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쏭마담 Oct 24. 2021

#12. 돌봄과 가사 노동

- 폄하는 어디로부터 기인하는가 



회사를 때려치우고 나서 나는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사는 여자가 되었다. 요즘은 남자들보다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는 수완 좋은 이웃 여자들도 흔하니, 시쳇말로 남편에게 '빨대 꽂아 단물만 쏙쏙 빨고 있는 여자'. 그게 바로 나다. 여기까지 이야기하고 보니 다시 단톡 너머로 친구의 울그락불그락 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대체 부지불식 간에 깔려 있는 이 돌봄과 가사 노동에 대한 폄하는 어디에서부터 기인하는 걸까. 


카트리네 마르살의 저서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에 의하면, 사회가 가사노동의 가치를 인식하고도 오랫동안 GDP에 포함하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고 한다. 그럴 필요 자체가 없었다는 거다. GDP라는 것이 작년 대비 올 한 해 어떤 산업군이 성장하고 쇠퇴했는지 그 변동 수치를 반영하는 건데, 사회에서 수행되는 가사 노동의 양은 거의 항상 동일하기 때문에 반영할 필요 자체가 없었다는 것. 그래서 당시 경제학자들 사이에서는 이런 농담이 있었단다. “남성이 자기 가사 도우미와 결혼하면 그 나라의 GDP가 감소하고, 자기 어머니를 양로원에 보내면 GDP가 상승한다."라고. 


가사 노동 자체가 얼마나 오랫동안 형체 없이 존재해 왔는지 보여주는 얘기다. 


그러다가 1,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집안에서만 갇혀 있던 여자들이 대거로 사회로 나가게 되었다. 전쟁에 나간 남자들 대신 부족해진 일손을 돕기 위해 공장으로, 일터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백인 여자들의 가정 내 공백은 누가 메워 주었을까? 또 다른 여자들, 서구 사회의 입장에서 보면 제3세계의 여자들이었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영어 잘하는 필리핀 가사도우미나, 중국어 잘하는 조선족 이모님이다.


형체 없던 돌봄과 가사 노동은 이런 식으로 사회에 커밍 아웃하기 시작했다. 가사노동이 하나의 산업군으로 인정되고 형체가 없던 가사노동 자체가 수치로 환산되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라. 여자들이 사회에 나가서 일하면서 가사도우미를 고용하려면, 가사도우미에게 주는 돈이 자기가 벌어오는 돈보다 훨씬 적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돈을 벌러 나가는 의미가 없다. 그러다 보니 여자들 사이에서 또다시 위계와 불평등한 구조가 발생했다.


맞벌이하던 시절. 우리 집에도 한동안 이모님 한분이 아이들을 돌봐주셨다.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 6시 퇴근하는, 근무시간으로 따지면 나와 똑같은 풀타임 근무였다. 공식적으론 아이를 봐주는 일이었지만, 된장도 후딱 잘 끓여 아이들 먹이고 빨래도 돌려주시는, 실질적으로 집안일까지 다 해주셨다. 하지만 이모님의 월급은 당시 시세보다 조금 더 쳐드렸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론 내 월급의 1/3 정도밖에 안 됐다. 그 후 내가 회사를 그만 두자 이모님과의 연락도 차츰 멀어지고 말았는데... 올해, 명절을 앞두고 실로 오랜만에 이모님이 전화를 주셨다. 


"은주 씨. 잘 지내죠? 내가 사과 한 박스 보내주려고 하는데... 주소 좀 불러봐요." 


전화기 너머 이모님의 목소리는 예전보다 훨씬 더 활기가 넘쳤다. 이런저런 아이들 안부며 소식을 나누던 중 그간 이모님의 삶의 이력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우리와 헤어진 뒤 직업소개소를 통해 소개받은 집들마다 계속 좋은 사람들을 잘 만났다고 했다. 집을 옮길 때마다 이모님의 몸값은 점점 뛰었고, 지금은 한남동에서 아이 둘을 돌봐주고 있다고 했다. 무슨 비트코인으로 성공한 젊은 사업가의 집인데, 3교대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밥해주고 청소해주는 사람도 다 따로 있다고 했다. 네에? 아이 돌보는 사람만 3명이라고요? 내가 호들갑을 떨며 되묻자, 이모님이 수줍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러고, 월 400 받아요." 


맞벌이하던 당시, 가끔 어머니가 집에 올라와 여자 셋이 며칠씩 함께 지내던 때 이야기. 그때도 손이 컸던 이모님은 버스를 타고 출퇴근하시면서도 애들 먹이라고 제철 과일은 물론 집에서 담근 게장이며 끓인 국을 한솥씩 짊어지고 환하게 웃으며 현관문으로 걸어 들어오시곤 했다. 그런 이모님을 두고 어머니가 하신 말씀이 있다. “다 좋은 데, 낭비가 좀 심하다.” 어머니 입장에서 여자라면 모름지기 한 푼 두 푼 모아, 먹을 것 안 먹고 입을 것 아껴서,  빨리 방 한 칸이라도 마련할 궁리를 해야 하는데, 도무지 이모님은 그래 보이지 않았던 거다. 버는 족족 쓰고 내 것 네 것 없이 퍼다 나르는 방식은 영락없이 가난의 꼴을 벗어나지 못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이모님이 '큰 손'은 자기 노동을 팔아 번 돈이기에 가능했다는 것을.  


10년 전 GDP를 움직이며 당당히 노동을 팔아 살던 나는 돌봄과 가사노동이라는 '집안'으로 들어왔다. 남편의 쥐꼬리만 한 월급을 한 푼 두 푼 아껴, 아니, 남편에게 빨대 꽂아 단물만 쏙쏙 빠는 여자가 되었다. 10년 전 돌봄과 가사노동을 가지고 '바깥'으로 진출한 이모님은 노동시장에서 당당히 자신의 노동을 팔아 GDP에 일조하는 커리어우먼이 되었다. 10년 만에 돌봄과 가사노동은 노동 가치 교환가치를 인정받는 고부가 가치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불과 100여 년 전, 돌봄과 가사노동은 남자들처럼 직업을 구할 수 없고 남편을 얻을 수 없었던 여자들의 전유물이었다. 여자라면 남자를 위해, 어머니라면 아들을 위해 당연하던 제공되어야 하는 수고였다. 하지만 지금, 남자들의 그늘에 갇혀 유령처럼 존재하던 여성의 돌봄과 가사노동이 점점 그 모습을 드러내는 중이다.    

이전 11화 #11. 합법의 이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