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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만두 한 주먹 Apr 28. 2022

[21세기 원시인]
ep 4. 원시인들의 거주지

그저 살다보면 살아진다

1)  무모하지 않은, 귀촌


눈을 뜨면 보이는 풍경, 바람결을 따라 내게 도달하는 모든 소리와 냄새까지. 도시에서 위의 세 가지 요소를 모두 충족시키는 공간을 찾는 것은 꽤나 쉽지 않은 일임을 깨닫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생각이라는 관념으로만 머물러 있던 ‘귀촌’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었다.


내가 감수해야 할 위험은 없었느냐고 묻는다면,     


자연은 나의 의지나 성취 따위와는 무관하게 저들 몫의 일들을 있는 그대로 톡톡히 수행해낸다. 인간과는 완전한 별개로서 존재하는 지표들 덕에, 시골만은 무언가를 ‘기어이’ 따내지 않아도 삶의 가치를 자연스레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 숨쉬고 있음을 온 감각기관으로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은 그 얼마나 감사한가.      


혹 무모함에도 정도가 있는 거라면 도시에서의 삶이 시골의 그것에 비해 크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나의 노력 없이도 그저 그런 대로 흘러가는 ‘자연’이 있는 곳에서의 일상. 

그렇기에, ‘귀촌’은 내게 오히려 덜 무모한 결정이었다.


이전 화에서 이미 우리의 주거 공간을 소개한 바 있지만, 그 또한 이 마을의 한 부분일 뿐이다. 나무를 봤으면 숲도 봐야지. 한때 어딘가로부터 떠나기를 택했던 우리가 정착해 살아온, 살아가고 있는 마을을 소개하려 한다.          



2) 우리가 원구의 자랑이 될 수 있을까


#영해면_원구전통마을     


조그마한 슈퍼마켓 하나 없는 원구마을에서 지낸 기간은 딱 100일 남짓. 짧다면 짧게 느껴질 수 있는 기간이지만, '보금자리가 생명체에게 주는 긍정적인 영향'만은 몸소 느낄 수 있었다. 고즈넉함이 주는 힐링이랄까.      

아무것도 없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텅 비어 있는 이곳에서 ‘우리의 공간’을 영위한다는 건 얼마간의 애틋함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공간과의 연결감이란 도시보다 시골에서 몇 배는 더 강하게 작용한다는 것을 우리는 이곳에서 배웠다.



영해면에서 경북 영양군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한 원구마을은 50가구가 채 되지 않는 마을이다. 규모는 작지만 이곳 주민분들은 마을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시다. 그도 그럴 것이 한옥 문화재가 어우러진 고품격의 분위기며, 길가에 덩그러니 심겨 있는 나무의 모습이며, 어느 하나 예사롭지 않은 것이 없다. 그중 단연 이 마을의 자랑거리라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규모 대비 고위 관직자 배출 사례가 상당하다는 사실.  

   

그만큼 터가 좋은 것이라 받아들이기로 한 우리는 ‘터가 좋은 마을’에 어울리는, 또 다른 선례이자 자랑거리가 될 만한 일들을 해보자고 다짐했다. 비록 그 걸음의 끝이 고위 관직자로 향해 있는 것은 아니더라도 말이다.      

하나 확실한 것은, 적어도 우리에게 있어 원구마을은 분명한 자랑거리라는 지점이다.



지난 봄, 우리는 운이 좋게도 원구전통문화축제에 초대받았다. 원구마을로 들어선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처음으로 참여한 마을 공식 행사여서인지 더욱이 설레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우리도 이번 계기를 통해 원구마을의 당당한 일원으로서 인정받았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특별할 것 없는 마음가짐에 가벼운 발걸음으로 행사장을 찾았건만, 갓끈을 단단히 묶은 어르신들께서 별안간 우리에게 ‘유생’이란 타이틀을 부여하셨다. 유생들이 입었을 법한 선비 의상을 갑작스레 품에 떠안은 우린 무얼 어찌할 줄 모른 채로 벙쪄 버렸다.     


하지만 낯섦이란 것도 사치일 뿐, 과몰입이라면 우리도 자신 있었다. 누가 ‘E’형 원시인들이 아니랄까봐 금세 적응해 마치 행사의 주인공인 양 마을을 휘젓고 다녔다. 옷의 소재가 땀복 수준으로 통풍이 안 됐던 점만 제외하면 모든 게 완벽했던, 특별한 하루였다.      


참고로 원구마을은 전국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유달리 아름다운 보호수를 보유한 곳이라고 한다. 근처에 갈 일이 있다면 꼭 한번 방문해 보시길!



3) 면내로 가자


#영해면_성내리     


뚜벅이스테이션의 완공과 함께 넘어온 새로운 보금자리, ‘성내리’. 사실 우리끼리는 성내리라는 단어보단 ‘면내’라는 단어를 더 자주 사용한다. 그렇다면 면내에는 뭐가 있냐고?  


