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황 증상 때문에 정신과에서 MMPI 검사를 받았을 때, 이런 피드백을 들었다.
"모든 수치가 정상 범위이긴 해요. 그런데 지배성(dominance)이 높으신 편이네요 ㅎㅎ"
자기 삶에 대한 지배력이 높단다. 으이구 뻔해. 대문자 J가 어디 가겠나.
사회생활을 하면서 배운 진리는 '인생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면접에서 "10년 뒤 계획을 말해보세요."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도 이런 대답밖에 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계획대로 된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에 10년 뒤 계획은 사실 없습니다. 그냥 오늘 하루를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어요."
대답은 이렇게 했지만 사실 나는 알고 있다. 나라는 인간은 계획을 세우지 않고선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무슨 일을 하든, 서너 개 정도의 백업 플랜이 있어야만 마음이 놓인다는 것을. 변수가 발생하는 상황 자체가 힘든 것이 아니라, 변수를 통제할 수 없는 내가 너무 싫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나의 첫 직장은 시간 단위로도 의사결정이 바뀔 수 있는 IT 직군이었다. 아무리 오류 테스트를 완벽하게 하고 세상에 내보냈다고 해도, 새벽 2시쯤에 꼭 장애 알람이 울렸다. 그때 막내였던 내 역할은 자고 있는 개발자들을 깨우는 것이었다. QA(Quality Assurance)를 꼼꼼하게 해도, 버그가 나는 상황 자체를 막진 못했다. 오히려 버그가 없으면 불안했다. (그것은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빅똥이 있단 얘기나 마찬가지다.) 그 당시의 나의 소원은 '실시간 서비스'를 하지 않는 직종에서 일하는 것이었다.
그다음에는 마케팅을 하게 됐다. 여기선 버그가 아니라 사람과 싸운다. 마케팅의 최대변수는 '사람'이다. 문제는 사람의 마음이 항상 바뀐다는 데 있다. 단순히 눈에 보이는 데이터만으로 해석하고 예측하기엔 사람의 마음은 너무 깊고 복잡하다. 이런 변수들을 가장 많이 경험하는 장소가 오프라인 행사다. 우리는 당일 함께하는 셀럽의 컨디션, 청중들의 분위기나 몰입도를 전부 통제할 순 없다.
지난주에 오프라인 행사가 있었다. 노쇼방지를 위해 예약금을 걸어놨음에도 불구하고 오기로 했던 인원의 80%밖에 오질 않았다. 게다가 행사 타임테이블은 계획했던 것보다 많이 초과되고 있었다. 사람들이 지루해하지 않을까. 전반적으로 너무 늘어져 보이면 어떡하지. 내내 불안하고 초조해하며 청중들의 눈치를 살폈다. 그래서 행사를 통해 얻어야 했던 목표 수치를 낮게 조정했다. 그런데 행사가 마칠 무렵,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났다. 목표했던 것의 3배를 뛰어넘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너무 좋은 시간이었어요."
만족한 표정으로 나오는 청중들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우리가 준비하고 계획했던 것들 중 많은 것들을 실행하지 못했던 행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감동을 받고 진심으로 참여했다. 사람의 마음이 이렇게 어렵고 알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낀 시간이었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이런 종류의 일들은 비일비재하다. 함께하기로 했던 셀럽의 일정이 갑자기 변경되어 협업 자체가 엎어지기도 하고, 다 만들어놓은 제작물을 여러 가지 상황으로 공개하지 못할 때도 있다. 당장 캠페인 오픈일은 다가오는데 의사 결정의 key를 쥐고 있는 사람이 연락이 안 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상황을 마주치면, 나 같은 성격의 사람들은 너무 큰 허탈감을 느낀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진짜 성장은 '깊은 무력감'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인정하게 되는 순간, 진짜 팀 플레이가 시작된다. 고난을 함께 겪은 사이가 더욱 끈끈해지듯이, 통제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침착하게 자기 역할을 하고 있는 동료들의 모습은 큰 힘이 된다. 그런 경험들을 몇 차례 하게 되면, '내 마음대로' 하고 싶어지는 순간이 올 때에도 '저들도 저들의 역할을 다 할 것'이라는 믿음이 이기게 된다.
아마도 나는 죽을 때까지 '통제하고 싶은 기질'을 지니고 여러 상황과 씨름하며 지내게 될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내 맘대로 되지 않았을 때 일어나는 이상하고 좋은 일들'을 되새겨보련다. 그리고 믿어야겠다. 실수와 실패 가운데에서도 결국 우리는 선한 방향으로 갈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