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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Apr 21. 2024

취중진담

지평 막걸리 750ml 2병을 연신 비워냈다. 가족들이 잠들려면 아직 시간. 오후 7시가 되지 않았음에도. 그리고 나는 지금 꾹꾹 키보드를 누르는 중이다. 귀에는 이어폰을 채. 눈은 노트북을 쳐다보고 있지만 사실 시야에는 이미 다 들어와 있다. 아이들의 몸짓. 명의 울부짖음. 그 모습을 인자하게 쳐다보는 당신의 넓은 어깨... 아이가 울음을 그친다. 아빠가 달랬나 싶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호가든 맥주 한 캔을 땄다. 오늘은 그런 날이구나 싶었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어쩌겠는가. 이게 나인데. 이게 내 현실인 것을. 


....



자유를 느낀다.... 자유. 자유란 무엇일까. 이 범상한 느낌이 가히 '자유'라고 정의하고 있는 나는 정말이지 '취했다'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 취했다. 아주 오랜만에 몹시. 엄청. 눈이 잠시 감길 정도로. 취한 채로 글을 쓰지 않은 적이 없다고 할 수 없지만 - 그것도 꽤 진지하게 초고를 집필했던 자기 계발서조차 사실은 맥주 한 캔에 의지한 채 썼었지 - 그렇다고 대놓고 '공개' 하는 글을 '이렇게' 취한 채로 쓴 적이 근 5년 이내 없었는데... 이래도 될까 싶었지만 이래도 되겠다 싶기도 해서... 설마 죽기야 할까 - 때로 자연스럽게 그러면 참 좋겠지만 - 아무렴..... 이 정도는 내 삶에서 허락되지 않을까 싶었기에. 취해서 쓰는 글 치고 섹시하지 않은 글이. (참 많지. 아마 내일 보고 나면 이불킥을 하거나 없어지고 싶어 질지도 모를 테지만) 



오늘, 아이는 쉴 새 없이 잠시 울어댔다. 가족이라 치부되는 애착인형의 일부분이 찢어졌기 때문이었다. 몸집이 제법 커지고 힘도 세 진 쌍둥이 형제가 다투다 생긴 결과는 그러했다. 그런데 어쩌나. 울음소리는 몸집에 비해 너무 컸고 작은 집의 벽면으로 흡수하기에는 너무 우렁찼다. 그리고 나는..... 이 모든 현상들을 대하는 나는. 헐렁한 면 티에 레깅스가 작업복이 된 한 여자는. 양념치킨을 이른 주말 저녁으로 호기롭게 시켜주면서도 밥을 먹이지 않아서 조금 마음이 걸렸던 나는. 그럼에도 네가 국기원에 가서 태극 8장 품새를 위풍당당히 하는 모습을 일요일 오전 9시부터 지켜본 네 어미는. 집밥을 다 해놨음에도 너희들이 원했던 치킨을 기꺼이 대령했던 나는. 이상하게 목이 너무 말라서 냉장고를 열어 보다 안 되겠다 싶어서 꺼낸 지평막걸리를 2병 연달아 한번에 마셔버린 나는. 그리고 성에 안 차 캔맥주까지 마시면서 갑자기 노트북을 열어서 키보드를 꾹꾹 누르기 시작한 지금의 나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고 하고 있고 앞으로도 할 것이다. 그것은 사랑.... 너희들을 당신을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나'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려 애쓰는 일을. 지독하게 일이 꼬여버리는 나날들의 연속이어도 나는 안다. 마음이라는 집 안에 갇혀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을. 갇히지 않고 열린 마음이어야 한다는 것을. 또한 안다. 집에 갇혀 있다는 생각 조차 해선 안 된다는 것을. 하면 곤란하지. 그래봤자 손해 보는 건 나 자신인 걸. 생각을 하다 눈을 질끈 감는다. 그리고 상상을 한다. 가장 좋아하는 순간을 떠올려 보자. 가장 원하는 장면을 생각해 볼까... 





