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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마담 May 08. 2024

'하다못해 오은영'이라도 듣던가

옛날 아빠들의 워딩 



#1. 바뀌느니 죽지 화법


아들의 방문이 덜컥 열렸다. 아침 댓바람부터 남편의 목소리 톤이 높다.


"너 자전거 센서 떨어진 거 알았지? 이거 언제 떨어진 거야?"

아직 잠이 덜 깬 아들의 목소리가 더듬더듬 이어진다.

"어젯밤에... 너무 늦어서... 아빠한테 얘기 못했어."

"갑자기 떨어진 건 아닐 거잖아. 언제부터 이랬어?"

".... 그게... 지난주부턴가... 좀 덜렁거렸던 거 같은데. 기억이 안 나."

잠시 침묵. 

"그럼 흔들렸을 때 빨리 얘길 했어야지."

"....."

"네가 이러니까 내가 다른 거 까지 다 의심할 수밖에 없잖아."


평상시에도 2 이상을 넘지 않는 남편의 목소리 톤이 점점 높아지더니 5쯤 됐을 때 남편이 다시 숨을 고른 후 3쯤에서 힘주어 다시 반복했다. 

   

"네가 이러니까 내가 다른 거까지 다 의심할 수밖에 없다고!"


몇 달 전부터 아들은 남편의 자전거를 빌려 타고 가끔 야행을 다녔다. 자전거가 없는 친구에게 자기 자전거를 빌려줘야 해서이기도 했지만, 아빠 자전거 성능이 월등히 좋기 때문이기도 했다. 문제는 아들은 남편과 달리 물건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는 것. 물건을 막 쓰고 망가져도 고쳐 쓰지 않는다(이것도 꼭 나다 ㅠㅠ). 이번 일만 해도 아들이 만능 문제해결사인 아빠에게 빨리 얘기만 했으면 군말 않고 즉시 고쳐줬을 것이다. 게다가 자전거를 무척 아끼는 남편이 애초에 아들에게 자신의 자전거를 빌려주었을 때에는 이 모든 사안을 감안했음에도 불구하고 배포 크게 내어준 것이다. 그러니 아들이 몇 주 전부터 센서가 흔들렸는데도 바로 아빠에게 말하지 않고 센서가 떨어져 나갈 때까지 타고 다녔다는 건, 이 모든 아빠의 호의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보답은커녕 최소한의 조심성도, 배려도 가지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런 데다 아들은 그날 아침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닌 바람에 눈치까지 챙기질 못하고 그만 '지난주부터'라고 이실직고하고 말았으니... 이날 아침의 일은 배려도 눈치도 모두 챙기지 못한 백퍼 다 아들의 잘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장에는 오류가 있다. 자전거 스피드 센서가 떨어졌다고 다른 거까지 다 의심할 수 없다는 말을 이렇게 두 번이나 해야 했나? '자식을 훈계할 때에는 이전의 잘못까지 끌어와 야단지치 말 것'. 자녀 훈계에 관한 대원칙이다. 물론 나도 남편이 그동안 얼마나 아들에 대해 많이 참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남편은 '할 수 있는데 하지 않는 인간, 기왕에 하면서 열심히 하지 않는 인간'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뭔가 하고 있지 않은 인간에 대한 근원적 불안과 태생적 몰이해를 DNA에 가지고 태어난 남자다. 딱 시시포스적 인간. 그러니 몇 년 전부터 제대로 해보겠다고 하는 말만 반복하다 결국 대학에도 못 간 주제에 간신히 얻어걸린 직업훈련 과정까지 여전히 정신 차리지 못한 자세로 어영부영 때우고 있는 아들이 못마땅 해도 백번 못마땅할 터.하겠다고 하고 하지 않는 인간 대마왕인 아들을 좋아할 수 없어 본인도 괴롭기 그지 없을 거였다. 그 모든 게 참다 참다 그날 새벽 댓바람에 터쳐나온 게 '네가 이러니 내가 다른 거까지 다 의심할 수 밖에 없다'에 모두 함축되어 있었다. 