없는 것 빼고 다 있다     

심지어 최근에는 프랜차이즈 햄버거 가게까지 들어오면서 햄버거를 먹기 위해 영덕읍까지 가야 하는 불편함도 사라졌다. 감히 가늠해 보건대 귀촌하신 분들은 이해하실 테다. 먹지 못하는 것을 먹기 위한 갈망을. 그리고 마침내 먹을 수 있게 되었을 때의 행복을. 햄버거도 그렇고, 나에게는 파스타 역시 그렇다.


영덕은 대한민국에서 알아주는 관광지다. 물론 우리가 사는 영해면은 대게로 유명한 강구면에 비해 관광인구가 많지 않으나 소멸지역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유동 인구가 꽤 있는 편에 속한다. 면내에 편의점이 무려 5개나 있다고! (참고로 면에 편의점이 5개가 있다는 건 그 면이 꽤 크다는 의미….) 

이것도 자랑이라고 늘어놓는 현실이 조금 허탈하게 느껴지긴 하지만, 이마저도 조금은 즐길 줄 알게 된 우리는, 이제 ‘제법’ 원시인들이다.


0일, 5일은 영해면의 장날이다. 장날이 주말과 겹치는 날이면 미리 준비해둔 장바구니를 들고 괜히 영해만세시장에 나가보곤 한다. 장바구니는 비워둔 채로 닭강정과 떡볶이만 먹고 돌아오는 날이 대부분이지만 가끔씩은 이상한 데 꽂혀 특이한 재료를 구매할 때도 있다. 예를 들면 손질할 줄도 모르는 정체 모를 생선이라든지, 혹은 맥주 안주로 좋겠다며 충동적으로 구매한 황태라든지. 사실 나는 이 재료들을 구매하여 냉장고에 넣어놓기만 할 뿐, 소비하는 사람이 누군지는 알지 못한다. 적어도 나는 아니다.     


바닷가 마을 특성상 동네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고양이들을 발견할 수 있다. 어느 지역에나 고양이는 돌아다니기 마련이지만 이곳 길고양이들은 웬만하면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더라. 심지어 다가가서 사진을 찍는데도 움직이질 않는다. 그 깡다구를 생각하면 꼬순이 사료를 뺏어 먹던 것도 납득은 된다. 마치 나쓰메 소세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 나오는 고양이를 보는 듯한 강인함.     


이제는 ‘고양이다!’라고 놀랄 것도 없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상 속의, 지극히 당연하고 평범한 구성원이 되어 버린 탓에 그 반가움은 조금 덜하지만 어쩌다 돌아본 골목 귀퉁이에서 고양이를 마주칠 때면 하루 틈의 여유를 느낄 수 있다. 물론 가끔씩 공들여 묶어 놓은 쓰레기봉투를 갈기갈기 찢어 헤집어 놓은 걸 볼 때면 귀여움이고 뭐고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오르기도 한다.      



4) 최선 대신 유일한 것


미숙한 글로나마 우리가 사는 동네를 소개했는데, 생각했던 만큼 잘 그려졌는지는 모르겠다.  

                  

기본적으로 원시인들이라면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어디서나 잘 살 거란 편견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더’ 좋은 동굴을 찾아 헤매던 과거의 진짜 원시인들처럼, 우리 또한 ‘좋은’ 곳에서 살아가기를 추구한다. 그 ‘좋음’의 기준이 남들과는 조금 다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먹어봤기에 알 수 있는 맛이 있고 다쳐봤기에 알 수 있는 고통이 있듯, 살아봤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동굴을 옮겨다니며 정착할 곳을 찾던 과거의 원시인들이라고 해서 애초에 찾고자 하는 ‘최선’이 있었던 것은 아닐 테다. 선택지 자체가 주어지지 않았는데 어찌 그중 무엇 하나가 최선이라 단정지을 수 있겠는가.


약 일 년간 우리의 정착지인 영덕 영해면에 살아보니, 이제야 알겠다. 살기 위해 찾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다 보니 찾아지는 것임을 말이다. 우리는 어쩌면 ‘우리를 방해하지 않을, 평화로운 곳’을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남들이 보기엔 너무 별것 없어서 그저 그런, 아무렇지 않은 공간. 

     

이곳에 살아봤기 때문에, 우리는 이곳이 우리의 공간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영해가 아니면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은, 다시 말하면 ‘영해에서 해봤기에’ 생겨난 것들일 테다. 

그럼 어쩌나, 아무런 조건도 없이 찾은 공간이 이제는 우리에게 유일한 조건이 되어 버린 것을.

      

모자랄 것도, 넘칠 것도 없이 그저 그렇게 우리의 속도대로 흘러가며 사는 삶. 

그런 삶을 지향하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영덕군 영해면은 실로 최적의 동굴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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