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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마담 Oct 24. 2021

#15. 내 이야기를 포기하기 전

-내가 정말 원하는 이야기는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



코로나 직전, 한 두 집 걸러 며느리들이 시부모와 등을 돌렸다. 어느 집은 평생 시부모님 모시고 삼시 세끼 다 차리며 출근하던 여자가 이제와 분가를 선언했다고 했다. 어느 집은 명절에 이제 남편과 아들만 시댁에 보낸다고 했다. 물론, 내 주변엔 여전히 돌아가신 시아버지 제사상까지 차리며 사는 여자도 있다. 다들 그렇게 할 필요 없다고 말하지만, 그녀는 도리를 다하지 않는 게 더 마음 불편하다고 했다.  


간단하게 이분하는 예전 논법 같았으면 시댁에 등 돌린 며느리는 나쁜 여자, 도리를 다하는 며느리는 착한 여자다. 하지만 이제 아무도 남의 가정사에 대해 쉽게 재단하지 않는다. 시대가 그렇고, 그동안의 경험치가 우리에게 교훈을 주었기 때문이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다는, 인생은 끊임없이 선택하고 책임이 반복되는 곳이란 걸 알만 한 사람은 다 알기 때문이다. 때론 평생 쌓아 온 좋은 며느리라는 타이틀을 내어놓고 얼마간 나쁜 며느리라는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 어떤 이는 좋은 며느리라는 왕관이 주는 무게를 견디기 위해서 계속 희생을 감수하기도 할테지. 그저 자신이 선택한 것에 책임을 질 뿐이다.


도리와 의무가 강력하게 작동하던 시절. 도무지 내가 선택하지 않은 인생 때문에 너무 많은 짐을 지고 살아야 했던 어머니들은 그럴 수 없었다. 내가 명절에 친정에 다녀본 적 없기 때문에, 며느리도 친정에 가겠다고 하면 눈을 흘겼다. 며느리가 아들을 낳아야 좋았다. 왜? 그냥! 아들이 좋다고 하니까. 아들이어야 어머니를 모시고 살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내가 여자라서 차별당하고, 하고 싶은 공부 못하고, 공장에 다니며 오빠 출세시켰어. 그럼 내 딸은 그러지 않도록 해야 하고, 내 집에 들어온 다른 집 딸도 그렇게 살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놀랍게도 사람들은 내가 들인 시간과 삶의 이력만큼 대물림을 했다. 


어른들 중에 만나기만 하면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뭐가 그리 좋다고 만나기만 하면 불행했던 시절과 실패했던 과오를 복기한다. 그들은 늘 변화를 원한다. 하지만 자신만 빼고, 늘 주변이 변화길 원한다. 그리고 한탄한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다 집구석에 잘못 들어온 이 여자 때문이고, 친구가 나한테 사기쳤기 때문이고, 정치가 잘못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톡을 통해 가짜 뉴스를 퍼나른다. 체념한 자의 교훈을 남발하며, 남의 노력을 폄하하며, 불행을 유통한다. 남들처럼 가질 수 없으니, 내 수준으로 깎아내린다. 멈추려면 변해야 하고, 변하기 위해선 익숙한 자신의 모습을 죽여야 하는데, 그래야 다시 태어날 수 있는데, 죽기는 싫으니까. 


레베카 솔닛의 에세이 <멀고도 가까운>에 보면 만성 통증 환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만성 통증은 딱히 정해진 치료법이 없지만, 환자가 자신의 고통을 다르게 경험하도록 훈련시키면 어느 정도 치료가 가능하다고 한다. 하지만, 그 환자에게 꼭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건 '자신의 이야기를 포기할 준비'라고 했다.

단, 환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너무 사랑하는 나머지 그것이 자신의 비극일지라도, 이 이야기 때문에 본인이 불행할지라도 계속 이야기한다. 혹은 그 이야기를 멈추는 방법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은 편안함보다는 일관성을 더 소중히 여기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움 때문일 수도 있다.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 어느 부분은 죽어야 하기 때문에, 다시 태어나는 것보다 죽음이 먼저 오기 때문에, 어떤 이야기의 죽음은 스스로 익숙한 자기 모습의 죽음이기 때문에(p352-353).


인어공주가 다리를 얻기 위해서는 목소리를 내주어야 했고, 예쁜 공주를 얻기 위해서 왕자는 용을 물리쳐야 한다. 나는 이제껏 써내려온 이야기 중 어떤 부분을 포기하고 어떤 부분을 재편집하며 살아야 할까. 


그리고 알았다. 바꾸고 싶은 것 이전에, 내가 원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나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조차 정확히 알고 있지 못했다. 무엇 때문에 불행해? 라고 물으면, 꼭 돈이 많다고 행복한 것은 아니라고 대답했다. 누구 때문에 불행해? 라고 물으면, 모든 사람들의 제각각의 사정이 다 이해가 되었다. 상대적으로 더 나쁜 처지의 사람들과 비교하면 내 넋두리는 모두 사치에 불과했다. 결국 '나'에게 필요한 것은 내가 '나'를 모른다는 것. 모든 기준이 상대적으로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러니 나도 모르는 나를 위해 누가 무엇이라도 해줄 수 있을까.  


그때부터 적어가기 시작했다. 내가 느끼는 불행에 대해,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에 대해, 내가 바꾸고 싶으나 회피하는 것들에 대해.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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