예전의 나였다면 그런 남편에 백분 빙의해서 군말 않고 말았을 거다. 하지만, 그날은 하필 둘째 아들의 생일이었고 우리는 저녁에 함께 외식을 하러 가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아침 댓바람부터 아빠에 한 소리 들은 큰 아들이 컨디션을 핑계로 같이 따라나서지 않았고, 그래서 나는 그만 외식을 하러 나선 차 안에서 남편을 향해 한 마디를 내뱉고 말았다.


"당신이 많이 참고 있는 거 알아. 이번 일 다 OO 잘못인 것도 알고. 나도 걔가 잘하고 있다고 말하는 게 아니잖아. 그저 잘못을 지적하고 대체 왜 그러냐고 따져봐야 안 바뀌니까. 그런 부정적인 말로는 사람이 바뀌지 않는다는 걸 우리가 숱하게 봤으니까. 우리가 부정적으로 말하면 애들은 그거 기억했다가 그걸로 나중에 꼭 말꼬리 잡더라고. 엄마가, 아빠가, 그때 그런 말 해서 내가 이렇게 된 거라고. 그러니까 우리가 내뱉은 말로 빌미라도 잡히지 말았으면 좋겠어서. 그래서 긍정적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주는 말을 하자는 거잖아."


남편은 당연히 항변했다.

"야, 그래서 내가 평소에 말 잘 안 하잖아. 근데 나도 사람이니까, 내가 이 정도 말도 못 하냐?  내가 그동안 얼마나 참았는데..."

"그래, 알아. 당신이 할 말 다했으면 OO는 벌써 집에서 쫓겨났을 거고, 우리 집 풍비박산 났을 거라고. 내가 왜 몰라? 다 안다고. 당신이 오래 참은 것도, 많이 참고 있다는 것도 다 알아. 나도 당신은 충분히 그런 말 할 자격 있다고 생각한다고. 근데 요점은 그게 아니잖아. 그저 이번 일로만 말했으면 좋았을 텐데 당신이 다른 거까지 다 물고 들어와 얘기하니까. '너의 모든 걸 의심할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확대 해석하진 않았으면 좋았겠다는 거지."


"그러니까 니 말은 내가 이런 말도 하면 안 된다는 거지? 내가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거잖아. 그래, 내가 아예 말을 말아야지. 내가 입을 닫아야지!"


그 모든 당신의 행동은 지당하고 아들이 모두 잘못한 것은 맞다고 전제를 깔았는데도. 과거의 것을 끌어와 이야기하는 워딩의 문제점을 지적한 거라는 말을 남편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이러니 김창옥 교수가 맨날 노벨상 수상자 부모의 공통점 따위 이런 우스갯소리를 하는 거 아니겠나. 엄마들은 노벨상 수상에 기여도가 없단다. 하지만 아버지들은 공통적인 특징이 있는데, 바로 노벨상 수상자들의 50%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안계신단다.  


내 생각엔 나머지 50%의 아버지들도 이렇게 '바뀌느니 죽지 화법'이지 않았을까 싶다. 


#2. 나는 옳고 너는 그른 화법


이틀 뒤 일요일. 교회 가는 차 안에서 다시 이야기가 이어졌다. 


"당신이 옛날 사람인 건 알고 있지? 엊그제 생일날 저녁에 ㅁㅁ가 우리한테 고민 털어놓은 거. 아직도 대학에서 뭘 전공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빨리 학과가 정해지면 좋겠다고. 그때 당신이 뭐랬는지 기억나?"


그때 남편은 둘째 아들에게 이렇게 라테~를 시전 했더랬다. 

"그런 걸 왜 고민하니. 고민할 시간에 모든 과목을 다 잘해놓으면 되지. 그러면 나중에 네가 정말 하고 싶은 게 생길 때 아무 거나 고를 수 있잖아."


첫째 아들과 달리 공부는 물론 운동, 악기, 교우관계 모두 절대 놓치지 않는 둘째 아들은 올해 고1이 되었고 진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돈을 많이 버는 직업' 이상의 어떤 분야에도 특별한 관심이 생기지 않아 고민이다. 그날 저녁만 해도 ㅁㅁ는 1학년 때 빨리 학과가 정해져서 원하는 대학에서 요구하는 과목과 전형에 맞춰 자신의 레퍼런스를 만들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며 우리의 조언을 구하던 중이었다. 근데 고민할 시간에 모든 과목을 다 잘하면 된다니? 선택과 집중을 통해 전략적으로 접근해도 어렵디 어려운 대한민국 입시판에 지금 어느 적 얘길 하고 있나. 남편은 그동안 대학 입학 정책이 얼마나 달라졌는지에 대해 어떤 관심도, 정보도, 감도 없었다. 그러니 대화가 더 이상 이어질 리가 없었다. 


