 각인될 수 있는 문장이 있다는 것도 그 순간 나는 알 수 있었다. 그 문장에서 내내 벗어나지 못한 채 나는 다시 어떤 이상한 '용기'가 나오려 했기에.
- 오래 못 살 것 같아. 여기저기 아프니까.
그 문장은 순식간에 다가왔다. 차 안이었고 우리는 주말 가족 나들이를 가고 있었다. 뒷 좌석의 아이들은 늘 그러했듯 큰 소리로 둘이서 다투다 까르르 대는, 시끌벅적하면서도 단란해 보이는 4인 가족의 주말 나들이를 가는 차 안에서. 그런 배경에서 나올 법한 대사는 분명 아니었는데. 어떤 대화를 주고받다가 뜬금없이 나와 버린 그이의 문장을 듣자마자 나는 이내 읽던 책을 중지하고 하던 여러 가지 두서없는 대화를 멈춰야 했다. 아니 멈춰져 버렸다. 이을 말을 잃어버리고 말아서. 도무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살면서 그런 순간이 종종 있었다. 어떤 표정을 해야 할지. 어떤 말을 이어야 할지.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은 채 마치 온몸의 시동이 꺼진 채 일시정지되어버리고 마는 상태. 그이의 문장은 그만큼의 영향력이 있었다. 예상하지 못한 문장이었고 나름 십 수년 같이 사는 사람의 성향을 얼추 안다고 생각했으나 그 생각이 확실히 오만이라는 것을 반증하게 만들어 준 문장이어서.
시시콜콜 진지하게 캐묻지 않았다. 왜 그런 말을 그이답지 않게 하고 말았는지 아주 조금은 알 것 같았으니까. 다만 그저 너무 안타까워서 속이 쓰리고 금방 눈물이 펑하고 흘러나올 것 같은 마음을 겨우 참으며 억지로 밝게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 대신 해 줘서 고맙네' 라며. '내 꿈이 자기 빨리 은퇴시키고 전업주부 시켜주는 건데 그 말 들으니 정신 번쩍 든다' 라며 조금만 기다리라고. 그랬더니 그이는 언제까지 기다리면 되냐며 웃었다. 웃어 주어서 고마웠다. 그렇게 위트 있게 넘겼다. 마음은 그렇지 못했지만. 원래 인생이 모순이니까. 넘겼지만 넘기지 못하는 것들이 도리어 가득 생겨 버리는 것들이 있는 게 바로 인생....
대신 아파줄 수 없고 약을 먹지 않을 수 없는 그이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기에 나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정확히 사랑하는 상대를 위해 대신해줄 수 없다는 무력감과 열패감은 은은하게 나를 자주 무너뜨리고 만다. 그래서 요즘은 더더욱 '실속 없이 바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불안함에 잠식되려 할 즈음 나도 모르게 자주 운다. 무엇이 불안하게 만드는지 나만은 안다. 키우려면 한 참인 어린아이들. 아픈 배우자. 최소한 세 명을 지켜야 한다는 묘한 사명감과 책임... 이건 아마도 유자녀 4인 가족의 외벌이 가장만이 느끼는, 절박한 상황이 되어보지 않았다면 절대 알 수 없는 감정선인데.... 왜 이상하게도 묘하게 나는 그 비슷한 감정에 자주 체포되고 마는지. 어휴. 언제쯤 좀 더 강해질지.
생각해 보면 남편이야말로 가장 강한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일지 모른다. 살면서 저런 말을 단 한 번도 내색하지 않았으니까. 자신이 아파서 오래 못 살 것 같다는. 농담이라도 그런 말을 한 번도 하지 않고 20년 이상을 사회생활을 하면서 나름의 포지션에서 나름의 커리어적 성과를 내면서 묵묵히 단 한 번의 흐트러짐과 어긋남 없이 '일'을 하며 가족들을 챙기고 있는 사람..
존재와 마음. 그 두 가지 상태가 청정하게 한 곳을 향하는 것이 사랑이라면. 분명 그이는 나보다 더 큰 사랑을 행하고 있는 사람이겠다. 자신의 온 에너지를 4인 가족을 위해 내어 주고도 기꺼이 아랑곳없이 하루를 버티듯 살아내는 사람. 단 한 번도 일터의 격무나 노곤함을 집에서 힘들다는 내색을 해 본 적 없던 사람. 가족을 위해서 자신을 다 버리는 게 아깝지 않다는 듯 그렇게 사는 사람...
그래서일까. 나는 요즘 많이 불안하다. 불안해서일까. 갑자기 나도 모르게 설거지를 하다가, 노트북 앞에 있다가 곧잘 눈물이 흘러서 스스로도 놀란다. 왜 또 우나 싶어서. 결과가 보이지 않고 가보지 않은 길을 혼자 가보려 분투하는 요즘이라. 사실 참 많이 두렵고 모르는 것투성이고 배워야 할 것도 많고. 시간은 속절없이 빠르고 아이들은 때때로 귀여운 훼방꾼 노릇을 너무 자주 해서 코르티솔 촉진제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어버리기 일쑤고. 매일의 진통제에 의지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파이팅 하는 그이의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며 나는 자주 눈물을 참고 웃음을 보이고.
그렇지만 두려움을 상쇄시켜 버리는 존재는 다름 아닌 그들이라는 것을 안다. 가보지 않은 길을 가려할 때의 모든 무거움과 두려움과 불안을 이겨버리게 되고 마는 존재. 실행에 화력을 갑자기 당겨버리게 만드는 촉매제. 그것은 가족... 참 모순이지만 삶을 참 힘겹게 만들다가도 또 그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두려움을 이겨내고 나아가게 만들어버리는 존재...
그 사랑 중 가족이란 가장 정상에서 애심으로 나를 지탱하게 만드는 원력이자 유일한 존재.세 사람 때문에 자주 울지만, 여전히 나는 결국 세 사람 덕분에 살아가는 용기와 힘을 내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을까. 솔직히 언제쯤 안 울며 살까 싶어서 여전히 참 사나운 시절을 관통하고 있는 것만 같지만. 이 또한 이 사랑의 성장통이라 믿으며.
연재가 자주 밀렸던 요 몇 주였습니다.
글을 쓸 심적 여유. 물리적 시간. 에너지. 없다는 건 결국 핑계일테죠...
그치만 글을 사랑하고 아마 평생 글로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으로 남겨지고 싶단 소망을 버리지 않고.
다만 '작가' 라는 타이틀이 너무 부끄러울 뿐인, 그저 기록으로 생활을 남겨보고 있는 에세이스트로서.
제 부족한 글을 읽어주시고 기다려 주시는 지금 이 문장을 읽고 계시는 '님' 께.
송구하면서도 무척 감읍한 마음.
이렇게 활자로 꾹꾹 마음을 눌러 담습니다.
기다려 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