오래전... 당신 '만큼' 날 좋아해 준 사람이 있었다. 바보 같은 나는 시간이 아주 많이 지난 후에야 알 수 있었다. 잊었지만 사실 잃었다는 것을. 얻는 게 있다면 잃는 게 있듯이, 그때, 그 사람은 몰랐겠지만 나는 공부와 돈을 택했었다. 연애를 도무지 할 수 없는 '처지'였다. 쪽팔려서 말하지 못한 채 나는 '너'를 그렇게 잃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이 아는 비밀들이 몇 개가 있겠고 내게도 그런 비밀들이 몇 개가 존재한다. 도무지 마음이 갑갑하고 다 털어 버리고 싶은 비밀들. 



술에 꽤나 취해서야 조금씩 희미하게 새어 나오려는 그런 비밀들. 그러나 여전히 의식은 무의식을 꽉 막고 있기에 좀처럼 내보내지 못한 채 다시 들숨 날숨을 한번 크게 들이켜 내쉬며 끝내 비밀을 토해내지 못한 채 그렇게 생활을 다시 지키면서 살아가는. 그런 비밀 한 두 개 정도. 그 비밀 중 하나에 속하는 '너'... 가끔 생각이 난다. 오늘 같이 취한 날이면. 내가 한 때 얼마나 사랑받았는지 영악하게 기억해내고 싶어서였겠다. 도무지 나 자신에게 자신감이라는 것이 탈탈 털린 지 너무 오래되어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렸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도 괜찮다는 그럴싸한 감성 에세이에 나오는 글귀들이 이상하게 우습게만 들리는 딱딱한 나이가 되어 버린 건지. 아무튼 지간에 나는 내가 얼마나 사랑받았었는지 기억하고 싶었나 보다. 왜냐하면....



사랑을 주는 일이 너무 버거워서........ 그래서일까. 이젠 좀 편하게 주고받고 싶다는 어리석은 생각... 때문일까. 물론 지금 내 곁의 너희들이, 당신이, 얼마나 나를 사랑하는지. - 그 사랑은 사랑일까. 그래 그 사랑도 사랑이라면 - 무조건적인 사랑을 해 주는 '가족'이라는 관계로 확실하게 '묶여' 버렸으니 아무렴. 알지. 그것도 사랑이라는 것을. 



그런데 어쩌나. 가끔. 정말 오늘 같은 날은 정말이지 가끔. 사실 내가 받고 싶은 사랑과는 꽤나 거리가 멀다는 것도 사실은 안다. 모두가 알지만 모르는 척하는 그런 마음을 나는.... 털어놓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가령 이런 형태일까. '책무'라는 것을 홀가분하게 덜어내고도 마음이 뭉클해지며 그냥 와인이나 막걸리나 맥주나 편하게 술을 즐겨 마셔도 다음 시간이 걱정되거나 내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사실 나는 나를 꾸짖는 게 싫지만, 오늘 같이 술을 마시면서도 이렇게 마시면 육아를 공부를 돌봄을 내일의 일과를 잘 해낼 에너지가 소모되니 조금만 마셔야 하지 않겠냐며 나를 다그치는데. 사실은 그러고 싶지가 않은 것... 일지도 모르겠다.... 무거워서. 이상하게 너무 무거워서. 억울하고 답답해서. 이젠 좀 그만 살고 싶을 만큼 가끔 정말 그러해서. 이런 모습을 들켜버리면 이런 나를 무서워할 테니 언제나 나는 오스카 여우주연상 뺨 칠 만큼 연기력을 충분히 다졌으니 오늘도 우리 집은 화평하다. 그러니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야... 나만 더 잘하면 그만일 테니까.. 