나는 말 나온 김에 다시 한번 엊그제 첫째 아들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남편이 이해하지 못한 훈계의 대원칙에 대해. 왜 남편의 말은 늘 옳지만 대화가 어긋나는지에 대해. 자로 재듯 딱 떨어지지 않는 인간관계의 어려움에 대해. 남편이 자존심 상하지 않도록 최대한 에둘러 말했다. 내 목소리도 간만에 작두를 타며 길어졌다. 웬일인지 한참을 귀담아 듣는 듯 싶던 남편이 신호등 앞에 멈춘 대기를 타는 동안 내게 말했다.  


"그래... 그래서, 당신이 그렇게 공부를 많이 했으니 말해봐.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거 봐. 여태 말했는데, 당신 지금도 잘 못알아 듣잖아. 그걸 또 한마디로 어떻게 다 말하냐. 분명한 건 우리가 첫째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고 지금도 잘 모르겠잖아. 그리고 뭔가 잘못된 거 같다고 생각하잖아. 그럼 책을 읽던지 주변에 조언을 구하던지, 뭔가 업데이트를 해야지. 왜 그런지 알아야 바뀔 거 아니야. 그게 어려우면 '하다못해 오은영'이라도 듣던가."


그러자 남편이 익숙한 패턴으로 말했다. 

"내가 '오은영'을 왜 듣냐?"

"내가 이러니까 당신에게 말을 못 하는 거야. 당신은 대한민국에서 제일의 교육전문가라고 하는 사람의 말도 듣지 않겠다잖아. 그런데 아들 잘못 키운 나 같은 여자 말을 들을 리 있겠어? 그래, 아들은 나 혼자 키우고 내가 다 망쳤지. 당신이 필요하다고 느끼면 직접 공부하고 문제가 뭔지 찾아봐."

 

새삼스럽지도 않다. 아들이 저렇게 된 건 다 엄마인 내가 잘못 키워서라고, 그는 추오의 의심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니 내 말이 들릴 리 없지. 자신은 늘 아들 문제에 개입하려 했지만 우리 여자들이 그러면 아들이 상처받는다고, 눈높이를 좀 맞추라며 매번 자신을 막았다고 했다. 그래서 저렇게 제멋대로 나약한 아들로 자랐다고. 그러니 늘 자신은 옳고 우리는 글렀다.  


아들 사춘기를 겪으며 많은 부부를 만나고 이야기를 들었다. 사춘기와 갱년기를 지나며 저마다의 이유로 아들 혹은 딸과 갈등을 겪지 않은 집이 없었다. 애들은 죄다 핸드폰과 게임과 쇼츠 중독이었고, 그중 몇몇은 우울증과 공황장애로 약을 먹거나 상담을 받거나 혹은 그 언저리를 맴돌았다. 부모들은 갑자기 커버린 아이들과 달라진 세계에 대해 여전히 어안이 벙벙해 있었다. 부모인 자신이 뭘 그리 잘못했는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많은 원인을 자신 안에서 찾으며 자신을 재발견하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인간관계의 문제는 대체로 쌍방이다. 나는 다 옳고 그 사람만 틀릴 리 없다. 문제가 발생해도 그 원인이 늘 외부에 있다면, 상황이 바뀌지 않을 거라는 건 너무 명확하다. 나 하나도 바꾸기 이렇게 어려운데 어떻게 남을 바꾸겠나. 게다가 그 남이, 고작 열아홉 해를 폭풍처럼 막 지나온 신출내기 어린아이 일 뿐이라면? 오십 해를 온갖 풍상을 겪어온 남편아. 그러니 나는 늘 내가 틀린 것만 같은데, 어떻게 너는 늘 네가 옳은지. 나는 그게 더 의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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