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재킹’과 ‘탈주’는 비슷한 점이 많다. 모두 남북의 대치 상황을 담고 있어서 ‘분단영화’의 계보에 놓을 수 있다. ‘하이재킹’이 남에서 북으로 가려고 했던 청년의 이야기라면, ‘탈주’는 북에서 남으로 가려고 했던 청년의 이야기다. 용대(‘하이재킹’)와 규남(‘탈주’)의 방향은 달랐지만, 지향은 같았다. 바로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것. 실패해도 좋으니 희망의 가능성이 1%라도 있는 세상에서 살기 바랐다. 용대에겐 북이, 규남에겐 남이 그런 세상이다.
용대는 속초에서 서울로 향하는 항공기를 납치한다. 항공기를 납치해 북으로 가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는 얘기를 들어서다. 6ㆍ25전쟁 당시 형이 월북하면서 늘 빨갱이로 오해받았던 용대에게 남한은 생지옥이나 다름없다. 명석한 두뇌를 가졌지만, 빨갱이 낙인으로 인해 제대로 된 직업조차 구하지 못한다. 어머니는 비참하게 죽고, 남은 건 자신과 자신을 핍박하는 나라밖에 없다. 북으로 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규남은 군인이 아닌 탐험가로 살고 싶었다.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자유롭게 존재하고 싶었다. 우여곡절을 겪더라도 자기가 원하는 일을 원하는 방식으로 실천하고 싶었다. 하지만 북한이라는 나라는 실패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북한은 인간을 수동태로 만들어버리며 꿈과 희망을 말살하는 공간이다. 군 복무 중인 규남은 매일 탈북을 연습한다. 지뢰가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야 남으로 빨리 넘어갈 수 있는지 연구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용대는 북으로 가지 못하고, 규남은 남으로 간다. 왜 용대는 월북에 실패하고, 규남은 월남에 성공할 수 있었을까. 사실 중요한 건 성공과 실패가 아니다. 용대와 규남의 행동을 촉발하게 한 동인이다. 누구에게는 생지옥이나 다름없는 땅이 다른 누구에게는 생을 걸고 당도해야만 하는 복음의 땅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그런 점에서 남과 북은 등가물(等價物)이다. 영화적 영토가 같다는 말이다.
현실의 영토로 눈을 돌려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남한의 젊은 세대는 한국을 ‘헬조선’이라고 부른다. 계급 상승의 사다리가 완전히 붕괴한 한국 사회의 암울한 현실을 반영한 단어다. 취업난과 주거 불안에 시달리며 하루하루 버티는 남한 청년들이 행복한 가정을 꿈꾼다는 건 불가능하다. 북한의 상황은 더 심각하다.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남한이 헬조선이라면 북한은 헬 그 자체일 것이다.
문민정부 이후 제작된 분단영화 속 남북 인사들은 사랑에 빠지거나(‘쉬리’), 합심해 미군에 대항했으며(‘웰컴 투 동막골’), 서로의 가족을 찾아주기 위해 노력했다(‘의형제’). 동족상잔의 비극을 담은 전쟁영화 역시 많이 제작됐다. 요컨대 군사정권 시절 분단영화가 체제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선전 성격이 강했다면, 지금의 분단영화는 그러한 범주에서 벗어나 있다. 북한군을 괴물로 묘사했던 반공영화도 장르의 수명을 다했다.
남북의 체제 경쟁은 이미 끝났다. 북한은 실질적 핵보유국이 됐고, 남한은 경제 강국이 됐다. 체제 경쟁 끝에 남은 것은 무엇인가. 액션영화의 외피를 두른 ‘하이재킹’과 ‘탈주’를 나란히 놓고 보았을 때, 떠오르는 질문이다. 용대와 규남은 아마도 이 질문에 대해 “여기만 아니면 된다”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북으로 가지 못한 용대를 실패라고 말할 수 없고, 남으로 간 규남을 성공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