자신의 뜻보다 상대방의 뜻에 따라 사는데도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것. 그것이 오직 사랑에 빠질 때만 가능해진다던데. 그런데 나는 언젠가부터 별로 기쁘지가 않다. 자신의 뜻대로 사는 것이 소위 주인의 삶이고 타인의 뜻대로 사는 것이 노예의 삶이라던데 그러나 그 생각엔 오류가 존재한다. 일정 부분 누군가를 살피고 지키고 돌보는 삶에서는 완벽한 '주인'은 존재할 수가 없어.... 그건 정말이지 그 포지션으로 살아보지 않고서는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영역이라서. 



다만. 오늘. 자유를 느낀 건.... 내가 술을 마심으로 인해서. 완전한 주인이라고 '착각' 했기 때문이었다. 

내 시간의 주인. 내 인생의 주인. 대충 아무렇게나 살고 싶지만 이젠 절대 그럴 수 없는 위치에 처해져서 당분간은 모범적으로 엄청 열심히 분투하면서 그야말로 '솔선수범' 하면서 너희들을 지키며 살아야 하기에 대충 살 수가 없어서 참 고통스럽고 괴롭기도 하지만. 술을 한 모금 들이키고 두 모금 들이키면서 세 모금 들이키면서도 '잘했어 괜찮아'라고 생각했기에. 너무 취하면 안 되는데 싶어서 눈치를 조금 보면서도 마시는 술이 너무 달콤하고도 눈물이 날 것 같았기에. 이미 눈가에 눈물이 흠뻑 고였지만. 당신과 아이들은 티브이를 보며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고. 나는 장면에서 철저히 제외되어서 너무나도 다행이라고 생각이 되었기에. 자유로움을 그래서 느끼면서 마지막 취중고백을 하자면. 





침대 위에서는 섹시했고 옷장 앞에서는 명랑했으며 컨퍼런스 콜을 할 때는 꽤나 진지하고도 밝고 당찼던 어떤 여자는... 이제 그 모습들을 과감하게 버린 채로 다만 현명하고 지혜롭고 건강하게 좋은 엄마가 되는 법을.... 아주 몹시 꽤나 서툴지만 그럼에도 조금씩 확실하게, 어떤 세계와는 선을 그으며 이렇게 터득해 간다... 술을 먹고 잠시 동안은 숨통이 트는 듯한 기분이 들면서도 이내 아이들을 걱정하며 나의 어떤 실수들을 떠올리며 다시 스스로 숨통과 의식을 움켜쥐며 분투하는 그런 성실한 반복을 일삼는 일상. 선을 넘지 않은 성실함...흐트러지고 싶은 무의식과 싸우는 절대 형편 없이 흐트러지지 않겠다는 의식... 



아무것도 아직 달라지지 않았고 여전히 달라질 리는 없다. 다만 누군가 내게 말했던 '잘 살고 있다'는 그 문장에 뾰족한 연필로 선을 그어 버리고 싶었다는 것을 누가 알 수 있을까. 어떤 눈물은 그 누구에게도 응답받지도 이해받지도 못할 것이라는 게 못내 속상해서 괜한 심통을 부리듯 애꿎은 캔맥주를 노려보면서 한 캔을 더 마실까 싶은 고민을 하고 말았다는 걸 누가 알 수 있겠는가. 



다만 내가 알 뿐이다. 자신을 신뢰할 수 있도록 여전히 설득할 것임을... 

보잘것없고 초라한 이런 나를 과연 누가 좋아할까 싶지만. 이미 댁 내의 귀한 세 사람들에게 큰 마음을 받고 있는 데 무엇이 그리 무겁고 또 그리울까도 싶지만... 일상의 부침과 생활전선의 피곤함과 혼자만 아는 즐겁지 않은 장면의 연속임에도. 그럼에도 나아갈 수 있도록 스스로 설득할 것임을... 그것만이 내가 스스로 고백할 수 있는 진실의 끝, 맥주도 끝, 오늘의 술도 이쯤에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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