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이합집산, 떠날 이 1편
떠날 이離.
마운드에 선 투수가 땀에 젖은 모자를 고쳐 쓰고 몸 푸는 장면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다수의 운동 선수들은 본 동작을 더 정교하게 해내기 위해 또는 추진력을 얻기 위해 또는 루틴으로 불안감을 덜기 위해 다양한 예비 동작을 하는데요. 사람의 이별에도 예비 동작 같은 것이 있을까 문득 궁금합니다. 모두가 예비 동작을 거치고 상대와 헤어지는 건 아니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분명 자기만의 예비 동작을 거친 뒤 이별을 고하거나 받아들였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돌이켜보면 나는 이별을 스스로 택할 때도 통보된 이별을 이만 납득할 때도 내 나름으로 무수한 예비 동작들을 행해 왔던 것 같습니다. 대개 내 마음의 안전이나 안정을 위한 동작들이었습니다. 준비를 많이 하는 만큼 이별이 쉬워진다면 너무 좋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나에게 그런 경우는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 걸 보면 이별 전 내 예비 동작들은 그냥 내 내면의 불안감을 잠재우기 위한 단순한 루틴에 지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더 나은 이별을 만들어 주는 예비 동작들이 아니라.
이별을 잘 알아야 이별을 잘할 텐데 나는 이별을 잘 몰라서 그 준비도 잘못했나 봅니다. 구종 하나 제대로 모르면서 좋은 투수 되겠다고 야구공을 아무렇게나 던지며 스트라이크 사인을 기대하는 사람처럼.
이별을 발언하기 위해 또는 소화하기 위해 내가 하는 예비 동작들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과 내 관계의 연대기 작성하기(모든 사건들을 객관적으로 치밀하게 기록하며 이별의 정당성을 따져 봅니다). 그 사람 없는 내 생활을 구체적으로 상상하며 판단과 사실 분리하기(파국적 사고를 피하고 이별을 그냥 이별로 보려 노력합니다. 이별을 모종의 재앙으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 사람과 내 관계에 관해 묻는 사람들에게 해 줄 말 정리하기. 그 사람이 나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에게 더는 괜찮다고 말하지 않기. 그 사람과 곧 헤어질 거면 그 사람 앞에서 영영 헤어지지 않을 사람처럼 굴지 않기. 그 사람과 대화하거나 대면하는 빈도 줄이기.
내 딴에는 최선의 이별을 해 보겠다고 그런 것들을 열심히 열심히 했는데요. 그런 준비들을 아무리 많이 해도 막상 누군가와 헤어지고 나면 어딘가에서 험하게 뒹굴어 온몸에 심한 타박상을 입은 것 같았습니다. 그게 꼭 연애 상대가 아니어도 몇 시절 진정을 주고받은 사람과 헤어질 때마다 내 세계는 전복되었습니다. 그렇게 도약 연습을 착지 연습을 성실히 했는데 세계가 한 순간에 뒤집어져 버리니 어디가 공중이고 어디가 땅인지 식별되지 않아 내 모든 연습 시간은 거의 무용해졌습니다. 나는 엉성한 자세로 추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추락하는 동안 나는 모를 곳에 항상 물었습니다. 대체 먼지 하나 안 일어나는 차분한 이별은 누가 어떻게 하는 거야? 아무도 안 다치는 이별이 진짜 있기는 한 거야?
헤어지자고 말하는 게 나여도 나는 이별의 순간 어딘가에서 어딘가로 떨어져 내립니다. 우습고 해괴한 일입니다. 속 시원한 이별, 하나도 안 아린 이별을 나는 아직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습니다. 내가 아직 너무 미성숙한 걸까요. 아니면 원래 모든 이별이 이별하는 사람들 세계를 통째로 뒤엎어 버리는 걸까요.
다행스럽게도 세월 갈수록 이별의 여파가 줄기는 합니다. 그럼에도 나는 이별이 두려워요. 누구랑 머지않아 헤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땅에 부딪치지도 않은 등허리가 벌써부터 아파 옵니다. 어른인 척해야 하니 남들 앞에서는 그런 소리 잘 못하지만요. 혼자 있을 때는 마음껏 말합니다. 지금도 무섭다고요. 누군가와 헤어지는 일이 지금도 너무 두렵다고.
누군가와 헤어질 때 당신은 대체로 어떤 사람이었나요. 예리한 직관력을 타고나 이별이 저 먼 데 있을 때부터 이별을 맞아들일 준비를 체계적으로 하는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통탄스러울 정도로 이별의 기미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이었는지 그도 아니라면 만남과 헤어짐의 무상함에 일찍이 통달해 누가 누구를 떠나가는 모든 순간들 속에서 시종 침착한 사람이었는지.
당신도 누군가와 헤어지는 게 가끔 무서우면 우리 간혹 그 얘기하러 만날까요. 만나서 각자가 무서워하는 걸 남김없이 털어놓고 헤어지는 겁니다. 영 체면이 안 선다 싶으면 주어는 빼고 무섭다는 말만 나누고 헤어져요. 무서워, 무섭네, 무서운 것 같아, 무서워도 괜찮은 걸까, 무섭지만 어떡하겠어, 무서울 만한 일이지(2편으로 이어집니다).
박이로운
1992년 출생. 문학서와 인문서를 주로 발간하는 어떤 마음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다. 현재까지 약 70여 권의 책을 출간하였다. 영남대학교 환경보건대학원에서 미술치료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마음을 건강하게 다루며 살아가는 일, 소외된 이들의 서사를 들리는 목소리로 바꾸는 일에 관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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