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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Mar 24. 2024

결국 남겨지는 것들

부족한 식재료를 채우기 위해 가족 모두 마트에 가서 장을 보던 중이었다. 웬일로 그이가 막걸리를 사자 했다. 언젠가부터 우리 부부는 술을 마시지 않게 되었는데 -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자연스레 그렇게 되었다  - 한편으론 반가웠고 한편으론 걱정이 앞섰다. 술을 마시고 싶다는 마음의 원천은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되었기에. 안주로는 파전을 만들어주고 싶었지만 마냥 배고파하는 아이들의 선호가 우선순위가 되어 버리는 4인 가족의 주말 식탁 메뉴의 선택권은 그에게서 자연스레 멀어졌다. 집에 돌아와 스테이크를 재빨리 굽고 몇 가지의 반찬을 접시에 가지런히 담는다. 그리고 투명 유리컵 4개를 준비하여 아이들은 쿨피스를 부모는 막걸리를. 그렇게 '짠' 하며 지평막걸리 한 모금을 입에 담는 순간. 



다시 깨달았다. 내가 술을 꽤 좋아한다는 것을. 물론 많이 마시지 못하지만 - 거의 마시지 않다 보니 주량도 취함도 약해졌다 -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졌다. 술의 힘은 역시 '마비'에 있는 것일까.  몇 달 내내 산란하고 힘들었던 정신이 순식간에 녹아드는 것 같았기에. 다분히 디오니소스적인 인간으로서 내가 잊고 지냈던 게 다름 아닌 술이었기에 이렇게 힘들었을 거야 라면서 나는 계속해서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그렇게 한 병을 금세 비워버렸다. 



설거지를 하면서 머리가 핑 하고 돌았다. 그런 게 기분은 꽤나 좋았다. 그리고 그이를 쳐다보니 아니나 다를까. 이미 반쯤 감긴 눈으로 아이들을 곁에 끼고 소파에 누워서 금세 잠들 것 같은 모양새의 그가 이상하게 처연하게 보였던 건 왜였을까. 주말에도 회의 참석으로 회사에 나갔다 온 그라서? 오자마자 예의 없이 행동했던 첫째 아이 훈육으로 인해 겹겹이 힘들었음에도 끝까지 아빠와 남편의 포지션에서 책무에 최선을 다하려 분투하는 모습이 고맙고도 안타까워서? 아니면 막걸리 한잔에 금세 넉다운이 되고 마는 모습이 내내 걱정스러워서?



사랑해서. 



다른 건 부차적인 이유, 그럴듯한 핑계다. 결국 그가 처연하게 느껴졌던 건 내가 당신을 사랑해서라고.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게 되고 말면 너무 이상한 이유일까. 그러나 나로서는 다른 이유를 찾지 못하고 마는걸. 사랑하니까. 그이와 한 몸이 되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지만 물론 내 생각은 언제나 그러하듯 잠시에 그치고 만다는 것 또한 안다. 그이를 향한 나의 사랑은 이제 에로스를 건너 아가페에 철저히 가까워졌다는 의식이 무의식마저 이겨버리고 있는 것인지. 그러나 사실 무엇보다 당신을 앉아버리겠다는 생각을 금세 잊을 수 있었던 건 아이들 덕분(?)이었다. 다행인지 아닌지 아이들이 잠들려는 아빠 옆에서 절대 떨어지려 하지 않았기에. 



그러나 무엇보다 사실은 이렇다. 세 사람의 모습이 눈물을 핑 돌게 만들었던 것이었다. 아이들 중간에 낀 당신의 모습이 참 든든하고 멋있었지만 동시에 역설적이게도 안쓰럽게 보였기에. 젊었던 당신이 어느새 조금씩 약해져 가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리기도 했으니까. 설거지를 마치고 저녁 마무리를 하고 일찍 잠든 세 사람의 이불을 챙겨주고 다시 거실로 나와서 나는 읽다 만 책을 읽었다. 시계를 바라보며 내일은 뭐 하지 어떤 음식을 해 줄까 틈틈이 생각하면서. 다음엔 막걸리를 더 마셔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이제는 종종 더 그이와도 어떤 시간을 만들어야겠다고 나도 모르게 생각하면서. 





더 늦기 전에 사랑해야 한다. 요즘은 자주 그런 생각에 빠진다. 그래서일까. 묘하게 우울해지고 마는 건 왜였을까. 어서 은퇴를 시켜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요 몇 주는 스스로 참 힘들었다. 심적으로 산란하고 청명하지 못한 정신상태였다. 둑 터지듯 겹겹이 다가오는 댁 내 소소한 사건사고들을 돌파해 나가면서도 내내 마음은 무너지고 있었는데. 참 이상하고 부끄러운 일이다. 막걸리 한 잔에 여러 걱정거리들이 순식간에 (잠시) 사라지고 반대로 큰 교훈을 얻고 말았으니까. 인생에서 결국 남겨지는 것들에 대해서. 



당신의 편안한 웃음. 짠 하고 부딪혔던 유리잔에서 울리는 경쾌한 소리. 대단한 음식이 아니었음에도 먹고 마시고 말하고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했던 우리의 일상 대화들. 오고 가는 문장들 속에서 느껴지는 사랑의 담론. 다정한 미소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아이들의 몸짓과 목소리. 안주를 챙겨주는 기특하고도 아직 여린 작은 손바닥. 아이를 바라보다 갑자기 잠시 눈시울을 붉혔던 당신. 그리고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던, 당신을 내내 바라보고 있던 나... 



언젠가 우리가 서로 볼 수 없는 거리에 놓였을 때. 아마 생각나는 건 그리 대단한 게 아닐 테다. 결국 우리가 우리로서 모두 함께 사랑했던 일상의 장면들. 그 시간의 기억들만 남겨지는 것이다. 결국 우리를 살아나갈 수 있게 지탱하고 의지하고 현재의 시점에서 강력하게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주는 건 다름 아닌 그런 것들일 테니까. 미래의 걱정과 불안과 고민으로 내내 복잡한 마음의 늪으로부터 빠져나오게 만드는 것은. 



서로 사랑했던 기억이다. 그 기억은 강하고 질긴 생명력을 지닌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인생에서 남겨지는 유일한 선물일지 모른다. 언젠가 서로가 서로를 보지 못하게 되는 순간에서 유일하게 살아 숨 쉬는 결국 그것일 테니까. 그러니 사랑하며 살아가야 하겠다고. 열심히 사랑하면서 일상을 분투해야겠다고. 생활의 고단함과 부침에 잠식당해서 가장 소중하고 가장 가치 있는 것을 놓치지 않기를. 내내 바라면서. 잠들기 전, 책을 덮고 중얼거렸다. 



잘 지켜내기 위해선 그만큼 사랑해야 한다고. 그러니 반드시 나는 사랑을 잃어버린 채 분투하지 않겠다고. 우선순위를 생각하겠다고. 그러니 다음에 또 막걸리를 마시자라고. 이왕이면 바다를 보면서 마시면 좋겠다라고. 그러면 우리들의 사랑은 깊어져서 아무것도 무서울 없을 것이라고. 어떤 불안과 우울함이 다가와도 이겨낼 용기와 숨결을 내어줄 것을 믿겠노라고. 더 늦기 전에. 유한한 인간에게 영원한 아무 것도 없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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