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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마담 Oct 24. 2021

#14.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 합일을 이루지 못한 우리의 문제



철학자 융의 '아니마(남성 안의 여성성)와 아니무스(여성 안의 남성성)' 이론에 따르면, 우리는 남편이 '나와 달라서' 좋았다.


연애하던 시절 남편은 대지 위에 굳게 서서 절대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었고, 자기중심으로 지구를 돌리는 사람이었다. 그는 내가 가져보지 못한 기질과 가정환경과 교육과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나와 다른 그의 세계에 매혹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자신과 다른 대극 혹은 부족분을 서로를 통해 통합하며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있었던 셈인데... 그렇게 거창한 이론 운운하지 않더라도, 남녀의 첫 만남에 대한 이야기는 온통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통해 얼마나 완전한 인간이 되길 열망하는지 대한 이야기가 아닌가!


문제는 그렇게 대극에 이끌려 사랑에 빠졌던 우리가 그 대극 때문에 나중엔 미치고 팔딱 뛰게 된다는 것.


웬만한 걸로 흔들리지 않을 것 같던 그 남자는 결혼하고 아이가 둘이 되어도 변하지 않았다. 혼자였을 때처럼 야근을 했다. 주말에 TV 앞에 앉아서 코미디를 보며 박장대소를 했다. 내가 둘째 아이를 등에 업고 첫째 아이가 놀아달라며 내 한쪽 다리를 잡고 늘어지는 동안, "대체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냐"라고 남편에게 갈 호통을 첫째 아이에게 퍼부으며 설거지를 하는 동안, 그는 변하지 않았다. 그 일에 지치고 지쳐 어느 날 사표를 내겠다고 했을 때에도 그는 "너 좋을 대로 하라"고 했다. 차라리 그가 좀 더 육아를 돕겠다고, 우리가 자리 잡을 때까지 조금 더 버텨달라고 했다면, 그때 그리 쉽게 사표를 냈을까. 그저 나 좋을 대로 하라니. 여태 나는 해도 되고 안 해도 그만인 이 일을 그렇게 죄책감으로 가지고 죽을 듯이 하고 있었던 거구나. 나 좋으라고?


너는 너 좋을 대로, 나는 나 좋을 대로. 더 이상 합일이랄지, 함께함의 의미를 찾지 못하자 나는 더 이상 회사에 버틸 이유도 찾지 못했다. 이제 생존이다. 나를 불행하게 하는 것으로부터 나부터 살고 볼 일이었다.


남편은 돈을 벌어오고 자동차를 관리한다. 나는 아이를 돌보고 집안일을 한다. 여행을 가게 될 때도 마찬가지. 내가 내 짐과 아이 짐을 싸면, 남편은 자신의 가방을 꾸렸다. 한때 캠핑을 다닌 적이 있는데, 남편은 그때도 전실까지 갖춘 6-8인용 텐트를 혼자 쳤다. 그 일은 '본인의 일'이기도 했지만, 내가 어설픈 각도로 폴을 잡고 있거나 헐겁게 매듭짓는 것 자체를 못 견뎌했다는 게 더 옳은 말일 거다. 그렇다. 남편은 제대로 하는 일을 좋아했다. 나는 늘 내가 제대로 해내지 못할까 봐 자신이 없는 사람이었다.


혼자 하는 일은 얼마나 편한가. 내가 원하는 대로 뭐든 할 수 있다. 상대방으로 인해 내 의도가 손상되거나 왜곡되지 않는다. 혹 그 일의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나 혼자 짊어지면 된다. 네가 중간에 이렇게 변경하자고 해서 그르쳤다고 속으로 탓할 필요도 없다. 내 치부가 드러나더라도 나 혼자만 알면 된다. 얼마나 말끔한가.


그에 비해 함께 하는 것은 얼마나 구차한 일인지. 나보다 더 잘 알지도 못하는 상대는 늘 자기가 옳다. 내가 아무리 내 경험과 객관적인 데이터를 들이밀어도 꺾이지 않는다. 심지어 왜 너는 맨날 내 얘기만 안 듣냐며 기분 나빠한다. 그러다 예전에 결론 나지 않은 채 끝났던 비슷한 일이 떠올라 사태가 악화된다. 실랑이가 길어진 사이 최선이라 생각했던 선택을 놓치고, 그가 벌려놓은 일을 수습하기 위해 번거로운 일에 말려들기도 한다. 얼마나 지저분한가.


서로의 자리에게 각각 자기 일을 책임감 있게 해내는 것. 톱니바퀴처럼 착착 맞아떨어지는 그 일은 아름답다. 하지만, 틀렸다. 이제는 안다. 적어도 내가 아는 훌륭한 육아서, 부부관계와 인간관계를 서술하는 책에서는 그렇게 얘기하지 않는다. 서툴더라도 함께 할 것. 그 과정을 소중히 여길 것. 부족하기 때문에 서로 용납하는 관계로 나아갈 것.  


그리고, 함께 하기를 버리고 합일을 이루지 못한 우리의 문제는 첫째 아이가 사춘기를 맞을 때쯤 고스란히 다시 불거졌다. 은유 작가의 말처럼, 싸울수록 투명해질 터인데, 우리는'독립적'이라는 허울을 쓰고 싸움을 회피했다. 소위 싸움의 근육이랄지 탄력성 같은 게 없다 보니, 싸우면 끝일까 보아 점점 더 싸움을 시작하지 못했다. 싸움도 '상대방'을 염두에 둔 행위인데, 우리에겐 그조차 남아 있지 않았던 거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어떻게 다시 시작해야 할까. 회복할 수 있을까. 아니, 회복을 원하긴 할까. 너무 오랜 시간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살아와서,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와 내가 선택한 방식의 말끔함이 너무 좋아, 함께함의 의미를 계속 회피중인 건 아닐까.    


남편을 흔들어 깨우지 못하고, 같은 생각을 가진 이웃과 연대하지 못하고, 불합리한 것들을 바꾸어나가려는 노력과 손을 맞잡는데 저어하는. 세계와 접속하는 데 익숙하지 못한 삶. 어쩌면 내가 포기해야 할 서사는, 이 모든 걸 내 탓으로 돌리며 개인의 문제로 환원하는 이 방식에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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